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88
1488회. 이번에 가게 되면 다시는 안 올 거야
슬래시 랜드.
영주성.
마침내 엘리오와 파비안, 하워드, 크레아가 마주 앉았다.
어비스 정벌에 대해 묻는 그들에게 엘리오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히 들려주었다.
“……아브라나트의 저주를 고쳐 준 악신이 보좌로 돌아가더니 돌처럼 굳어 버리더라고. 신전에 있는 석상들처럼 변해 버린 거지.”
모두가 놀란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크나우프 대공과 싱크레어의 배신도 그렇지만 라고아 백작이 악신을 살려 준 것이나, 악신이 라고아 백작의 저주를 치료해 준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으로 되돌아가 보니 검은 태양이 사라졌더라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나 보다 싶어 엑소도 마을에 가보니……. 역시나, 시커먼 어비스 출입구가 딱 보이는 거야. 그리고 나가 보니 대수림에 있는 어비스 출입 관리소더라고.”
“와아!”
“이야! 그게 검은 태양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엑소도로 돌아갔구나.”
세 사람이 한마디씩 던졌다.
이윽고 파비안이 물었다.
“대수림의 괴물은 보셨습니까? 남부 왕국은 그놈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라던데.”
“제국까지 안나 사도와 함께 토르누비스로 이동하면서 봤다. 모두가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더라. 그런데 머리통이 사람하고 달라. 개 머리도 있고, 돼지 머리도 있고……. 어휴! 자기들끼리 말도 하더라. 심지어 인간 여자를 범해 변종까지 만들어 내. 그 정도면 악신이 마나 프트라스를 조롱하고 능멸하기 위해서 만들어 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악신도 참 지독하네요.”
파비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무조건 악신 샤이틴을 저주하지 않았다.
마나 프트라스와 악신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닌 까닭이다.
“그중에 제일 강한 건 어비스의 거인족을 닮은 괴물이었다. 키가 3미터는 넘어 보이는데 힘이 제법 세더라. 제국과 남부 왕국에 엑시티움과 타나토스가 있으니 망정이지. 없었으면 몰락은 시간문제였을 게다.”
크레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으! 말씀만 들어도 소름이 돋네요. 전에는 남부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이젠 돈을 준다고 해도 남부에는 못 갈 것 같아요. 너무 싫다.”
대충 이야기를 마친 엘리오가 파비안에게 물었다.
“슬래시 랜드는 어떠냐? 척박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와서 보니 생각보다 더한 것 같더라만.”
“그래도 마나석 광산이 두 개 있어서 살 만은 합니다. 그게 영지의 살림 밑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행이네.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놈들이 나를 털어먹으려고 해서, 사람 살 곳이 못 되나 보다 싶었다.”
“헛! 그러셨습니까? 어떤 놈들입니까? 혹시 벌써 다 병신을 만들어 놓으신 건 아니죠?”
“나 아무 때나 힘자랑하는 사람 아니다. 한 놈은 나와 함께 온 놈이고, 나머지는 그놈 조사하면 줄줄 나올 거다. 그런데 그놈들은 왜?”
엘리오가 의아한 얼굴로 파비안을 보았다.
파비안의 성질머리에 오히려 그런 놈들을 걱정하는 듯하니 이유가 궁금했다.
“광산에 일꾼이 부족합니다. 잡아서 광산에 처넣으려고요.”
“그럼 그렇지. 난 웬일로 네가 그런 놈들 걱정을 해 주나 싶었다.”
“광산만 아니었으면 죄다 손모가지를 잘랐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오는 길에 마수를 만났다. 아직도 마수들이 있는 것 같더라?”
“북부에 마수가 돌아다니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입니까? 그래도 주요 통행로는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토벌도 시간 날 때마다 나가고요.”
“그래, 이왕 영주가 되었으니 잘 좀 발전시켜 봐.”
“예, 그런데 백작님은 이곳에 얼마나 머무르실 계획이십니까?”
“왜? 빨리 떠났으면 좋겠냐?”
“그럴 리가요. 저는 백작님이 오래도록 제 곁에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여섯 달.”
“짧네요. 저는 몇 년은 계실 줄 알았습니다.”
파비안이 아쉬운 눈으로 라고아 백작을 보았다.
지난번처럼 몇 년을 함께 지낼 줄 알았는데 고작 여섯 달이라니…….
“그리고 이번에 가게 되면 다시는 안 올 거야.”
“…….”
파비안은 물론 하워드와 크레아도 착잡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파비안은 라고아 백작에게 영주의 방을 내주고, 자신은 손님방으로 옮겼다.
딱히 할 일이 없던 엘리오는 슬래시 랜드를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마수를 모두 잡아 죽였다.
한 달 만에 슬래시 랜드는 북부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슬래시 랜드 전역에서 마수가 사라진 때문이다.
순록을 키우는 유목민과 유랑인 들이 소문을 듣고 슬래시 랜드로 몰려들었다.
북부 사람들이 슬래시 랜드를 꺼려 한 것은 최북단에 위치한 만큼 마수가 많아서다.
슬래시 랜드는 그동안 북부에서 내몰린 마수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왕성보다 안전해졌으니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파비안은 유랑인들을 광산 노동자로 고용했다.
북부의 광산에서 일하는 일꾼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카마인이나 컬트처럼 죄를 지은 사람과 노동자들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광산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면, 노동자들은 일당을 받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슬래시 랜드는 몰라볼 만큼 빠르게 발전했다.
엘리오가 온 지 석 달 만에 영주성의 인구는 두 배나 늘어났다.
외곽의 주민들이 안전을 찾아 모여든 게 아니라 대부분 타 지역에서 유입된 사람들이었다.
순록 유목민들은 대부분 슬래시 랜드 외곽에 자리를 잡았다.
