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49
149회. 낭만은 사치스러운 감정이지요
화용독심 남궁연은 허름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가하게 툇마루에 앉아 있던 청운검 남궁천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못 찾았느냐?”
“강변에서 쉬고 있는 것 같길래 그냥 왔어요.”
“그래? 하긴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겠지. 잘했다.”
남궁천은 동생이 연적하를 배려해 그냥 왔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남궁연이 멈춰 섰다.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는 왜 혼인하지 않았어요?”
순간 남궁천의 어깨가 움찔했다.
과묵한 여동생에게 처음으로 듣는 사적인 질문이었다.
“왜라니? 당연히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랬지.”
“아.”
남궁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궁천이 들으라는 듯 잔소리를 늘어놨다.
“연아, 너도 마음에 드는 남자 있으면 잡아. 어영부영하다가 나처럼 나이만 먹는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무당산에 가던 날이 어제 같은데 나 벌써 서른둘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자신이 가족과 함께 와룡장에 들른 게 열여덟 살 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사 년이 흐른 것이다. 이젠 청운검이라는 별호를 입에 담기도 민망한 나이였다.
마부 이사가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
다들 건량으로 때우는 분위기였는데 그게 입에 맞지 않아 밥을 지은 것이다.
반찬이라고는 얻어 온 생선구이와 푸성귀가 전부였지만 다들 걸신이 들린 듯 먹어 댔다.
딱딱한 건량보다는 부드러운 밥과 향긋한 생선이 훨씬 좋았던 것이다.
말없이 먹기만 하는 게 뭐했던 걸까?
집요하게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던 유근식이 불쑥 물었다.
“사매, 아침에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아, 강가에서 연 공자님에게 물수제비를 배웠어요.”
“쯧! 이왕 배울 거면 무공을 배웠어야지. 물수제비가 뭐야. 어디다 쓴다고. 도적들이 떼거리로 덤비면 돌이라도 던져 보게?”
“치이. 사형은 낭만을 몰라서 안 된다니까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마당에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그렇지 않습니까, 남궁 소저?”
유근식이 은근슬쩍 남궁연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당연히 농담의 연장이다.
그런데 조용히 식사하던 남궁연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무산소축의 이매화는 지능적이고 집요한 여자라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낭만보다 살 궁리를 먼저 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말뿐 아니라 표정도 얼음장 같았다.
풀이 죽은 진설하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그냥 해 본 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 그렇지? 나도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괜히 말을 잘못해서. 험. 험.”
유근식은 뻘쭘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앙상하게 뼈를 드러낸 생선처럼 뭔가 속이 휑한 느낌이었다.
“하하! 진 소저, 유 소협, 괜찮습니다. 우리 연이는 항상 진지한 게 탈이라니까요. 사람은 위태로울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심 노선배?”
분위기가 가라앉자 남궁천이 심통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늙은 여우 심통은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오. 우리 공자님께서도 나에게 늘 그런 가르침을 주셨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한 조각 마음을 남겨 두라고 말이오.”
“오! 과연! 상승의 경지에 들어가려면 존심(存心, 본심을 잃지 않아 방심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수지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남궁연은 이내 반박했다.
“낭만 운운하는 여유와 검술에서의 존심은 서로 다른 이야기예요. 존심이 검사(劍士)가 칼날 위를 걸을 때 쓰는 말이라면, 낭만은 한가한 사람들이 찾는 사치스러운 감정이지요.”
“…….”
그녀의 논리 정연한 말에 남궁천도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하려고 했다가 자신의 어리석음만 드러낸 것 같았다.
한편 남궁연의 말에 진설하는 얼굴을 붉혔다.
한가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왠지 자신을 빗댄 것처럼 들려서다.
사실 자신과 사형들은 이번 산채 순회에서 한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연적하의 발목을 잡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십두마병 앞에서는 몇 번이나 남궁연과 심통의 보호를 받았다.
그런 주제에 낭만을 찾아 댔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정주제일루에서 만나 함께한 지 어언 석 달 남짓.
그동안 제법 가까워졌다 느꼈는데 처음 만나던 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
미시(오후 1시-3시) 무렵.
연적하 일행이 탄 배가 마당진을 천천히 지나갈 때다.
선장이 한가하게 풍광을 바라보고 있는 연적하 일행에게 조심조심 다가왔다.
“저어, 무사님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이지만 곧바로 말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언제부터인가 번잡한 일을 맡아서 처리하는 유근식이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선장이 멀리 강 한복판에 있는 섬을 가리켰다.
“저 섬의 이름은 완보주라고 합니다. 저곳에서 가끔 수적들이 출몰해서요. 보통은 통행세를 내고 지나갑니다만 이번에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한마디로 수적들에게서 배를 지켜 주겠냐는 소리다.
수적이라는 말에 남궁천이 관심을 보였다.
“수적들의 규모가 어찌 됩니까?”
“열 명 남짓 되는 수적들이 배 한 척으로 돌아다니며 그 짓을 합니다.”
“쯧! 그 정도면 녹림에는 이름도 올리지 못했겠군요. 맞습니까?”
“예, 말씀하신 녹림의 수채는 하루를 더 가면 나옵니다. 완보주의 수적들은 아직 그 정도는 못 되지요. 그래도 저희에게는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인지라.”
