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3
1453회. 거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파비안은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애슐리 넬슨 남작에 관심을 보이자 계속해서 말했다.
“북부로 돌아왔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페로무로스에서 총상을 입고 제국령으로 후송됐었답니다. 그러다 북부 왕국과 제국 간 전쟁이 발발하니까 대우가 확 바뀌더랍니다. 감시도 붙고요.”
“넬슨 남작의 어머니가 북부 귀족이라서?”
“넬슨 남작이 워낙 미인 아닙니까. 귀족들 사이에 인기도 많았을 테고. 미인계로 사용되지는 않을까 신경 쓰였을 겁니다.”
“제국군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죠. 총상이 심해 코르보 마법병단에서 전역을 시켰답니다. 부상에서 회복될 즈음, 북부 왕국과 제국 간 전쟁도 끝나고요. 이때다 싶어 북부로 돌아왔답니다. 북부 왕국 출신에 대한 차별이 심했나 보더라고요.”
“전쟁 중이니 그럴 수밖에. 총상은 나았고?”
“낫긴 했는데 이전처럼 검을 다룰 수가 없어서 총사로 전향했답니다.”
“총사라. 그것도 괜찮지.”
엑시티움과 타나토스가 보급된 뒤로 기사보다 총사가 더 인기였다.
실전에서도 총사가 기사를 압도했다.
마나 유저만 돼도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으니 가히 총사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백작님의 소식을 궁금해 하던데, 시간 되면 한번 찾아가 보십쇼.”
“우리 서부군에 있나?”
“맞습니다.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지휘하는 유니콘 부대에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어떤 사람이야?”
“젊고 야심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사람됨이 어떻다 하는 거 있잖아.”
“딱히 나쁜 짓을 했다는 소문은 없습니다.”
“무난하다는 거네?”
“선친인 베르나르도 후작이 엄격한 사람이라 조심했을 겁니다. 이제 작위를 승계받았으니 슬슬 말이 나오기는 할 겁니다.”
“아버지만큼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
엘리오는 베르나르도 후작과의 좋은 인연을 후계자가 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
알레크스 왕국.
서부군.
유니콘 부대(베르나르도 후작군).
베르나르도 후작은 비록 작위는 높았지만 아직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한 무력이라 서부군 부사령관 직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유니콘 부대라 불리는 베르나르도 후작군의 지휘관이기도 했기에 평소 사령부가 아니라 유니콘 부대에서 생활했다.
일과가 끝난 시간.
하늘이 안개가 서린 것처럼 뿌옇게 변해 갈 때, 미모의 여기사가 부대장의 막사를 찾았다.
“후작 각하, 부르셨습니까?”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환한 얼굴로 애슐리 넬슨 남작을 맞이했다.
“넬슨 남작. 어서 오게. 자리에 앉지.”
애슐리 넬슨 남작이 베르나르도 후작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미소로 넬슨 남작을 지켜보던 후작이 물었다.
“그래, 부대 생활은 어떤가? 마법병단에 비교하면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겠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넬슨 남작의 대답은 간결했다.
다른 이야기가 더 나오기를 기다리던 후작이 멋쩍은 얼굴로 말을 돌렸다.
“몸은 좀 어떤가?”
“거의 다 나았습니다. 부대를 지휘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중대장이 여자라고 얕잡아 보는 기사들은 없고?”
“없습니다.”
“휘하의 부하들도 말을 잘 듣나?”
“예.”
“다행이군. 위에서 내리꽂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문이 있어서……. 남작이 부대를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마법병단에서 배운 게 많았던 모양이야. 중대장으로 두기에는 재능이 아까운걸? 유니콘 부대에서 내 참모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과찬이십니다. 저는 벨라토스 중대로 만족합니다.”
“일선 중대장보다는 참모가 남작의 승작에 더 도움이 될 걸세.”
공적을 추서하는 사람이 지휘관이니 그 옆에 붙어 있는 게 빠르다는 의미였다.
“승작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일선 부대를 지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넬슨 남작의 말이 맞았다.
기사의 승작은 전쟁에서의 공적과 개인의 무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넬슨 남작이 거부의 뜻을 밝히자 더 권하지 않았다.
“남작의 뜻은 잘 알았네. 마음이 바뀌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아무 때라도 나를 찾아오게. 내 막사의 문은 남작에게 항상 열려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넬슨 남작이 끝까지 ‘네’라고 답하지 않자 후작은 쓰게 웃었다.
“딱딱한 이야기는 그쯤 하고, 차라도 한잔 마시며 제국군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서 마력총을 정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격발 장치가 조금 뻑뻑해서, 기술자를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그런 건 기수(旗手)에게 맡겨도 될 것 같은데.”
“제 목숨과 직결된 마력총의 문제를 타인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 훌륭한 마음이군. 알겠네. 그만 가 보게. 내 방, 아니 막사 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건 잊지 말게.”
“…….”
넬슨 남작은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 없이― 군례를 올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직후, 기다렸다는 듯 참모인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이 막사로 들어왔다.
“후작 각하, 대화는 잘 끝났습니까?”
“잘 끝났냐고요? 나갈 때 넬슨 남작 얼굴 못 봤습니까?”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은 사석인지라 사촌 형인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에게 존대를 했다.
후작 작위를 승계받기 전까지 존대했던 터라 어색함은 없었다.
“넬슨 남작이야 원래 표정이 없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잘 안 됐습니까?”
