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62
162회. 고산유수(高山流水)라 하옵니다
순간 동호수채 채주 탈명혈장 오진웅의 얼굴이 굳었다.
왜 그렇게 길길이 날뛰나 했더니 총채주의 명을 받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문득 동호의 잡상인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 남양상방에서 와룡장의 연씨가 십두마병을 죽였다고 했겠다.’
남양과 무한은 왕복하는 데 한 달이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자연히 남양에서 있었던 기괴한 일은 동호에 알려진 상태였다.
“총순찰은 혹시 와룡장 출신이오?”
“어떻게 알았어?”
막 검을 쓰려던 연적하가 그를 보았다.
혹시라도 저 십두마병이 와룡장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연적하의 대답에 오진웅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런 제길!’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남양상방에서 십두마병을 척살한 연씨가 총순찰이라면 희망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고수다. 조금 전 한 차례 드잡이질을 할 때 느낌이 왔다.
내력을 실어 쳤는데 부담될 정도의 반탄력이 전해졌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저 어린놈의 내공은 십두마병인 자신보다 뛰어나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잠시 피하는 게 상책이지.’
오진웅은 맞서 싸우기보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사방이 물인지라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가 총순찰이니 더 이상 수하들의 협조를 바랄 수도 없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한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오진웅의 눈에 남궁연이 들어왔다. 아름다운 여자지만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때 연적하가 장난처럼 말했다.
“대답 없으면 그냥 들어갈게. 아무쪼록 성불이든 뭐든 하길 바라.”
연적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진웅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퍼엉-.
하얀 연기가 갑판 위에 퍼져 나갔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에 연기까지 발생하자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펑 소리와 동시에 연적하는 검을 휘둘렀다.
“독이냐!”
검 끝에 살짝 뭔가 걸렸지만 상대는 빠져나갔다.
검을 회수한 연적하는 급히 구천세법 삼 식 운룡풍호를 펼쳤다.
콰콰콰콰-.
용권풍이 갑판을 쓸고 지나갔다.
한편 자욱한 연기 속에서 화용독심 남궁연은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독이냐!” 하는 연적하의 외침이 앞에서 들렸다.
그렇다면 이 음험한 기운은 오진웅이리라.
‘나를 노리는 건가?’
가소롭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는 최선의 방법이기는 하다.
남궁연은 두 손을 늘어트리고 기다렸다.
곧이어 연기를 뚫고 오진웅의 마르고 강팍하게 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남궁연을 발견한 오진웅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연기 속에서 움직이기라도 했으면 곤란했는데 다행히 가만히 서 있었던 모양이다.
오진웅은 갈고리 같은 손을 여자에게 뻗었다.
절정에 이른 추혼금나수를 펼친 것이다.
순간 남궁연의 섬섬옥수가 가볍게 떠올랐다.
이윽고 남궁연과 오진웅의 손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파파파팟.
오진웅의 손가락은 남궁연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번번이 튕겼다.
‘뭐지? 이년은?’
오진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추혼금나수는 절기 중의 절기로 어지간한 고수들도 속절없이 당한다.
그런데 여자의 작은 손을 뚫지 못하고 있다니?
때마침 연적하의 운룡풍호가 갑판을 쓸고 지나갔다.
연기가 흩어지자 갑판 위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뒤늦게 오진웅과 남궁연이 싸우는 걸 본 연적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 늙은이가! 감히!”
울화가 치민 연적하가 거칠게 한 걸음 내디딜 때다.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당황한 오진웅의 손발이 흐트러졌다.
남궁연과 같은 초절정의 고수가 그런 기회를 헛되이 보낼 리가 없다.
오진웅의 손을 피한 남궁연은 건곤 무종보를 이용해 유령처럼 측면으로 돌았다.
싸우던 상대가 도깨비처럼 사라지자 오진웅은 급히 좌우를 살폈다.
바로 그때 한 줄기 장풍이 얼굴로 밀려왔다.
