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2
1452회. 내가 왜?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선봉을 돌아가며 맡자’는 엘리오 라고아 백작의 말에 라미노프와 아발론 왕국 사령관들의 안색이 변했다.
사실 라미노프와 아발론 왕국의 경우 주로 선봉에게 박살 난 마족 잔당들을 퇴치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봉에 나섰다 운 없게 마족 군주가 이끄는 군단과 만나기라도 한다면, 퇴치가 아니라 전멸을 걱정해야 한다.
일 잘하고 있는 에스카토스 왕국의 발목을 잡으려다가 올가미에 스스로 머리를 밀어 넣게 된 형국이다.
당황한 라미노프와 아발론 왕국 사령관들이 입장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엘리오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타나토스는 모든 왕국군에 공평하게 지급돼야 한다면서, 선봉만은 못 서겠다는 건…… 뱀 같은 심보잖습니까? 난 그런 뱀 같은 놈이 우리 북부 왕국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누구라도 그런 뱀 새끼를 등 뒤에 남겨 두고 전선으로 달려가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놈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서 결투로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3군 사령부 회의실에 감돌았다.
북부에는 라고아 백작에 관한 수많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하나가 결투다.
기사 시절에 결투로 남작부터 백작까지 곤죽을 만들었다.
북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국에서는 크나우프 대공가의 소드마스터까지 박살 냈다.
지금까지 결투라는 합법적인 절차로 모든 상대를 처리해 온 라고아 백작이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게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
결투를 남발하고, 말한 것을 지키는 라고아 백작의 성격상 뱀 새끼로 지목당하면 반드시 죽게 될 터였다.
그것이 설사 라미노프 왕국군의 사령관인 라미노프 3세라 해도 말이다.
3군 사령관 키릴 보우바 공작의 시선이 라미노프 3세를 향했다.
그야말로 반에스카토스 왕국 진영의 수장이자, 타나토스의 보급 문제를 공론화한 사람인 까닭이다.
‘지독한 놈…….’
라미노프 3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타나토스의 배급을 문제 삼은 건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뒤를 대비해서였다.
그가 노린 것은 ‘동부 전선에서 타나토스의 보급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기록이었다.
그런 기록 하나만 남겨 놓아도, 훗날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공적을 평가할 때 부정적으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에서 타나토스의 보급 지연을 항의하면 양보해 주는 척하며 물러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며 선봉을 맡자니?
물론 하자면 못 할 것도 없다.
북부 왕국은 오래전에 검방병을 총병으로 바꾸었다.
타나토스만 제대로 보급된다면 마족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족 군주가 문제지만, 마족 군주의 숫자는 많지 않으니 척후대를 쉬지 않고 운용하면 피해 갈 수 있을 터였다.
‘위태롭다 싶으면 에스카토스 왕국군 진영으로 후퇴해도 되고…….’
라미노프 3세의 답을 기다리던 보우바 3군 사령관이 물었다.
“라미노프 3세 전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라미노프 3세는 이스크라 라미노프 공작을 바라보았다.
라미노프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마족 군단을 상대로 선봉이라니!
아무리 북부 왕국군이 타나토스로 무장했다 해도 무리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들이 싸운 마족들은 전부 패잔병들이었다.
선봉군에 박살 나 조각조각 흩어진 마족들은 인간의 군대를 보기만 해도 달아났다.
그런 마족과의 전투 경험을 맹신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은 무조건 라고아 백작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라미노프 3세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라미노프와 아발론 왕국에 타나토스를 에스카토스 왕국만큼 보급해 준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다.”
보우바 3군 사령관은 일을 매듭짓기 위해 서둘러 답했다.
“알겠습니다. 선봉군에 타나토스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알레크스 왕국 수복 작전에는 어느 왕국이 선봉으로 나서겠습니까?”
“라미노프가 하도록 하지. 괜찮겠나?”
라미노프 3세가 아발론 왕국군 사령관 제프 디마 공작을 바라보았다.
“예.”