“안 됐어요. 벨라토스 중대에 뼈를 묻을 기세예요.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겁니까?”
“중대장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흘렸습니다. 지휘관들 모임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는 중인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쯧! 이런 작은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습니까? 형님.”
“송구합니다.”
“내 옆에 넬슨 남작을 앉혀 주겠다면서요. 우선 벨라토스 중대장으로 임명하고, 참모로 끌어올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본인이 싫다고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두고 볼 겁니까?”
“후작 각하께서 넬슨 남작을 자주 부르시니……. 부담이 돼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넬슨 남작을 벨라토스 중대장에 앉혀 놓은 뒤에 자주 만나라고 하신 건 형님입니다.”
“후작 각하께서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시니 놀라서 움찔하는 겁니다.”
“다 필요 없고, 참모로 올리기나 해 주세요.”
“기수들을 포섭해 보겠습니다.”
“중대장들도 못했는데 기수들로 해 보겠다고요?”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뭔지 아십니까?”
“뭔데요?”
“부하들의 하극상입니다. 벨라토스의 기수들이 은근히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계속 벨라토스 중대장을 맡으라고 해도 거절할 겁니다.”
“뭘 하든 빨리빨리 하세요. 서부군이 또다시 선봉으로 나서면 어떻게 해 볼 기회도 없습니다. 시간 있을 때 진도 좀 나가 보자고요. 밤이 너무 깁니다, 형님.”
“알겠습니다. 다만 후작 각하께서도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마십시오. 상대가 부담을 느끼면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거절요? 베르나르도 후작령에 살면서 내 구애를 거절한다고요? 설마요. 그건 오히려 상대 가문의 영광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자의 감정이라는 게 미묘해서…….”
“아니요. 거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클루톤의 영주이자 후작인 내가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데 거절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은 고집불통인 후작의 설득을 포기했다.
후작의 말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영지에서 영주는 왕과도 같다.
비록 상대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해도 언제든지 취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엘리오는 유니콘 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몰랐다면 모를까?
애슐리 넬슨 남작이 휘하 부대에 있음을 알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니콘 부대의 초병을 지나쳐 벨라토스 중대를 찾아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쯤 가자 웅성거리는 병사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병사들 앞에서 넬슨 남작과 두 명의 기사가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넬슨 남작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의 부관인 골란과 1소대 기수 듀크를 노려보았다.
“지금 중대장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그러자 골란 부관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명령에 불복이라뇨? 고운 입으로 왜 그렇게 험하게 말씀하십니까? 군수과의 블라비코 남작님께서 중대장님이 직접 오시기 전에는 안 된다고 해서 그러는 겁니다.”
부관의 성희롱이 섞인 말에 넬슨 남작은 기가 막혀 한순간 할 말을 잊었다.
어제 부관에게 ‘중대에서 격발 장치가 불량인 마력총의 현황을 파악해 오라’고 했더니, 안 된단다.
3개 소대 기수들에게 각 소대가 보유한 타나토스의 수량 조사를 시켰는데, 1소대가 누락됐다.
이유를 물으니 군수과장인 블라비코 남작이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미처 못 했단다.
넬슨 남작의 시선이 이번에는 1소대 기수인 듀크에게로 향했다.
“너도 블라비코 남작의 지시를 하느라 중대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고?”
“중대장님, 저는 블라비코 남작님이 지시한 일을 하느라 잠도 못 잤습니다.”
넬슨 남작이 기막힌 얼굴로 부관과 기수에게 물었다.
“너희 지휘관이 중대장인가? 군수과장인가?”
두 기사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중대장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중대장의 명령을 듣지 않는 거지?”
그러자 두 기사는 같은 변명을 늘어놨다.
“블라비코 남작님께서 중대장님에게 직접 알려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블라비코 남작님의 지시로 밤을 샜습니다.”
“닥쳐! 너희 지휘관은 나다! 그런데 왜 블라비코 남작의 말에 따르나?”
골란 부관이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중대장님! 그건 블라비코 남작님에게 가서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리에게만 뭐라고 하십니까? 설마 블라비코 남작님이 어려워서 우리에게 떠넘기는 겁니까?”
1소대 기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중대장님 명령에 따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블라비코 남작님의 지시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습니까? 상관의 권위만 내세우지 마시고, 부하들의 고충을 생각해 주십쇼.”
골란과 듀크는 모두 기사였기에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항의했다.
기사는 작위만 없을 뿐 준귀족으로 그 위치가 상당한 까닭이다.
두 사람에게 부상을 입고 총사로 전향한 여 중대장은, 발톱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
넬슨 남작은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두 기사의 발언은 선을 넘나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수과장인 블라비코 남작의 어깃장에 두 기사가 교묘하게 편승해서 자신만 우습게 되고 말았다.
병사들 역시 중간에서 체면만 상하게 된 중대장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때 누군가 병사들을 가르며 넬슨 남작에게 다가갔다.
사령관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넬슨 남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령관님?”
깜짝 놀란 넬슨 남작이 묵례를 하자 엘리오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넬슨 남작님. 오랜만입니다. 벨라토스 중대장으로 왔다는 소식을 어제야 들었지 뭡니까.”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바쁘신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라고아 백작의 말에 뒤로 물러나 있던 골란과 듀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사령관인 라고아 백작과 넬슨 남작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런 정신 나간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엘리오가 두 기사를 향해 말했다.
“어이, 기사님들. 전시의 하극상은 즉결 처분이야. 그 정도는 알고 까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