“그자들이 혹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잔인무도한 짓을 합니까?”
“그러믄요. 아주 천하에 못된 놈들입니다. 통행세는 기본이고, 재물을 빼앗거나 여자를 끌고 간 적도 많습니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도 악행이면 녹림의 수채 저리 가라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십시오. 혹시라도 수적들이 나타나면 우리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아이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장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지금까지 사나흘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돈을 빼앗겼다.
그런데 천신과도 같은 무림인들이 나서 준다니 앉아서 돈을 번 느낌이다.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배가 완보주를 지나칠 때, 섬 그늘에 숨어 있던 배 한 척이 빠르게 다가왔다.
선장이 말한 수적들이었다.
수적들의 배가 비스듬하게 앞을 막자 선장은 서둘러 배를 멈춰 세웠다.
선수를 맞댄 두 척의 배가 물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수적과 조우하게 생겼지만 진설하는 편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낮의 햇살에 수면이 반짝이며 빛을 산란했다.
완보주의 수적들만 아니라면 제법 흥취가 돋는 광경이라 할 만하다.
‘아! 좋구나.’
순간 저도 모르게 한마디 하려던 진설하는 이내 맥 풀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의 일로 남궁연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코 남궁연의 얼굴을 힐끔 엿봤다.
여전히 남궁연의 얼굴에는 한 겹 살얼음이 낀 것 같았다.
‘하아! 물수제비를 배우는 게 아닌데. 유 사형 말처럼 무공을 봐 달라고 할걸…….’
진설하는 자신이 한가한 짓거리를 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약탈하러 상대편 배에 오른 음양공자 양진호는 재빨리 승객부터 살폈다.
재수 없게 저들 중에 무림인들이 섞여 있을까 싶어서다.
‘헉! 무림인들이다!’
뒤늦게 연적하 일행을 발견한 양진호의 얼굴이 굳었다.
노략질을 하다 보면 이런 날이 있다.
나름 확인을 하고 덮치는데 사람이나 짐 따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상대의 숫자는 무려 일곱.
형형한 안광에 태연자약한 얼굴을 보니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재빨리 돌아선 양진호는 자신의 배로 몸을 날렸다.
“돌아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네 명의 수적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다.
남궁천과 설차수 일행이 비호처럼 수적들을 덮쳤다.
제왕처럼 건들거리던 네 명의 수적은 얼굴에 한주먹씩 맞고 나뒹굴었다.
양진호는 수하들의 비명을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으니 무조건 피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배에 뛰어든 양진호는 미친 놈처럼 소리쳤다.
“출발해! 어서!”
그렇지 않아도 지켜보고 있던 수적 다섯이 미친 듯 삿대질을 했다.
양진호의 배가 일 장(약 3미터)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다.
남궁천이 부드럽게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양진호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대경실색한 양진호는 도를 뽑아 들고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는 아직 당신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네가 완보주에 있다는 그 악랄한 수적이냐?”
“아니오. 우리는 그저 이곳을 지나던 중에 물과 식량이 떨어져서.”
“헛소리! 배를 붙여라.”
남궁천의 지시에 수적들은 일제히 양진호를 보았다.
고작 한 사람만 넘어온 상황에서 저 말에 따라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양진호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눈앞의 남자를 다시 살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배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이젠 이 장(약 6미터)에 달했다.
이 정도 거리면 어지간한 고수도 넘어오기 어렵다.
‘차라리 여기서 저놈 하나를 상대하는 게 낫겠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거기가 호랑이 굴인 걸 알면서 다시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마음을 굳힌 양진호는 “쳐라!”라는 명령과 함께 남궁천에게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수적들도 칼을 뽑아 들고 남궁천에게 쇄도했다.
차차차창.
날붙이들이 수차례 엇갈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다섯 명의 수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남궁천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십사 년 전에 벌써 청운검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검객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연적하를 만나 몇 번이나 자신의 벽을 깬 상태.
십두마병들과 비교하면 약해 보이지만 이미 절정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수적 셋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어깨가 뚫린 수적들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상대의 무위를 알아본 수적 하나가 슬그머니 칼끝을 내리고 뒷걸음질 쳤다.
남궁천이 아직도 칼을 들고 있는 양진호를 빤히 보며 물었다.
“더 해 볼 테냐? 아니면 배를 붙일 테냐?”
양진호가 박도를 앞에 세우고 애원했다.
“대협.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먹고살자고 한 일입니다. 당신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겠습니까?”
“네놈들이 그동안 돈만 빼앗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들까지 끌고 간 것을 아는 이상 그럴 수 없다. 딱 먹고살기만 했어야지.”
“허면 우리를 죽일 겁니까?”
“아니. 다음 포구에서 관부에 넘길 것이다.”
“관부에 가면 우린 죽습니다. 모아 놓은 재물을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너는 봐 달라는 사람들을 봐준 적이 있느냐?”
“…….”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양진호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도를 내던졌다.
뒤로 물러나 눈치를 살피던 도적도 칼을 바닥에 떨궜다.
“배를 붙여라.”
이윽고 양진호가 남궁천의 옆을 가리켰다.
그의 발치에 장대가 길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천이 한 걸음 비켜서자 양진호가 허리를 숙이며 삿대로 손을 뻗었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심통이 벼락처럼 소리쳤다.
“암기다! 피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