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57
1457회. 인간족의 대전사
다음 날.
정오 무렵, 결투 장소인 서부군 숙영지에 에스카토스 왕국 대귀족들이 모였다.
결투장의 병사들 출입은 금지됐다.
실질적으로 서부군의 주인인 샤를 베르나르도 후작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 그런 것이다.
잠시 후 두 기사가 마주 보고 섰다.
엘리오 라고아 백작과 베르나르도 후작이다.
문득 엘리오가 잔뜩 긴장한 얼굴의 베르나르도 후작을 보며 중얼거렸다.
“달아나지 않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베르나르도 후작이 애써 용기를 내 말했다.
“그랜드 마스터인 백작이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한 후작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 역시 내가 한 행동만큼이나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십시오.”
너도 나와 똑같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엘리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나는 귀하의 개 같은 행동을 벌하기 위해 나선 거니까. 소드 익스퍼트를 벌하려면 그보다 강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 어젯밤에 어떤 손님이 나를 찾아왔더라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청부를 했어. 당신을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주면 엔아르케 일대의 영지를 할양해 주겠다네? 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등 떠밀려 결투장에 나와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베르나르도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영지를 주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이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누군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작위를 승계할 사람, 동생 사이먼의 짓이 분명했다.
“대답이 없네? 입 닥치고 그냥 결투나 하자는 거지?”
말과 함께 엘리오가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르나르도 후작이 재빨리 소리쳤다.
“아닙니다! 할 말이 있습니다!”
“해 봐.”
“제가 영주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엔아르케 일대의 영지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제안을 먼저 한 사람이 있다니까. 먼저 말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는 거 몰라?”
“그, 그럼, 클루톤 영지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클루톤?”
“엔아르케 일대의 영지보다 열 배는 더 큽니다. 전체 영지의 십 퍼센트가 넘습니다.”
“마족들에게 빼앗긴 땅인데 굉장히 선심 쓰듯 말하네?”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뭐, 서부군이 제 역할을 한다면 곧 수복할 땅이기는 하지. 후작, 북부의 수복을 위해 헌신할 텐가?”
“예!”
베르나르도 후작은 라고아 백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큰 소리로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 결투란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베르나르도 후작은 지금 자신의 결투를 그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악의와 증오로 피 튀기는 싸움이 아닌, 승패만 확인하는 쇼 말이다.
“좋아. 시작하지.”
엘리오가 눈짓하자 베르나르도 후작은 황급히 롱소드를 뽑으며 말했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조금 따끔할 거야.”
엘리오의 대검이 태풍처럼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휘몰아쳐 갔다.
챙! 챙! 챙! 채앵―!
대검과 롱소드가 맞붙으며 불꽃이 튀었다.
소드 익스퍼트인 베르나르도 후작은 전력으로 대검을 막아 냈다.
조금 따끔할 거라는 말과 달리 대검은 죽일 것처럼 날아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막는 데 실패하면 팔다리가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르도 후작은 물에서 건진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엘리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후작의 집중력이 흩어진 틈에 대검이 롱소드를 뚫고 허리로 파고들었다.
쉬익―!
베르나르도 후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퍽―!
결정적인 순간 엘리오가 대검을 비틀어 검면으로 후작의 허리를 후려쳤다.
검면이라 해도 그랜드 마스터의 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크윽!”
답답한 신음과 함께 베르나르도 후작이 뒷걸음질 쳤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에서 밀려오는 격통에 후작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갈비뼈가 부러진 게 틀림 없었다.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고 있는 베르나르도 후작에게 엘리오가 말했다.
“후작, 패배를 시인하겠나?”
“예…….”
“좋아. 그렇다면 패배자의 도리를 다 해라.”
그제야 베르나르도 후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롱소드를 거두었다.
그는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의 패배를 선언한 뒤, 애슐리 넬슨 남작에게 사과했다.
넬슨 남작은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후작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결투는 끝났다.
가벼운 소란을 끝으로 서부군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3군 사령부에서 정식으로 에스카토스 왕국군에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선봉의 라미노프 왕국군이 라프라다 설원에서 몰살 직전의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에스카토스 왕국군은 라미노프 왕국군을 구하기 위해 급속 행군을 시작했다.
***
라프라다 설원.
선봉 라미노프 왕국군.
총사령관 라미노프 3세가 굳은 얼굴로 이스크라 라미노프 원수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소?”
“1시간도 못 버틸 겁니다.”
“퇴로는?”
“막혔습니다. 처음부터 후퇴를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진행했습니다만…… 마족 군단의 기세가 상상을 초월하는 바람에…….”
“파이몬 그라우스 군주의 군단이라 했소?”
“그렇습니다. 왕궁 마법사에게 텔레포트를 준비하라 지시했습니다. 준비가 되면 전하만이라도 3군 사령부로 피하십시오.”
“…….”
라미노프 3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왕궁 마법사들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오늘 이 라프라다 설원에서 사망한 병사들은 다시 모병하면 된다.
하지만 원수를 비롯해 대장군, 부장군 이하 지휘관들을 잃으면 라미노프 왕국은 멸망할 터였다.
쓰게 웃던 라미노프 3세가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3백 미터쯤 전방에서 마력총 쏘는 소리가 요란했다.
퍼퍼퍼펑! 퍼펑―!
하지만 홍수처럼 밀려오는 마물을 막아 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마물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전투 초반에 비행 마족들에게 포병 부대를 잃은 게 너무 뼈아팠다.
‘제길! 포병 부대만 건재했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마족 군단은 포병 부대를 궤멸시킨 후, 히르헤라에서 몰고 온 마물을 쏟아 냈다.