순록 유목민의 숫자는 영주성의 인구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불어난 순록의 숫자가 엄청났다.
그래도 워낙 슬래시 랜드가 넓어 순록 유목민들은 꾸준히 늘어났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엘리오가 슬래시 랜드에 온 지도 어언 다섯 달이 넘어갔다.
오늘도 엘리오는 아침부터 석양이 지기까지 슬래시 랜드를 돌아다녔다.
이제는 그 넓은 슬래시 랜드를 다녀도 마수 한 마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래도 북부에 마수들이 있으니 한두 마리 넘어오기는 할 게다.
그 정도는 자경단이나 파비안의 순찰만으로도 충분하다.
멀리 유목민 천막과 순록 떼를 보던 엘리오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처음 슬래시 랜드에 왔을 때는 충격이었다.
자신이 파비안에게 넘겨준 땅이 이렇게나 엉망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영주가 아니라 어느 영주의 기사로 살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지런히 마수를 청소하고 다녔다.
마수뿐 아니다.
주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불량배와 건달들은 마나석 광산으로 보냈다.
그들의 뒤를 봐주던 자들까지 잡아 광산에 처넣었다.
그렇게 다섯 달을 쉬지 않고 뛰어다녔더니 이제야 비로소 발전된 느낌이 난다.
엘리오는 슬슬 자신이 슬래시 랜드를 떠날 때가 됐음을 알았다.
구룡번신을 이용하면 단숨에 제도로 갈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오마르 백작을 만나야 했다.
오마르 백작을 만나려면 베일럼 왕국으로 가야 한다.
다시 한번 슬래시 랜드를 쓸어보던 엘리오는 바람처럼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슬래시 랜드 영주성.
엘리오가 이제 그만 떠나겠다니 파비안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벌써 가신다고요? 아직 한 달이 남지 않았습니까?”
“베일럼 왕국에서 오마르 백작님을 만나 보고 갈 생각이다.”
“그러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이제 겨우 슬래시 랜드의 기틀이 잡혀 가는데 영주가 가긴 어딜 가? 너는 영지 관리나 열심히 해. 주변 영지에서 첩자를 보내 분탕질 칠 수도 있어.”
“에이, 설마요.”
“설마? 인마, 너 내가 크나우프 대공과 싱크레어에게 뒤통수 맞은 거 듣고도 그런 소리를 해? 슬래시 랜드에 유입된 유목민과 순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아? 다 주변 영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야. 그 영주들 입장에서는 재산이 유출된 거라고. 슬래시 랜드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라고아 백작의 잔소리에 파비안은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백작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불온한 소문이 성내에 나돌고 있기는 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주변의 영주들이 보낸 놈들 짓인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소문?”
“제가 비밀리에 흑마법사들을 부리는 것 같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빨리 마수를 정리할 수 없다고.”
검은 태양이 사라진 직후 흑마법사들은 다시 음지로 숨어들었다.
귀족 사회는 다시 흑마법사 색출에 열을 냈다.
마나 프트라스의 권능이 되살아났으니 다시 흑마법사와 척을 진 것이다.
지금은 흑마법사와 연관되었다는 소문만큼 불명예스러운 것도 없었다.
“조만간 사람을 잡아다가 비밀 실험을 한다는 말도 나오겠네.”
“벌써 나오고 있습니다. 어디 한두 사람을 잡아들였어야죠.”
파비안이 슬쩍 라고아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건 날건달들까지 죄다 잡아서 광산에 처박아 놓아 생긴 부작용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제가요? 아닌데요?”
“그놈들 쉽게 풀어 주지 마라. 내 고향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
“예, 광산을 떠올리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오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이상한 소문 퍼트리는 놈들 잡아다가 죄다 광산에 처넣어.”
“또요?”
“그럼 계속 그 짓 하게 놔둘 거야?”
“그렇기는 하네요. 알겠습니다. 백작님은 영지 경영을 따로 배우셨습니까?”
“아니.”
“그런데 아카데미 출신인 저보다 훨씬 나으시네요.”
“내가 사람의 본성을 좀 잘 알아서 그래. 그건 그렇고 세라 양과는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
“내년 봄에 세라 양이 부모님과 함께 슬래시 랜드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몰아서 해치울 생각입니다.”
“양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돼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클라우드가에는 꼭 알려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오가 파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비안 클라우드 라고아.
클라우드라는 성씨를 중간으로 옮기고 이제는 라고아 가문의 사람이 된 그였다.
히르헤라 주둔지에서 만나 양아들의 관계로 맺어지다니, 사람의 인연 모를 일이다.
“그리고 소드 익스퍼트가 된 거 축하한다.”
“헛!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아셨습니까?”
“온몸으로 그렇게 마나를 뿜어 대는데 모르면 바보지. 작은 하늘 회로를 부지런히 돌려라. 그럼 마나가 지금처럼 밖으로 뻗치지 않을 게다.”
“밖으로 뻗치지 않으면 좋은 점이 있습니까?”
“자기 경지를 감추면 적과 싸울 때 유리하지. 나를 보고도 모르겠냐?”
“아! 제가 소드 익스퍼트인 걸 아무도 모르게 부지런히 작은 하늘 회로를 돌리겠습니다.”
“그래. 그런 거 광고하고 다녀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
그날 저녁.
엘리오는 파비안과 하워드, 크레아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작별을 고했다.
하워드와 크레아 역시 베일럼 왕국까지 모시겠다고 했지만 엘리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파비안이 소드 익스퍼트에 도달했지만, 그 혼자서 슬래시 랜드를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별회를 겸한 저녁 식사는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송별회는 파비안과 하워드가 만취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질 즈음 끝이났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아침이 밝았다.
엘리오는 파비안과 하워드, 크레아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조용히 영주성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