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6
1456회. 거부는 거절한다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은 갑자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다가오자 한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뭐지? 사과를 했는데 왜 저러지? 무슨 실언을 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빠트린 건 없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사과는 넘치도록 했다.
그런데 왜 라고아 백작은 성난 야수처럼 돌진해 오는 것일까?
‘그래 봐야 백작에게 후작인 내가 겁을 먹어서는 안 되지.’
다른 대귀족들의 앞이라 베르나르도 후작은 피하지 않았다.
결국 라고아 백작은 베르나르도 후작의 앞에 도달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왜?’라는 눈빛으로 라고아 백작을 바라볼 때다.
가죽 장갑을 든 엘리오의 손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촥! 촥―!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베르나르도 후작의 얼굴이 좌우로 돌아갔다.
한순간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오가 가죽 장갑을 베르나르도 후작의 가슴에 던지며 말했다.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 당신은 내 부대의 하급 지휘관들을 하극상하게 만들어, 내 부대의 군기는 물론, 내 친구의 명예까지도 훼손했다. 이에 서부군 사령관인 나 엘리오 라고아가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거부는 거절한다. 거부하면 내 칼끝은 베르나르도 후작가를 향할 것이다.”
“…….”
베르나르도 후작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이내 극심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와 결투라니?
거부를 거절한다니?
심지어 거부하면 베르나르도 후작가를 치겠다는 협박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놀라기는 베르나르도 후작가의 대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라고아 백작의 극단적인 이 한 수는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철군을 무기로 타협의 여지가 있겠으나 결투 신청은 다르다.
당장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과 ‘베르나르도 후작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판이다.
대귀족의 말에는 무게가 있다.
더구나 왕국 대귀족들 앞에서 한 결투 선언이니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회의실의 대귀족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랜드 마스터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마티아스 코드란테스 백작은 물론 스타우로스 에스카토스 공작마저도 라고아 백작의 눈치만 살폈다.
결투 신청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결투를 신청한 뒤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베르나르도 후작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입니까? 나는 대귀족들 앞에서 그 일에 사과했습니다.”
“사과는 애슐리 넬슨 남작에게 했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결투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라고아 백작의 대답은 차갑기만 했다.
“늦었다. 당신에게는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칼날이 턱밑에 왔을 때 하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실수가 후작이 결투를 해야 할 정도로 큽니까? 아니요! 그 정도 일은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빌미로 나를 공격하려고 그러는 거겠죠? 서부군을 손에 넣으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는 응하지 않겠습니다. 왕국법에 불법 부당한 목적의 결투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에스카토스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지를 바라는 눈빛이다.
하지만 에스카토스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확실히 귀족 간 결투에는 그런 단서가 달려 있지.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증거가 보이지 않는군.”
이미 베르나르도 후작을 교체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공작은 조금도 호응하지 않았다.
코드란테스 백작마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작을 거들고 나섰다.
“제 눈에도 불법 부당한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에스카토스 공작과 코드란테스 백작이 심중에 품은 뜻을 밝히자 다른 대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들이 승인한 결투라면 더 이상 회피할 길도 없다.
배신감에 이를 갈고 있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기사단장 소울리스 스카리드 백작이 말했다.
“후작 각하, 결투를 받아들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믿었던 측근마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현기증이 나는지 휘청거렸다.
그러나 후작가 가신들 중에 아무도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의자를 잡고서야 균형을 되찾은 베르나르도 후작이 허탈한 얼굴로 물었다.
“대전사를 세우는 것은 허락됩니까?”
“명예롭지 못한 결투에 대전사로 나서 줄 기사가 있을지 모르겠군. 상관없다. 그럼 이제 결투의 조건을 말하지. 당신이 패하면 넬슨 중대장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라. 당신도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라. 나 역시 패한다면 당신에게 무릎 꿇을 각오가 되어 있다.”
누가 들으면 꽤나 공정한 조건이라 하겠지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그랜드 마스터니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나는, 하아! 없습니다.”
마족 군주들까지 참살하는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로 한 결투에서 승리의 조건을 걸면 조롱만 더해질 뿐이었다.
결투일은 다음 날 정오, 장소는 서부군 숙영지로 결정됐다.
결투가 정해지자 에스카토스 공작은 폐회를 선언했다.
***
알레크스 왕국.
서부군 진영.
유니콘 부대로 돌아간 베르나르도 후작은 가신들을 소집했다.
내일 있을 라고아 백작과의 결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가신들이 모이자마자 먼저 운을 뗐다.
“다들 알다시피 그렇게 됐소. 에스카토스 공작과 코드란테스 백작이 막판에 등을 돌린 건 아쉽지만…… 상대가 라고아 백작이니 별수 없었을 것이오. 결투일이 내일이라 진중에서 대전사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분이 자원하시겠소?”
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불사조 기사단장인 소울리스 스카리드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가 베르나르도 후작가에 남은 마지막 소드마스터인 까닭이다.
그러나 스카리드 백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참모장 코튼 베르나르도 자작이 한마디 했다.