그나마 전 부대가 마력총으로 무장했으니 이만큼이라도 버텼지, 과거처럼 검방병과 기마대로 상대했다면 진즉에 몰살당했을 것이다.
“벨라츠 대장군의 부대가 뚫렸습니다! 전하, 이제 가셔야 합니다!”
국왕을 보내고 전장으로 돌아갈 생각에 라미노프 원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라미노프 3세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미노프 왕국이 끝장났다면, 자신도 이곳에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나았다.
“라미노프 원수, 나는…….”
라미노프 3세는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오르자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때 마족군 우측편에 까만 점들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자 까만 점들은 인간의 군대로 바뀌었다.
인간 군대의 깃발을 확인한 라미노프 원수가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전하! 에스카토스 왕국군입니다! 저 깃발은 서부군이 틀림없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에스카토스 왕국군이 마족 군단의 허리를 강타했다.
홍수처럼 밀려오던 마물이 주춤했다.
마물의 절반은 계속 몰려왔지만, 나머지 절반은 우측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라미노프 왕국군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궤멸 직전의 라미노프 왕국군은 현재의 위치를 고수하는 작전을 펼쳤다.
돌연 하늘에서 마족 군단 위로 검의 형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집중 포격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던 마물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걸 본 라미노프 공작이 어린애처럼 외쳤다.
“‘그라운드 제로’입니다! 라고아 백작이 왔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라고아 백작의 검술 ‘천 개의 산을 덮는 검의 그림자[千山劍影]’를 뜻한다.
사람들은 그 검술 앞에 남아나는 게 없다고 해서 그라운드 제로라 불렀다.
이윽고 라미노프 왕국을 향하던 공세가 멈췄다.
위기를 느낀 마족 군단이 전력을 다해 서부군과 싸우기 시작한 때문이다.
마물들의 빈자리를 마족들이 채워 나갔다.
그러나 마족들이 마물을 지원했음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족과 마물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보다 못한 마족 군주 파이몬 그라우스가 자신의 챔피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간족에도 싸울 줄 아는 놈이 있었군. 누가 저자의 머리를 가져올 테냐?”
한 손에 거대한 지팡이를 든 염소 머리의 마족 라발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놈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오! 라발이여! 가라! 가서 인간족의 싱싱한 머리를 가져오라!”
그러자 바람처럼 전장으로 달려간 라발이 큰 소리로 외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르넬 데 차마(화염의 고리여 쏟아져라)!”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불의 고리가 인간족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서부군 선두를 삼키기 직전, 엘리오가 공허의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쉬익―!
공허의 검에서 뻗어 나간 오라 블레이드가 화염의 고리를 끊었다.
고리가 박살 나자 화염은 하늘에서 크게 폭발했다.
퍼어엉―!
작은 불꽃들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이내 눈 속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염소 머리를 발견한 엘리오가 공허의 검을 그에게 던졌다.
쐐애액―!
라발의 마법 경지는 인간족 기준으로 마그눔 오프스에 육박한다.
깜짝 놀란 그는 즉시 절대 방어라 불리는 아폴루토스 프로텍트를 발동했다.
고오오오―.
마력의 파동음과 함께 라발의 앞에 반투명한 마력장이 형성됐다.
거의 동시에 공허의 검이 아폴루토스 프로텍트를 때렸다.
꽈앙!
폭발음과 함께 아폴루토스 프로텍트가 박살 났다.
하지만 공허의 검도 그 반탄력에 까마득히 먼 하늘로 날아갔다.
위기는 기회다.
라발이 지팡이로 인간족 전사를 가리키자 ‘파지직!’ 소리와 함께 번개가 쏘아져 나갔다.
뭔가가 날아오자 엘리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았다.
순간 번개가 엘리오의 몸을 관통했다.
츠츠츠츠―!
엘리오는 짜릿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번에는 엘리오의 손이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빤히 쳐다보던 라발이 갑자기 제 목을 움켜잡으며 발버둥 쳤다.
“캐액!”
격공섭물로 염소 머리의 목을 잡고 있던 엘리오가 손아귀를 천천히 오므리자, 버둥거리던 라발이 게거품을 물며 축 늘어졌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엘리오는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라발의 목을 뚝 부러졌다.
연이어 엘리오는 라발의 시체를 마족 군주가 있는 곳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곧이어 마족 군주 파이몬 그라우스의 발치에 라발의 시체가 철퍼덕 떨어졌다.
이에 모멸감을 느낀 마족 군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마족 챔피언의 목을 한낱 인간 따위가 부러뜨리다니 대단하군.”
그러자 엘리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마족 챔피언이 뭐 대단하다고. 군주들도 내 손에 죽었는데.”
파이몬 그라우스가 놀란 눈으로 인간족 전사를 보았다.
조금은 어눌하지만 그래도 마족의 언어였다.
그는 인간이 챔피언을 죽인 것보다, 마족의 언어를 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인간족 전사여, 마족의 말을 할 줄 아느냐?”
엘리오가 때마침 돌아온 공허의 검을 손으로 가볍게 낚아채며 답했다.
“부라퀴족에게 트레듀서라는 아티팩트를 얻었거든. 나는 모쿠바스의 군주이자, 인간족의 대전사인 엘리오 라고아다. 너는 누구냐?”
엘리오는 스스로를 ‘인간족의 대전사’라 소개했다.
모쿠바스의 군주면서 마족이 아닌 인간 편에 섰으니 그렇게 칭한 것이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파이몬 그라우스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제 보니 모쿠바스의 군주였군! 나는 아사트라의 군주 파이몬 그라우스다. 위대한 마족 군주가 왜 벌레 같은 인간족의 대전사가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