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0
1460회. 승전 축하 행사
그녀는 에리카 노블이었다.
유명한 바르도스인 그녀는 성씨를 쓰지만 사실은 평민인 라무스였다.
북부에서 ‘미성의 에리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가.
엘리오는 과거 히르헤라 주둔지에 복무하던 때 그녀와 알고 지냈다.
심지어 곤경에 처한 그녀를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금방 이름을 떠올렸다.
“에리카 양?”
순간 조마조마한 얼굴로 보던 에리카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북부 최고의 기사가 자신을 알아보니 기쁜 것이다.
“네에, 백작님. 저를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에요. 늦었지만 백작님으로 승작하신 거 축하드려요.”
“하하, 감사합니다.”
엘리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축하에 화답했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는 했지만 평소 엘리오가 여자들에게 거리를 둔 탓이다.
“이제…….”
“그런데…….”
이윽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피식 웃었다.
엘리오가 얼른 말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 네. 이제 북부에 계속 머무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 일을 마치시면 북부에 정착하실 건가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아니 여선이니 신인가. 아무튼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돌아가려고 합니다.”
“지난번에 고향에 가셨던 게 아닌가요?”
“갔었죠. 그때는 가족이 미치도록 그리웠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신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돌아갈 생각입니다.”
“신앙심이 대단하시네요. 신과 만나고 나면…… 그때는요?”
말이 나온 김에 에리카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야 그와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신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라 다르겠죠. 그런데 에리카 양은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던 엘리오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타메이온으로 마족을 몰아냈다고 하지만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다.
빙벽이 사라진 지금 타메이온의 마물과 마수 들은 언제라도 북부에 내려올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산과 계곡 등과 같은 자연 지형으로 막혀 있지만, 히르헤라에는 타메이온과 연결된 회랑이 존재한다.
북부 왕국 연합군이 히르헤라에 집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위험천만한 장소에 바르도스(음유시인)라니?
엘리오가 의아해 할 만도 했다.
“그리프 자작님의 초빙으로 오늘 도착했어요. 북부에서 마족을 다 몰아냈다고 하시던데, 아닌가요?”
“마족은 다 몰아냈지만…… 마물과 마수 들은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특히나 아직은 과도기라……. 일반인들의 진출은 조금 이른 감이 있네요.”
“알고 있어요. 어차피 지휘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에요. 북부의 성공적인 탈환을 축하하는 행사인 셈이죠.”
“그리프 자작이 기획했나 보죠?”
“네.”
“그랬군요.”
“백작님도 오실 거죠?”
“제가 히르헤라에 있는 동안 개최된다면 당연히 가 볼 생각입니다.”
엘리오는 이세계의 음악을 좋아했다.
강호의 금이나 피리와 다른 풍성하고 아련한 음률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바르도스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대만족이라, 부탁하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갔을 터였다.
“정말요? 그럼 공연날에 봬요. 꼭 오셔야 해요?”
“예, 그날 제가 히르헤라에 있다면요.”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꼭 공연도 보러 오세요.”
엘리오는 피식 웃었다.
전에는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면 벽을 세우고 피했다.
하지만 남궁연의 육신을 장사 지낸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궁연과 자신의 인연은 거기까지다.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래서 그런 걸까?
에리카 양과의 대화도 ―이전과 달리― 부담이 덜했다.
엘리오는 내친김에 에리카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과거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라고아 백작의 친절에 에리카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서부군 사령관 숙소.
아침 식사를 마친 엘리오가 쉬고 있을 때 파비안이 찾아왔다.
“사령관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오늘 아침에 식당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무슨 시시한 소리를 할라고.”
“혹시 어젯밤에 에리카 양과 만나셨습니까?”
“총사령부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왜?”
“에이, 이야기 들어 보니 마주친 정도가 아니던데요? 에리카 양과 나란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인마. 극야인지 뭔지로 불빛만 벗어나면 어둠인데 무슨 소설을 쓰고 있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마주치고 끝이 아니라, 둘이서 다정하게 걸어간 거 맞죠?”
“그래. 어두운 길이 위험해 보여서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무리 히르헤라라도 마수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초병들이 그걸 본 모양입니다. 지금 서부군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사령관님과 에리카 양이 사귄다고.”
“우연히 마주친 거뿐이야.”
“저야 사령관님을 잘 아니까 믿지 않는데, 병사들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뇨,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싱거운 소리 하려고 아침부터 찾아왔냐? 아이고, 이 한심한 사람아. 무슨 영주가 그렇게 촐랑거리냐?”
“촐랑이라뇨? 혹시나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에리카 양에게 남자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보다 내가 그런 걸 왜 알아야 하는데?”
“사령관님이 에리카 양과 사귀니 어쩌니 하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저도 세라 경과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프리치아 왕국에 그리프 자작이라고 있습니다.”
“어? 그 사람 나 알아.”
“아십니까?”
“에리카 양을 히르헤라로 초빙한 게 그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자작이면 나이가 좀 많지 않나?”
“그리프 자작이 프리치아 왕국에서 문화 예술의 애호가로 유명하답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에리카 양을 아들과 맺어 주려고 한답니다. 실제로 자작의 주선으로 두 사람이 종종 만나기도 했고요.”
“그래, 그런 거를 사귄다고 하는 거야. 나는 우연히 마주친 거고.”
