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86
1486회.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엘리오는 묵묵히 황궁 수비대를 응시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적의보다 극도의 당황으로 혼란에 빠진 느낌이다?
자신에 대한 황제의 적의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건 엘리오가 제국의 내부 상황을 알지 못해 가진 오해다.
비록 황제는 그를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싫어했지만, 어비스 정벌군에 참여한 뒤로 제국에서 그의 인기는 크나우프 대공만큼이나 높았다.
세상에 둘뿐인 그랜드 마스터니 당연한 현상이다.
제국은 어비스 정벌군이 임무를 완수했음을 알고 있었다.
검은 태양이 사라지면서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온 까닭이다.
그에 제국은 대대적으로 어비스 정벌대의 성공을 홍보하고 자축했다.
이제 어비스 정벌군만 돌아오면 모든 것은 종료된다.
모두가 정벌군의 복귀를 기다리는데 엘리오 라고아 백작이 홀로 왔으니 당황할 수밖에.
혼란은 황실 집사장이 나오면서 모두 정리됐다.
황실 집사장 말론 브론드 자작이 라고아 백작 앞에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라고아 백작 각하. 저는 황실 집사장 말론 브론드 자작입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리오는 아무 말 없이 뚱한 얼굴로 집사장의 뒤를 따라갔다.
중앙 홀.
안으로 들어선 엘리오는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십여 명의 총사들이 중앙 홀 좌우편에 일렬로 서 있었다.
황궁 수비대와 달리 차분한 분위기가 마치 준비를 하고 기다린 것 같았다.
‘안나 사도가 다녀갔나 보군.’
그래도 황궁 수비대를 준비시키지 않은 걸 보면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좌에 앉아 있던 루이스 프레이저 3세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고아 백작, 어서 오시오. 어비스에서 일어난 일은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께 자세히 들었소. 백작이야말로 우리 론디니움 제국의…….”
“됐고. 크나우프 대공과 정벌군이 악신의 앞에서 도리어 나를 공격했습니다. 악신과 황제가 손잡고 나를 죽이기로 했다면서요? 크나우프 대공과 악신이 한 말이니 아니라고 발뺌하지는 마시고.”
“그건…… 악신이 그렇게만 해 주면 제국을 보존해 주겠다고 해서……. 나도 내키지 않았지만 제국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소. 마나 프트라스님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누가 악신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겠소?”
황제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라고아 백작은 그랜드 마스터와 골리앗 열 기, 그리고 백여 명에 달하는 총사의 공격을 받고도 끄덕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소가 통한 것일까?
굳어 있던 라고아 백작의 안색이 조금 풀어지는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엘리오가 손을 까딱였다.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이오?”
“올려다보면서 말하기 불편하니 내려오시라고.”
“아…….”
보좌에서 일어난 황제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아래로 내려갔다.
임페리얼 기사단 부단장 레이드 벨라츠 후작은 입술을 악물었지만 감히 나서지 못했다.
상대가 크나우프 대공까지 죽인 라고아 백작인 까닭이다.
그는 황제의 불안한 표정을 보고도 못 본 척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한편 엘리오는 자신의 앞까지 내려온 황제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내려오란다고 내려온 것을 보면 황제에게 저항의 의지가 없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 그냥 항의나 하고 가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황제 때문에 크나우프 대공과 싱크레어가 자신의 뒤통수를 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크나우프 대공은 죽고, 싱크레어는 파문을 당했다.
황제가 자신과 가깝던 두 사람의 인생을 끝장낸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황제의 지시에 따른 사람들은 인생이 작살났는데, 황제는 말 몇 마디로 끝이라고?
‘씨발, 인생 더럽게 불공평하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되겠다.
“꿇어.”
“…….”
황제가 황당한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왕국의 백작이 제국 황제에게 꿇으라고 할 리가 있겠나 말이다.
“잘못했으면 꿇으라고.”
“……지금 나에게 꿇으라고 한 것이오?”
“당신 때문에 크나우프 대공이 죽고, 내 제자는 파문당했어. 그걸 생각하면 당장 목을 날려도 시원치 않다고. 내가 시답지 않은 당신의 변명을 듣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줄 알아? 잘못을 했으면 무릎 꿇고 빌어 이 새끼야! 태고신들도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이야. 너 같은 사람 새끼 하나 못 죽일 것 같아?”
중앙 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사단 부단장 레이드 벨라츠 후작은 손을 덜덜 떨었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총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라고아 백작이 처음 황제에게 반말을 할 때는 그들도 사람인지라 분노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에 조금씩…… 납득이 됐다.
태고신과 황제 중에 누가 더 높은가를 따지자면 태고신이다.
태고신을 죽인 라고아 백작에게 황제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터.
아무리 황제라 해도 살려면 무릎 꿇고 비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라고아 백작과 싸울 용기가 없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황제, 루이스 프레이저 3세는 기사단 부단장과 총사들을 힐끔 보았다.
‘누가 좀…….’
그러나 모두가 이 참담한 상황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니!
인간에 대한 배신감 다음으로 무력감이 밀려왔다.
라고아 백작의 앞에서 자신은 황제가 아니라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 새끼’다.
