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63
1463회. 안나 라마크리슈 님께서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다가오는 노사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파비안이 물었다.
“사령관님, 진심이십니까?”
“뭐가?”
“조금 전 에리카 양에게 한 말씀요.”
파비안은 엘리오의 부인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라고아 백작이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왜냐면 6년 전에는 ‘취향이 아니다’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뭐가 궁금한데?”
“정말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에리카 양은 내 취향이 아니야.”
“역시! 그런데 에리카 양 정도면 상당한 미인인데…… 취향이 아니라니 놀랍습니다.”
“에리카 양은…….”
엘리오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눈앞까지 다가온 늙은 사제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마나 프트라스교 대신전의 수석 사제 데프테로입니다. 에스카토스 왕국군 사령관인 엘리오 라고아 백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늙은 사제, 데프테로가 사령관이라 불린 청년을 지그시 응시했다.
과거 마나 프트라스교는 라고아 백작의 사상을 의심해 뒷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신전의 알마티오 신관은 라고아 백작의 조사를 팔라딘인 메타트론에게 맡겼다.
조사 끝에 메타트론은 ‘혐의 없음’으로 보고를 올렸고, 덕분에 라고아 백작은 이단 사상을 가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라고아 백작은 이단으로 여겨질 만한 말들을 했지만, 교단에서는 더 문제 삼지 않았다.
제국의 상황이 너무 불안정해 라고아 백작의 이단 사상을 걸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왕국과의 전쟁 와중에 무슨 이단 사상이란 말인가.
거기에는 라고아 백작과 크나우프 대공의 친밀한 관계도 한몫했다.
교단은 그렇게 라고아 백작의 이단 사상에 대해 알고도 모른 척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에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검은 태양’으로 인해 세상이 당장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마나 프트라스 교단은 망했다.
‘마나 프트라스의 축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것뿐 아니라, 사제들이 가지고 있던 ‘신성력’마저 사라진 때문이다.
사제들은 치유를 할 수 없게 됐고, 성기사들 역시 힘을 잃었다.
신성력이 사라진 마나 프트라스교는 5년 동안 서서히 몰락했다.
신자들이 등 돌린 신전을 지키고 있는 건 늙은 사제들 뿐이다.
과거 같았으면 데프테로 같은 수석 사제가 아니라 알터(alter)라 불리는 수사나 수녀가 움직였을 터였다.
데프테로 수석 사제가 노구를 이끌고 땅끝까지 직접 달려가야 할 만큼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늙은 사제를 뚱한 얼굴로 보던 엘리오가 물었다.
“수석 사제님이 왜요? 나는 마나 프트라스 교단과 별로 안 친한데?”
안 친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관심도 없다.
본래 무신론자인 데다가, 하도 이단 소리를 들어서 없던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노골적인 배척에도 데프테로 수석 사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지난 5년간의 경험에 비춰 보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까닭이다.
“저희 교단의 사도이신 안나 라마크리슈 님께서 백작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안나 라마크리슈 님이요?”
엘리오가 조금 관심을 보였다.
과거 안나 라마크리슈의 보증으로 ‘흑마법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 얼마 전 강력한 신탁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일로 제국 황실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조만간 북부 왕국들에도 연락이 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신탁이기에요?”
“검은 태양에 관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께서 라고아 백작님을 만나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듣고 싶기는 한데……. 지금 당장 북부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데프테로가 간절한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러나 신성력을 잃어버린 그는 평범한 늙은이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계획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만 마무리되면 바로 가 보도록 하지요.”
“그 일을 마무리하시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빠르면 보름? 늦어도 한 달은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마족 군주들에게도 연락할 수단이 있을 테니, 북부와 인접한 지역의 마족 군주를 찾기만 하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이 세상의 운명이 달린 일이니 늦지 않게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요.”
엘리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프테로 수석 사제는 미련 가득한 얼굴로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돌아섰다.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사제들이 떠나자 실내는 다시 고요해졌다.
엘리오 일행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비록 승전 축하 공연은 흐지부지 끝났지만 저녁 식사는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비안이 식사가 될 만한 안주를 몇 가지 더 주문했다.
한번 빠져나간 귀족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라고아 백작이 주점을 전세 낸 줄로 알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오는 일행과 함께 먹고 마셨다.
배가 불러 올 즈음, 하워드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무슨 신탁을 받은 걸까요?”
그러자 파비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검은 태양에 관한 거라잖아. 마나 프트라스 신에게 검은 태양을 없앨 방법이라도 들은 모양이지.”
“마나 프트라스 신은 죽은 게 아니었습니까?”
“죽었다고? 누가 그래?”
“다들 죽었다고 하던데요? 북부에서 운영되는 신전은 거의 없을 겁니다.”
마나의 축복이 끊어지고, 신성력이 사라진 지 5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나 프트라스 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수련으로 모을 수 있었던 마나와 달리 신성력은 신에게 직접 받는 권능이다.
그러다 보니 신이 사라지자 신성력도 사라졌다.
모든 걸 잃어버린 사제들에 비해 마나 유저들의 사정은 조금 나았다.
