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57
157회. 그날의 연적하처럼
멀리서 녹림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연적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녹림은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이름을요?”
구천노도 심통이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차를 마시다 말고 뜬금없이 이름을 바꿔야 한다니 무슨 일인가 싶다.
“어, 동네북으로. 무슨 일만 생기면 녹림을 들먹이잖아.”
그제야 심통은 연적하가 천검문 사람들 말을 듣고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제가 저년의 입을 찢어 버릴까요?”
“쯧쯧! 웃자고 한 말에 왜 죽자고 덤벼들어? 누가 알까 봐 무섭다.”
“쩝, 저는 공자님의 기분이 상하신 줄 알고. 농담인 줄 몰랐습니다.”
연적하가 청운검 남궁천에게 물었다.
“형님, 제가 동네북이라고 할 때 농담인 줄 아셨죠?”
“하하. 당연하지. 그런 게 농담이 아니면 어떤 게 농담이겠느냐?”
“거봐. 심 노인이 이상한 거야.”
“예,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뭘 주의씩이나 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지. 의외로 완고하다니까. 우리도 보통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살자고. 편안하게.”
계속된 지적에 심통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남궁천과 화용독심 남궁연 남매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설차수 일행은 감히 웃지 못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한편, 예상치 못한 소식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활인검 유진원이 급히 물었다.
“허면 이 사범께는 알렸느냐?”
“예, 사람을 보내 칠상문과 문제가 생겼으니 남아 있는 제자들과 반점으로 속히 오라고 알렸습니다.”
“잘했다.”
유진원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칠상문과 비교하면 턱도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의 딸 유소운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힘으로 되겠어요? 주변의 다른 문파에 도움을 요청하시는 게……….”
“요즘처럼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 세상에 누가 우리를 돕겠느냐? 칠상문도 그걸 알기에 우리 거래처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두 눈 뜨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단 대화를 하다 보면 무슨 수가 나지 않겠느냐.”
“강제로 상방 방주를 잡아 둔 사람과 무슨 대화가 된다고…….”
유소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칠상문이 하는 짓을 생각하면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
천검문.
“사범님!”
누군가 대문을 와락 열고 천검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청에서 문하생들과 차를 마시고 있던 이철산이 슬쩍 돌아보았다.
반 시진(1시간)쯤 전에 문주를 모시고 나갔던 정소삼이었다.
“헉헉! 제자들과 함께 사해반점으로 오시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칠상문에서 태평상방 방주와 함께 반점으로 온답니다. 빨리요! 빨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진정하고 다시 말해 보거라.”
그제야 정소삼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오늘 문주님과 태평상방이 계약을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중간에 칠상문이 끼어들어 깽판을 친 모양입니다. 그들이 태평상방 방주를 인질로 잡고서는 ‘천검문이 얼마나 약한지 보여 주겠다’고 했답니다.”
“아! 그러니 우리더러 빨리 반점으로 오라고?”
“예.”
“허면 반점에서 칠상문과 싸움이 날 수도 있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정소삼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칠상문과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이철산이 대청에 있는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정소삼을 포함해 이십 대 초반의 남녀 일곱이 전부다.
문주와 함께 간 사람이 다섯이니 모두 합치면, 자신까지 열셋이다.
그에 비해 칠상문의 제자는 마흔이 넘는다.
거기다가 칠상문의 빈객들은 무림의 고수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하아! 겨우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함께 하산한 한채연과 하소백은 상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
자신은 무한에 온 첫날, 활인검 유진원의 눈에 들어 무술 사범이 됐다.
그 뒤로 ‘팔상도법’과 ‘용호도법’을 가르치고 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곳 수준은 낮았다.
문주는 말이 좋아 활인검이지 아직 사람을 상대로 싸워 본 적도 없다. 그가 익혔다는 천리검법은 아직도 미완성이라 실체조차 모호하다.
오죽하면 활인검 유진원은 사기꾼이라는 소문까지 돌까.
“사범님. 어떻게 할까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이철산은 정소삼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복잡한 눈으로 정소삼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빨리! 빨리!’를 외치던 그가 ‘어떻게 할까요?’로 말을 바꾸었다. 그 정도로 천검문은 칠상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달아나면 무한을 떠나거나 낭인으로 떠돌아야 한다.
문파가 위급할 때 못 본 척한 무사를 고용해 줄 문파는 없을 테니까.
한채연과 하소백처럼 자신도 자리를 잡으려면 칠상문에 맞서야 한다.
“어떻게 하긴? 가 봐야지. 무기들을 챙겨라.”
“예!”
제자들은 이철산의 기개에 감동한 얼굴이다.
비록 중과부적이라 할지라도 사문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에서 진정한 협객의 모습을 본 것이다.
***
바쁘게 달려가던 이철산 일행은 사해반점 앞에서 멈춰야 했다.
칠상문 문도들이 반점 앞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정소삼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이철산을 보았다.
“사범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따라와라.”
움츠리고 있는 제자들과 달리 이철산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연적하를 만나기 전이면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이다.
마치 심양각이 심통으로 변했듯 그의 내면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불리하다고 꼬리를 마는 습성은 버린 지 오래다.
꼿꼿하게 적진으로 걸어가던 이철산은 문득 의형제들을 떠올렸다.
과거 무당파의 천지상인이 쳐들어 왔을 때 의형제들은 달아나지 않고 똘똘 뭉쳤다.