“후작 각하, 기사분들이 겸손하시니 차라리 추천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스스로 나서지 않으니 등을 떠밀자는 소리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추천이 낫겠습니다.”
가신들의 말에 베르나르도 후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추천을 해 주시오. 어느 기사를 대전사로 추천하시겠소?”
막상 추천으로 하자고 했지만 가신들은 눈치가 보이는지 말을 아꼈다.
말이 좋아 추천이지 스카리드 백작을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도 후작의 수족인 참모장이 나섰다.
“불사조 기사단장님이신 스카리드 백작님을 추천합니다. 기사단장님이시라면 후작님의 명예를 지켜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참모장은 불사조 기사단장이라는 직위를 강조했다.
사실 후작의 친위대인 불사조 기사단이 나서는 게 맞는 건 사실이었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시선이 스카리드 백작을 향했다.
그러나 스카리드 백작은 단번에 거절의 뜻을 밝혔다.
“송구하지만 나는 대전사로 나서지 않겠습니다.”
당황한 후작을 대신해 참모장이 물었다.
“기사단장님, 실례지만 왜인지 그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왜냐고? 나에게 명예롭지 않은 결투라서 응할 수 없다. 이유는 참모장인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
가신들은 후작과 기사단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건 누가 봐도 후작가 최강의 기사단장이 후작에게 반기를 든 모양새였다.
회의실에 서늘한 긴장이 감돌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지만, 누구도 나서서 기사단장을 나무라지 못했다.
당장 회의실을 경호하는 기사들만 해도 모두 불사조 기사단인 까닭이다.
후작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화를 누르고 말했다.
“기사단장이 개인 사정으로 못 하겠다고 했으니 다른 기사를 추천해 주시오.”
순간 스카리드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개인 사정’이라는 후작의 발언을 정정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 다음은 소드 익스퍼트다.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로 소드 익스퍼트가 나선다면, 결투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만다.
때문에 가신들은 차마 대전사를 추천하지 못했다.
그때 정적을 깨고 한 귀족이 나섰다.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의 동생인 사이먼 베르나르도 남작이었다.
승계 서열에서는 밀렸지만 일찍이 소드 비기너가 되면서 남작의 작위를 획득한 그였다.
“기사단장이 못 하겠다면, 대전사가 아니라 후작 각하께서 직접 결투에 임하는 것이 명예로울 것 같습니다.”
“…….”
기이한 침묵이 좌중에 내려앉았다.
만에 하나 결투 후유증으로 후작이 사망하게 되면, 차남인 사이먼 베르나르도가 작위를 승계받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 후작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가신들이 반대를 하지 않는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가신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가신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할 뿐 끝내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 베르나르도 후작이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이 결투에서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군.”
“아닙니다!”
“각하, 오해이십니다!”
“대전사로 소드 익스퍼트를 내세우는 것은 라고아 백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가신들의 뻔한 변명에 베르나르도 후작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라고아 백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그놈은 나에 대한 예의가 없는데, 왜 나는 그놈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지?”
그러자 사이먼 베르나르도 남작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라고아 백작이 그랜드 마스터이기 때문입니다, 형님.”
베르나르도 남작의 말이 결정타였다.
후작이 소집한 회의는 끝내 대전사를 구하지 못하고 끝났다.
가신들을 모두 내보낸 베르나르도 후작이 참모장에게 물었다.
“오늘 밤 라고아 백작을 암살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서부군 사령부의 호위를 뚫지 못할 겁니다.”
“철군 카드로 라고아 백작을 압박하는 것은요?”
“그것도 불가합니다. 그자가 얼마나 막돼먹은 자인지 오늘 보셨잖습니까? 철군하면 항명죄를 뒤집어씌워 가신들을 다 죽일 겁니다.”
“방법이 없다는 소리네요?”
“그렇습니다.”
“흐흐흐! 크흐흣!”
돌연 베르나르도 후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참모장은 후작의 참담한 심정을 알기에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웃음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베르나르도 후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한 게 많았던 모양입니다. 약해지니 물어뜯으려고만 하지, 누구 하나 내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사람이 없네요. 나가 보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참모장은 묵례를 하고 조용히 떠났다.
그날 저녁.
라고아 백작의 막사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는 후작의 동생인 사이먼 베르나르도 남작이 보낸 사람이었다.
“사이먼 남작의 대리인이라고? 무슨 일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왔나?”
라고아 백작의 말에 대리인이 은근한 소리로 말했다.
“베르나르도 후작의 일로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내일 결투에 앞서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뭔가?”
“후작님이 대전사를 구하지 못해 내일 직접 결투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사정을 봐 달라?”
“아니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과를 받겠다는 조건이시니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후작님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중상을 입혀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사이먼 남작님께서 장차 엔아르케와 그 일대의 영지를 각하께 할양해 드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엘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자신을 골육상쟁에 이용해 먹으려 하다니?
후작가 귀족들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사이먼 남작의 제안은 잘 들었다. 살려 줄 테니 냄새나는 입 닫고 꺼져라.”
대리인을 쫓아낸 엘리오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세상이 미친놈투성이라니까.”
이젠 오히려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이 불쌍하게 여겨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