“그러네요. 그런데 왜 에리카 양은 사령관님에게 접근한 거죠?”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혹시라도 삼각관계가 될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럴 일 없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백작님은 고향에 부인이 계시니까.”
“죽었다.”
“…….”
파비안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고 한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죽었다’라고 말한 것 같았다.
용기를 낸 파비안이 확인하듯 물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처가 죽었다고.”
“헉!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이라 잘못 들은 줄 알고 여쭤봤습니다.”
파비안은 자신이 무심코 라고아 백작의 상처를 건드렸을까 봐 급히 사죄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벌써 오래전의 일이니까.”
엘리오는 자기 입으로 ‘오래전’이라 말하고 쓰게 웃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진리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둔감해진다.
남궁연의 탈각도 그랬다.
이제는 그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다.
파비안은 조금 더 잡담을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
엘리오가 타메이온 정벌에서 발을 빼겠다고 한 뒤로 타메이온 정벌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그럼에도 북부 왕국 연합군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북부의 왕들이 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라고아 백작의 근본 없는 비석 사업이 실패하면, 타메이온 정벌의 필요성을 다시 역설할 요량이었다.
북부 왕국 연합군이 주둔하면서 히르헤라는 빠르게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가장 먼저 북부 왕국 연합군에 대한 물자 공급을 위해 상점가가 복구되었고, 여관과 술집, 음식점이 뒤를 이었다.
돈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북부의 역량이 집중된 히르헤라 주둔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그동안 엘리오는 뻔질나게 타메이온을 들락거렸다.
물론 북부의 왕들이 말하는 ‘근본 없는 비석 사업’을 위해서다.
그는 토르누비스(운종술)로 접경지 상공을 날아다니며 마족 군주를 찾아다녔다.
이번 일에는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다.
어차피 타메이온은 미지의 땅이라 아는 사람이 없어서다.
그가 선택한 동반자는 마력총과 섬광탄이었다.
멀리 불빛이 보인다 싶으면 날아가서 섬광탄을 쐈다.
그리고 마을이면 그대로 통과했다.
최소한 규모가 ‘몰록의 성’만큼은 돼야 내려가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마족 군주의 성을 찾는 일은 생각처럼 금방 되지 않았다.
백야의 밤은 안개가 낀 것처럼 하늘이 뿌연 덕분에 밤낮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극야는 항상 칠흙 같은 어둠이라 밤낮을 알기 어려웠다.
어렵게 구한 시계를 봐도 시간만 알 수 있을 뿐, 밤인지 낮인지는 모른다.
꼼꼼하게 시간을 점검하지 않으면 밤낮이 바뀌는 건 금방이다.
구름 위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던 엘리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5시네.”
그런데 이게 오후인지 새벽인지를 모르겠다.
“가 보면 알겠지.”
중얼거리던 엘리오가 구름을 설원으로 내려보냈다.
길눈이 심각하게 어두운 엘리오가 어떻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히르헤라 주둔지를 찾아갈 수 있을까?
그건 의외로 간단했다.
어딘지도 모를 설원에 내려선 엘리오는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구룡번신(九龍翻身)으로 아홉 번 몸을 비틀자 그의 몸이 꺼지듯 사라졌다.
***
히르헤라 주둔지.
서부군 사령부.
공간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이내 한 인형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구룡번신으로 공간 이동을 한 엘리오다.
사령부 건물을 발견한 엘리오가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지.”
구룡번신 하나만 믿고 칠흙 같은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그였다.
엘리오는 사령부를 지키는 초병에게 다가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입니다.”
“그래? 수고해라.”
엘리오는 초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식당으로 걸어갔다.
거리는 언제 복구했는지 가로등 불빛으로 밝았다.
히르헤라를 되찾은 지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가로등이라니!
“빠르다, 빨라.”
불빛에 드러난 거리만 보면 파괴당한 것이 아득히 오래전의 일 같다.
기사들의 식당 앞에서 엘리오의 걸음이 느려졌다.
식당 앞에 파비안과 하워드가 오들오들 떨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엘리오를 발견한 파비안과 하워드가 강아지처럼 달려왔다.
“사령관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군례를 올렸다.
엘리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냐? 식사하러 안 가?”
그러자 파비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역시 모르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더 좋은 곳? 외식이라도 하자는 거냐?”
“사령관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몰라. 무슨 날인데?”
“새로 문을 연 빅토리아 주점에서 승전 축하 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술과 음식도 제공된다고 하니 그리로 가시지요.”
엘리오가 식당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식사를 하는 기사들은 뭔데?”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사령관님은 바르도스의 공연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아, 혹시 오늘 에리카 양의 공연이 있는 거야?”
“예! 에리카 양도 사령관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파비안의 말에 하워드가 무심코 물었다.
“형님, 에리카 양은 이번에 사령관님과 열애설이 난 바르도스 아닙니까?”
“맞아. 잘하면 오늘 삼각관계를 직관할 수 있을 거야.”
파비안의 이죽거림을 보다 못한 엘리오가 한소리 했다.
“너 자꾸 헛소리하면 영지 상속 반환 재판 청구한다.”
“헉! 죄송합니다.”
파비안은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입을 덮었다.
에리카 양과의 약속을 떠올린 엘리오가 말했다.
“앞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