우르르르.
은은한 우렛소리를 동반한 그것은 남궁세가의 비기 천뢰장이었다.
“헉!”
고작 이십 대의 어린 여자가 장풍이라니?
대경실색한 오진웅은 한순간 내력을 끌어 올려 탈명구장으로 받아쳤다.
콰앙.
그 충격에 남궁연은 세 걸음이나 물러났지만 오진웅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 너는 누구냐!”
오진웅이 기막힌 눈으로 남궁연을 보았다.
장풍도 놀랍지만 자신의 탈명구장을 정면으로 받고도 무사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다.
그러자 남궁연이 손가락으로 그의 뒤를 가리켜 보였다.
흠칫 놀란 오진웅은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섰다.
순간 바닥으로 늘어져 있던 연적하의 검극이 번개처럼 위로 솟구쳐 올랐다.
구천세법 일 식 비룡승천이었다.
검에서 일어난 세 가닥 검기가 오진웅을 덮쳤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오진웅은 몸으로 검기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퍼퍼퍽.
화살처럼 날아간 검기가 양쪽 어깨와 인중을 뚫었다.
“끄윽!”
오진웅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채주 혈비도 정상백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모든 건 한순간에 일어났다.
총채주가 어쩌고, 십두마병이 어쩌고 하더니, 채주가 죽어 버렸다.
총순찰이 오진웅을 찾을 때는 함께 놀기 위해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런데 총순찰은 일검에 오진웅을 죽였다.
‘설마 기녀 때문은 아닐 테고. 정말 십두마병이라서 죽인 건가?’
그가 멍하니 서서 채주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다.
연적하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지라는 손짓을 보냈다.
정상백은 찜찜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 나갈 때는 ‘나 죽었소’ 하고 상대의 뜻에 따라 줘야 한다.
뿌드드득. 뿌득.
오진웅의 시체가 이리저리 틀어지며 괴성을 냈다.
고요한 밤의 호수라서 뼈마디 틀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잠시 후 갑판 위에 눈에 익은 괴물이 나타났다.
거대한 몸통에 박쥐의 날개, 툭 튀어나온 입 좌우에 상아처럼 돋은 이빨.
마룡이었다.
마룡이 입을 쩍 벌리자 목구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캬아아아!”
천둥 같은 소리에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연적하와 남궁연, 남궁천, 심통만 멀쩡히 서 있었다.
설차수 일행의 경우는 알아도 대비할 방법이 없는지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거리가 가까워서 꽤나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다.
마룡의 붉은 눈이 연적하를 향했다.
곧이어 박쥐의 날개 같은 날개를 펄럭이더니 다시 입을 벌렸다.
화르르륵.
꺼지지 않는 지옥의 화염이 연적하를 향해 밀려갔다.
연적하는 기다렸다는 듯 구천구검 삼 식 풍천소축(風天小畜)을 펼쳤다.
검 끝에 바람이 쌓였다.
휘이잉. 콰콰콰콰-.
그가 힘껏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태풍이 정면으로 몰아쳐 갔다.
구천구검의 검풍과 지옥의 겁화가 마주쳤다.
쿠쿠쿠.
화염과 검풍의 충돌에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화르륵. 화륵.
갑판에 불이 붙자 선원들은 급히 물을 뿌렸다.
그러나 물은 이내 ‘치이익!’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불은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듯 더 번졌다.
결국 선원들은 불 끄기를 포기하고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날아오르려는 듯 마룡의 날갯짓이 더욱 거세졌다.
“어림없다!”
연적하가 기합 소리와 함께 일찌감치 구천구검 사 식 현녀강우를 펼쳤다.
우박처럼 하늘에서 검기가 쏟아져 내렸다.
퍼퍼퍼퍼퍽-.
날개에 수백 개의 구멍이 뚫리자 마룡은 조금도 날아오르지 못했다.