물론 어둠의 에테르가 퍼지면서 기사와 마법사 들의 마나 수련도 막혔다.
그러나 단지 성장이 막히기만 했을 뿐, 그동안 수련한 마나를 잃지는 않았다.
덕분에 실업자가 된 사제들과 달리 마나 유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더 이상의 마나 유저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전사(戰死)로 인해 마나 유저가 줄어들다 보니 자연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위험은 늘어났는데 그걸 처리할 마나 유저는 줄어드니 대우가 좋아질 수밖에.
파비안이 라고아 백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지금까지 하는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마나 프트라스요. 악신 샤이틴을 피해 숨어 있는 겁니까? 죽은 겁니까?”
“숨어 있더라.”
고개를 갸웃하던 파비안이 다시 물었다.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만나 봤다.”
“정말요?”
“진짭니까?”
시큰둥한 얼굴로 있던 파비안과 하워드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엘리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몇 달 전에 시에라 산맥에서 눈사태 난 거 기억나냐? 발도 어쩌고 협곡.”
파비안이 재빨리 거들었다.
“발도 디아노 협곡요.”
“그래, 발도 디아노. 거기에서 숨어 있던 마나 프트라스를 만났다.”
“아니, 창조신이 협곡에 숨어 있었다는 겁니까? 그걸 악신 샤이틴이 못 찾고요? 아무리 라고아 백작님 말씀이지만, 그건 좀 이상한데요?”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누가 협곡에 숨어 있었대? 협곡에 고대의 신전이 있었어. 전설의 티탄족이 만든 오니스토스 신전이라더라.”
“헉! 티탄족의 신전요?”
“그래, 내 손에 죽은 마족 군주 놈이 한 말이니까 맞을 거다.”
“아! 마나 프트라스가 티탄족과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그곳에 숨어 있었나 보네요?”
“정확히는 신전에 있던 이상하게 생긴 비석이야. 마족은 그걸 ‘불멸의 사다리’라고 하더라고.”
엘리오가 빙벽 자리에 세우려는 비석도 실은 그걸 흉내 낸 것이었다.
“예? 비석에 신이 숨어 있었다고요?”
꽤나 의외였던지 파비안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석이라니까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정정하지. 비석처럼 생긴 거대한 모노리스야. 검은 태양이 떠오르자 거기로 피한 모양이야.”
엘리오는 ‘숨었다’고 하려다가 창조신의 체면을 생각해 ‘피했다’고 했다.
솔직히 자기 생각에도 숨은 게 맞았지만 말이다.
파비안과 하워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편 얼떨결에 파비안의 종자가 된 하비 그리프는 어안이 벙벙했다.
라고아 백작이 대단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겠다.
라고아 백작은 창조신을 ―비록 지금은 실종 상태지만― 이웃집 기사처럼 말하고, 파비안과 하워드는 그걸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허풍인가?’
하지만 마나 프트라스의 사제를 떠올리면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고민하던 하비는 쓰게 웃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자신과 무관한 그들만의 일이다.
종자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할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비는 자신이 이 우주적인 사건에 한 발 걸치게 될 거라는 걸 몰랐다.
***
그날 밤.
히르헤라 주둔지.
프리치아 왕국군 진영.
피닉스 부대장 스테마 그리프가 기막힌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빙벽을 조사하고 돌아왔더니 프리치아 왕국군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들이 북부 최강의 기사인 서부군 사령관과 바르도스를 두고 삼각관계에 빠졌다나?
심지어 자신이 알렌 바우처와 기획한 승전 축하 공연을 망친 사람이 아들이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사해 봤더니, 아들이 보조 바르도스(트레이시 골드)의 꾐에 넘어가 벌인 일이었다.
“그래서, 파비안 남작의 종자가 되기로 했다고? 십 년간이나?”
지금 대륙은 마나 유저의 성공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선에서 몇 년 뒹굴면 아들도 작위와 봉토를 받게 될 터였다.
그런데 무려 십 년간이나 종자 노릇을 하기로 했단다.
종자는, 당연하게도 공을 쌓지 못한다.
어쩌다 운 좋게 공을 세워도 그 공은 주인인 기사의 것이 된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스테마 그리프 자작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비는 부친의 분노 어린 시선에 슬그머니 머리를 숙였다.
“그것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아 백작이 화를 낼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종말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그 정도 죄면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하아!”
그리프 자작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맞다.
라고아 백작이 그 일로 하비를 죽였어도, 자신은 항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미래와 목숨을 바꾸었다.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들의 머리꼭지를 보니 화가 났다.
“트레이시 골드가 너를 부추겼다는 건 아느냐?”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나에게 후원을 받았으면서 너를 사지로 밀어 넣다니. 실로 요사스러운 계집이로구나.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 여자를 멀리하거라. 종자 생활을 하는 동안 여자와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알겠느냐?”
“……예.”
“가서 건강히 잘 지내거라. 에스카토스 왕국은 먼 곳이니 이후로는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죄송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하비는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떠났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리프 자작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보조 바르도스인 트레이시의 앞날이 순탄치는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