디마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지만 라미노프 3세가 저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라미노프 왕국은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스스로의 의지로 지옥문 앞으로 걸어갔다.
***
에스카토스 왕국군의 휴식 시간이 길어졌다.
그사이 라미노프 왕국이 알레크스 왕국 수복의 선봉에 섰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라미노프 왕국군이 맡던 좌측 후미로 빠졌다.
지금까지 동부 지역 최전방에서 마족과 전투를 벌여 왔던 서부군은 갑자기 찾아온 행복에 매일매일이 축제 분위기였다.
비록 능력 있는 사령관 덕분에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최전방에서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하루 종일 긴장을 유지해야 했음은 물론, 쉴 때도 무장을 해제하지 못했다.
지휘관들은 잠잘 때도 신발을 벗지 않았다.
하지만 후미에서의 생활은 달랐다.
최전방에 라미노프 왕국이 있으니 주둔지 부근만 정찰하면 됐다.
어쩌다 마주치는 마족들도 마족 군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투의 순서는 전과 같았다.
마족과 조우한 순간 사령관의 일 차 공격이 시작된다.
사령관의 공격에 놀란 마족들은 열이면 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서부군이 하는 일이란 마족들의 뒤통수에 마력총을 쏘는 게 전부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타나토스의 보급량이다.
전과 달리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타나토스를 충분히 보급받지 못했다.
그래도 서부군은 3군에 항의하지 않았다.
3사령부 보급 부대를 통해 전해 듣는 라미노프 왕국군의 상태가 처참했기 때문이다.
알레크스 왕국.
서부군 사령부.
세 번째 보급을 받고 난 직후, 참모장이 라고아 사령관을 찾아갔다.
“사령관님.”
“왜?”
“혹시 부사령관님에게 라미노프 왕국군 소식 들으셨습니까?”
“들어야 돼?”
“예. 심각합니다.”
“어느 정도기에? 아직 마족 군주와 만난 적도 없다면서?”
엘리오가 생각하기에 마족 군주만 아니면 싸울 만했다.
소드마스터와 마법사, 그리고 타나토스로 무장한 라미노프 왕국군 화력이 상위 마족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저도 군주만 안 만나면 어느 정도 버텨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아니랍니다.”
“괜히 선봉에서 빠지려고 앓는 소리 하는 거 아냐?”
“3군 사령부 보급 부대장이 직접 보고해 준 말입니다.”
“어느 정도기에?”
“라미노프 왕국군 사상자가 벌써 오천이 넘었답니다.”
“라미노프 왕국군이 이만 명인데…… 사상자가 오천 명이나 된다고?”
“그렇습니다.”
“흠!”
엘리오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삼십 일 만에 오천 명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왕국 하나를 지나가는 데 보통 석 달쯤 걸린다.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오가 무심코 말했다.
“알레크스 왕국의 수복보다 라미노프 왕국군이 먼저 사라지겠는데?”
“그렇습니다. 강력한 마족들과 만나면 한두 번의 전투만으로도 괴멸 수준의 피해를 입게 될 수 있습니다.”
“3군 사령부에서는 말이 없고?”
“아무래도 사령관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 내가 어쨌다고?”
엘리오는 자신이 3군 사령부에서 한 말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령관님께서 선봉을 세 왕국에서 교대로 맡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면서요? 반대하면 왕이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건 맥락이 조금 다른데. 나는 타나토스를 공평하게 보급할 거면, 선봉도 돌아가며 맡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3군 사령부 보급 부대장은 그런 식으로 알고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
엘리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튼 3군 사령부에서는 사령관님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라미노프 왕국을 싫어하지만……. 그들이 마족에게 몰살당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사령관님께서 3군 사령부를 방문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비드 참모장은 라고아 사령관이 3군 사령부의 오해를 풀어 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왜?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엘리오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비드 참모장이 몇 번 더 권했지만 엘리오는 듣지 않았다.
그날 저녁.
생각할수록 짜증이 난 엘리오는 슬래시 랜드 영지군 진영을 방문했다.