그날의 연적하처럼, 오늘은 자신이 제자들을 이끌고 싸워 볼 생각이다.
이철산을 발견한 칠상문의 일대제자 구양천이 사범 천강검 양시명에게 말했다.
“사범님, 천검문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이철산 일행을 본 양시명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훗! 저놈이 새로 들어왔다는 무술 사범이냐?”
“예. 검술 실력이 제법이라고 합니다.”
“그래 봐야 우물 안 개구리다. 무관에서 기본적인 검술 몇 가지를 배운 게 전부일 테지.”
군소 문파의 무술 사범들은 다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자신은 저 유명한 청성파 속가제자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낭인에 가까운 저런 무술 사범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칠상문의 문주는 오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빈객들과 함께 나왔다.
반점에 들어간 빈객들은 강남삼괴라 불리는 실로 무시무시한 절정고수들이다.
그 셋으로도 충분한데 일반 문도들까지 끌고 온 것은 태평상방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가까이 오자 양시명은 차갑게 말했다.
“멈춰라. 오늘 사해반점에서 우리 칠상문의 행사가 열려 다른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다.”
“나는 천검문의 무술 사범 이철산입니다. 우리 문주님이 사해반점으로 오라 했으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잠시 비켜 주십시오.”
“흥!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보구나. 나는 칠상문의 양시명이다. 괜히 제자들 앞에서 흉한 꼴 보이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거라.”
이철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천강검 양시명에 대한 소문은 천검문 제자들에게 귀가 따갑게 들었다.
‘청성파의 무공을 배운 고수라고 했던가.’
무술 사범 중에 별호를 가진 자가 드문 것을 생각하면 오만하게 나올 만도 하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이철산이 아니다.
“오다가 들으니 귀문의 문주께서 태평상방의 방주를 붙잡아 강제로 계약을 체결하려 한다더니. 그래서 길을 막고 있는 겁니까?”
직설적인 이철산의 말에 양시명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놈! 뜨내기 주제에 뭘 안다고 그따위 망발이냐!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능력이 있으면 그래 보시든가.”
말과 함께 이철산이 박도를 뽑아 들었다.
“미친놈. 고작 여덟 명으로 해보겠다는 거냐? 원한다면 죽여 주지. 뭣들 하느냐! 쳐라!”
서른이나 되는 칠상문 문도들이 함성과 함께 천검문 문도들을 몰아쳐 갔다.
떼거리로 몰려오는 적들 앞에서도 이철산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마리 호랑이처럼 커다란 기합 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렸다.
이철산의 박도가 지나는 곳마다 비명과 함께 선혈이 튀었다.
한차례의 격돌로 다섯이 쓰러지자 그의 주변으로는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칠상문 문도들이 자신들은 그의 상대가 못 됨을 알고 피한 것이다.
결국 뒤에 물러나 있던 양시명이 나섰다.
그가 익힌 청성파의 절학은 건곤심법과 천강검과, 비류신보. 그 세 가지 무공만으로도 아직 적수가 없어 무술 사범 중 최고수로 불리고 있다.
양시명은 검에 공력을 밀어 넣었다. 순간 검 끝이 한차례 진동했다.
내기가 검에 담긴 것이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내력이 실린 검의 절삭력은 명검보다 더 뛰어나다. 이때부터는 어딜 가도 고수 대접을 받는다.
여기서 더 수련하면 유형화된 검기를 검 밖으로 드러낼 수가 있게 된다. 이른바 검기발출이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을 절정고수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은 평생 수련해도 검기를 발출하지 못한다.
칠파이문의 제자들이 무림을 좌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칠파이문은 짧으면 수백 년, 길면 천 년의 역사 속에 그 길을 정립해 놓았다.
그리고 누구라도 허락 없이 자파의 절학을 익히면 땅끝까지 쫓아가 척살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칠파이문의 상대는 오직 같은 칠파이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시명의 검이 벼락처럼 이철산의 어깨를 찔러 갔다.
이철산은 기다렸다는 듯 축 늘어트리고 있던 도를 갈지자[之] 형태로 쳐 올렸다.
구천세법의 일 식 비룡승천이었다.
채앵-.
단 일도에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박도에 걸린 검은, 내력이 담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 토막이 났다.
뒤이어 이철산의 박도가 양시명의 턱밑에 닿았다.
“양 사범. 이쯤에서 멈추라고 하시지.”
양시명이 뜨악한 표정으로 문도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멈춰라!”
쓰러진 천검문도들을 짓밟고 있던 칠상문도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돌아왔다.
맞아서 온통 피멍이 든 천검문도들도 뒤늦게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양시명이 빠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이철산. 그냥 물러가는 게 좋을 게다. 우리 문주님의 무위는 절정에 달해 있다. 게다가 강남삼괴까지 모시고 왔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판세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야.”
“흥!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사람이로군.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양시명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번에는 천검문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들었지? 안에는 우리 문주님과 강남삼괴가 있다. 지금 들어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될 게다. 그래도 좋은 놈들만 들어가라.”
그의 날 선 경고에 천검문 제자들이 당황한 눈으로 이철산을 보았다.
이철산은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강남삼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함께 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천검문 문도들은 피멍이 든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푸들푸들 웃었다.
잠시 후 정소삼이 대표로 나섰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함께 가겠습니다.”
“역시 내 제자들이야.”
이철산은 문도들에게 눈을 찡끗해 보인 후 반점 입구로 뚜벅뚜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