죽을 것 같은 치욕에 황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명예냐, 목숨이냐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그는 목숨을 선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목숨을 선택한 마당이다.
털썩.
황제는 쓰러질 듯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에 안 차는지 엘리오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 서슬에 조개처럼 굳게 닫혀 있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잘못했소. 제국을 구해 보겠다는 마음에 크나우프 대공에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제국 어쩌고는 빼. 살고 싶으면 영혼을 담아.”
멈칫하던 황제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내 잘못이오. 백작에게 내 측근들을 잃고 복수할 생각에…… 악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소. 용서해 주시오.”
그제야 엘리오의 표정이 풀어졌다.
한동안 황제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던 엘리오는 말없이 돌아섰다.
***
황궁을 나선 엘리오는 북구로 향했다.
안나 사도를 만나기 위해 마나 프트라스 교단의 대신전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둠의 시대에 쓰레기로 덮여 있던 대신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진 상태였다.
대수림에서 제도까지 오는 열흘 남짓한 시간에 일어난 변화다.
엘리오는 깨끗해진 대신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태세 전환이 참 빠르다니까.”
때마침 밖으로 나왔다가 엘리오를 발견한 알마티오 신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라고아 백작 각하, 어서 오십시오.”
“아, 신관님. 안나 사도님을 만나러 왔는데, 계시죠?”
“예, 오전 내내 라고아 백작님을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알마티오 신관이 앞장서자 엘리오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신전에 들어가 조금 기다리자 안나 라마크리슈 사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왔다.
“라고아 백작님, 어서 오세요.”
“예, 사도님.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대신전이 깨끗해졌죠? 신성력이 돌아오니 자발적으로 치워 주시더라고요. 모두 라고아 백작님 덕분이에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에이, 뭘요.”
“황제 폐하와는 잘 푸셨나요?”
“예.”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강압적으로 했지만 푼 건 사실이었다.
“다행이네요.”
안나 사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그녀는 알고 있다.
라고아 백작과 황제가 반목하면 제국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마나 프트라스 교단은 제국의 중심 교단.
당연히 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던 엘리오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마나 프트라스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네에, 그렇지 않아도 어제 그것에 관한 신탁을 받았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먼저 마나 프트라스님의 말씀부터 전해 드릴게요. 악신의 마력석을 파괴해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또…… 악신을 살려 준 건 아쉽지만 받아들이겠다고도 하셨고요.”
“다행이네요.”
엘리오는 내심 안도했다.
마나 프트라스가 악신을 살려 준 일로 딴지를 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엘리오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문제라니?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마나 프트라스님의 상태가 아직 좋지 못해…… 어느 정도 회복하시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시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차원을 안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시라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네, 아홉 달 후에 다시 찾아오시면 도와주실 수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엘리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계에 다시 온 지 삼 개월쯤 지났으니 아홉 달이면 일 년이다.
어차피 고향으로 가 봐야 가까운 혈육은 오래전에 죄다 늙어 죽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빨리 가서 뭘 한다고.
“지금이 칠월이니 사월에 다시 오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사월, 그때 뵙지요.”
더 이상 용무가 없던 엘리오는 꾸벅 인사를 한 후 대신전을 떠났다.
***
제국에서의 일을 마친 엘리오는 토르누비스(운종술)를 이용해 북쪽으로 날아갔다.
제국령을 벗어나는 데 사흘이 걸렸다.
북부 왕국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토르누비스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에스카토스 왕국으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구룡번신을 쓰면 단숨에 갈 수 있겠지만, 남는 게 시간이라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북부 사람들처럼 역마차를 이용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가 많아 속도는 이전보다 느렸다.
두 달간 역마차로 이동하고, 에스카토스 왕국에 들어서는 눈썰매를 탔다.
북부로 올라갈수록 추위가 심해 역마차가 운행하지 않은 탓이다.
***
에스카토스 왕국.
슬래시 랜드.
석양 무렵, 순록들이 끄는 낡은 눈썰매 한 대가 슬래시 랜드 초입으로 들어섰다.
눈썰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부실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곧이어 눈썰매를 몰던 사내가 눈밭에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그제야 눈을 뜬 엘리오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여기가 슬래시 랜드라고요?”
“예, 조금 전에 슬래시 랜드 표지판 못 보셨습니까?”
“아, 잠이 좀 와서.”
“이 추위에 잠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약속하신 잔금 주십쇼.”
사내가 손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눈썰매에서 내린 엘리오는 돈주머니에서 3실버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순록과 연결된 줄을 가까운 기둥에 대충 묶고 건물로 들어갔다.
머리를 긁적이던 엘리오는 사내가 들어간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부실해 보였지만 건물 내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와 음식 냄새가 코로 밀려왔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엘리오는 대충 주문한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슬래시 랜드에 와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도 자신의 영지였기 때문일까? 모든 게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갔다.
제도에서 슬래시 랜드까지 오는 데 석 달이 걸렸다.
그는 남은 여섯 달을 슬래시 랜드에서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궁핍한 북부의 사내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건장한 사내 셋이 다가와 엘리오의 양옆과 맞은편에 털썩 앉은 것이다.
사내들 중 하나가 한쪽 팔로 엘리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형씨, 어디서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