말이 잘 통하는 파비안 영주를 찾아간 것이다.
막사에서 빈둥거리던 파비안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
엘리오가 피곤한 얼굴로 파비안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하고 있었냐?”
엉거주춤 서 있던 파비안이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쉬고 있었습니다.”
“좋냐?”
뜬금없는 질문에 파비안은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주 꿀맛입니다.”
“라미노프 왕국군 사상자가 오천이란다. 삼십 일 만에.”
“미쳤네요. 마족 군단과 싸웠답니까?”
“마족 군단과 싸웠으면 생존자가 오천이었을 게다.”
“타나토스도 부족하지 않게 보급받았을 텐데 왜 그 모양이랍니까?”
“싸움은 마음에 달린 거야. 투지로 가득한 마족과의 싸움이 쉬울 것 같냐?”
“하아! 그 정도로 차이가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파비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서부군의 상대는 전의를 상실한 마족이었다.
“아까 참모장이 나더러 3군 사령부에 가 보라는데 거절했다. 라미노프 3세가 자처한 일인데 왜 내가 나서야 하냐? 안 그래?”
“그런데 백작님 말씀대로라면 라미노프든 아발론 왕국이든, 선봉에 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파비안이 라고아 백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라미노프와 아발론 왕국에 라고아 백작처럼 마족들의 기선을 제압할 능력자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내가 하라고 등 떠민 거 아냐. 라미노프 3세가 하겠다고 한 거지.”
“라미노프 3세가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합니다. 그것 때문에 꼴통 짓도 많이 하고요. 3군 사령부에서 백작님이 공평하게 하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셨다면서요?”
“내가?”
엘리오는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끔뻑였다.
참모장에 이어 파비안까지 같은 소리를 하니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진짜 그렇게 말했나?’
삼인성호라고, 엘리오는 드디어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뭐. 백작님 성격에 그러고도 남죠. 라미노프 3세는 절대로 먼저 고개 숙이지 않을 겁니다.”
“라미노프 왕국군이 괴멸당해도?”
“병사들이야 또 모집하면 되잖습니까. 징집 연령을 손보면 이만 명은 금방 채울 수 있습니다.”
“너 좀 무섭다.”
“라미노프 3세가 그럴 거라는 말씀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이만 명이 죽어도 모른 척한다고?”
“라미노프 3세라면 그 책임을 백작님에게 전가할 겁니다. 이미 백작님이 그렇게 하라고 한 것으로 소문도 났고요.”
“내가 하라고 한 거 아니다. 제가 하겠다고 나선 거지.”
“사람들은 원래 약자를 동정합니다. 소문도 그러니 참모장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겁니다.”
“에이, 썅!”
투덜거리던 엘리오가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으십니까?”
“밀주 있으면 내놔 봐.”
“참으시죠. 이 상황에서 술까지 드시면 상황만 더 악화됩니다.”
“소문 안 나 인마. 내가 밀주 한 모금 마신다고 취할 사람으로 보이냐?”
엘리오가 눈을 부라리자 파비안은 마지못해 숨겨 둔 밀주를 꺼냈다.
밀주를 병째 들고 마시던 엘리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세라 경과는 잘돼 가냐?”
“지금 세라 경 이야기할 때입니까?”
“말 돌리지 말고.”
“서부군이 선봉에 있을 때는 연락도 못 했는데……. 요즘은 제가 중부군 숙영지로 찾아가서 만나고 있습니다.”
“세라 경이 성녀네. 너 같은 바람둥이를 다 만나 주고.”
“지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렇고 애슐리 넬슨 남작 기억나십니까?”
“코르보 마법 병단 호위 기사?”
“예, 코르보 마법 병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지 좀 됐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윈 레더 남작이 전사하면서 공석이 된 벨라토스 부대장에 취임했답니다. 후작이 직접 임명했다는데, 그걸 두고 뒷말이 좀 많았던 모양입니다.”
“왜?”
“작위를 승계받은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아직 미혼이거든요.”
“아하.”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이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