분노한 마룡이 다시 입을 벌렸다.
화르르륵.
연적하는 훌쩍 몸을 띄워 피한 뒤, 구룡번신의 수법으로 마룡에게 날아갔다.
마룡은 하늘로 몇 차례 화염을 뿜었다.
그러나 옆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연적하를 맞추지 못했다.
마침내 마룡의 머리 위에 도착한 연적하가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마룡의 정수리에 현녀강림이 꽂혔다.
“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룡은 이내 푸스스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갑판에 떨어져 내린 연적하는 불타는 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불은 이 배를 다 태우기 전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벌써 불은 갑판을 절반이나 점령하고 있었다.
연적하가 갑판에 표표히 떨어져 내리자 정상백이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총순찰님! 불길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타고 온 배로 다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배에 있는 사람 다 태울 수 있겠지?”
“예, 충분합니다. 어차피 오 채주가 사람을 많이 부르지 않은 자리라서요.”
고개를 끄덕이던 연적하가 걸음을 떼어 놓았다.
조심조심 연적하를 따르던 정상백이 물었다.
“저어, 그런데 총순찰님.”
“왜.”
“아까 오 채주의 몸에서 나온 그것은 대체 뭡니까? 입에서 불을 뿜어 내고 그러던데.”
“사람들이 마룡이라 부르더라.”
“마룡요? 그게 왜 오 채주의 몸에서…….”
“글쎄다. 그게 왜 오 채주의 몸에서 나왔을까? 나도 그게 알고 싶네.”
연적하도 십두마병이 죽으면 마물로 변하다는 건 알았지만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럼, 지금까지 그 마룡이 오 채주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겁니까?”
“마룡이 오 채주 흉내를 냈다고? 그것참 재밌는 생각이로군. 참고하지.”
연적하의 말에 정상백은 해죽해죽 웃었다.
높으신 분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오늘 일진이 영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화광에 휩싸인 거대한 배가 동호를 환하게 밝혔다.
다른 배로 옮겨 탄 연적하 일행이 갑판에 나와서 불타는 배를 바라보고 있을 때다.
조용히 다가온 은월이 연적하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공자님, 소녀 은월이라 합니다. 오 채주 손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누구? 설마 나?”
연적하가 검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오늘 오진웅과 싸운 건 맞지만 누군가를 구해 준 기억이 없어서다.
은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예, 오 채주에게 능욕을 당할 뻔했는데, 마침 공자님께서 구해 주셨어요. 은공의 존성대명을 알려 주시면 평생 마음에 담고 살겠습니다.”
“에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연적하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지만 은월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구천노도 심통이 대신 나섰다.
“어험! 은월이라고 했느냐?”
“예.”
“우리 공자님의 성함은 연적하라고 한다.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금이라도 한번 타 보거라. 우리 공자님은 공짜로 받아 처먹기만 하는 사람을 싫어하시느니라.”
“아, 예…….”
은월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금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심 노인, 무슨 헛소리야. 듣고 싶으면 부탁을 하지. 왜 가만히 있는 나를 팔아먹어?”
“팔다니요? 아까부터 공자님이 금을 자꾸 쳐다보시길래 제가 대신 나선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월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을 보니 이 노래가 떠오르는군요. 고산유수(高山流水)라 하옵니다.”
이윽고 은월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금을 타기 시작했다.
띵 뚱띵띵 띠잉-.
맑고 고운 소리가 호반(湖畔)에 퍼져 나갔다.
그것은 불타는 배가 만들어 낸 불빛과 어우러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툴툴거리던 연적하도 입을 꾹 다물고 은월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남궁연이 무심한 눈으로 은월을 보았다.
고산유수는 ‘서로 마음을 잘 알아 주는 친구 사이’나 ‘극진한 관계’를 의미한다.
연적하와 심통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까?
아니면 연적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인가?
은월과 같은 예기(藝妓)에게 연적하는 운명과도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칠현금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