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64
164회. 평생 단 한 번의 기회
은월의 물음에 설차수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어떤 사람인가?
정의맹에 돌아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비슷한 질문을 할 것이었다.
우선 그는 오봉십걸의 일인이자 녹림 총순찰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되질 않는다.
비록 사파에 몸담고 있지만 그는 악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협객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언젠가 본인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제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짧게 말했다.
“좋은 사람입니다.”
정파와 사파를 떠나 곁에서 지켜본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자를 싫어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그러니 녹림이라 할지라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은월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분의 눈빛을 보면 뭐랄까, 굉장히 선량해 보이세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설차수는 그녀의 눈빛 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단 그의 눈빛은 선량과 거리가 멀었다.
평소 게슴츠레한 그 눈에서 선량이라니?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느꼈다면 모를까.
그의 눈매가 또렷해지는 순간은 사파의 마두나 십두마병과 말싸움을 할 때뿐이다. 그때 반짝이는 그의 눈을 보면 악동이 따로 없다.
한마디로 선량은 그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하지만 그런 환상이 나쁜 것은 아니기에 설차수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마을로 들어서자 마차는 거의 걷는 속도로 움직였다.
길이 좁은 탓도 있지만 초행길이라 이사가 최대한 속도를 늦춘 것이다.
이사는 은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어둠 속에서 골목을 몇 번 꺾자 길가에 제법 큰 객잔이 나타났다.
달빛 아래 유향객잔이라고 적힌 간판이 반짝였다.
마차에서 내린 은월이 창문을 통해 안쪽에다 말했다.
“여러분은 천천히 오셔도 돼요. 문이 닫힌 것 같으니 제가 먼저 가서 주인을 부를게요.”
말을 마친 은월은 어린아이처럼 객잔으로 뛰어갔다.
은월이 객잔의 문을 두드릴 동안 연적하 일행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호에서 가까워 그런지 마을은 제법 컸다.
은월이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캄캄하던 객잔에 불이 밝혀졌다.
그제야 연적하 일행은 느긋하게 객잔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서문학이 공손하게 손님들을 안내했다.
“잘 오셨습니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쪽에서 먼저 식사부터 하시지요.”
연적하 일행은 그가 이끄는 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문학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혈육에게 하듯 웃는 얼굴로 연적하 일행의 주문을 받아 갔다.
서문학이 돌아가자 은월이 으쓱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오기를 잘했죠? 좋은 분이시라니까요.”
그러자 눈치와 거리가 먼 유근식이 배를 쓸어 내리며 물었다.
“음식 맛은 어떤가요?”
“맛은 더욱 마음에 드실 거예요. 동호를 좀 아는 분들은 꼭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하신답니다.”
곧이어 은월은 설차수 일행의 자리에 합석했다.
연적하 쪽은 심통과 남궁천 남매로 인해 자리가 꽉 차서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이 식사를 마칠 무렵.
은월은 재빨리 일어나 계산대에서 대기하고 있는 서문학을 찾아갔다.
“서 아저씨.”
“어, 그래. 월아야. 더 필요한 게 있느냐?”
“오늘 저를 위해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방을 하나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의미심장한 말에 서문학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은월은 예기다.
자연히 손님의 대부분은 남자.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많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동침을 한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자청해서 잠자리를 준비하겠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그래, 손님들 중에 네 마음을 가져간 이가 누구냐?”
“창 옆에 앉아 계신 분요. 지금 차를 마시고 있는.”
서문학이 슬쩍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앳돼 보이는 청년 하나가 창밖을 보며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무림인이라고 들었는데 유독 그는 평범해 보였다.
서문학은 반박귀진이나 노화순청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흐뭇하게 웃기만 했다.
‘저런 남자가 괜찮을지도 모르지.’
남자가 너무 잘나면 그것도 골칫거리였다.
예기인 은월의 처지를 생각하면 착하고 편안한 남자가 제격이었다.
함께 살든, 단 한 번의 인연으로 끝나든, 그래야 뒤탈이 없는 까닭이다.
“오냐. 내 가장 좋은 방으로 준비해 두마. 이따가 너에게 살짝 알려 줄 터이니 모시고 가거라.”
“네, 고마워요.”
은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연적하 일행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연적하가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다.
그는 서문학이 탁자를 깨끗하게 치우고 난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다니느라 고생들 많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대별산채만 남았네요. 연 누님과 상의를 했는데요, 그곳에는 저 혼자 가기로 했습니다.”
구천노도 심통이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공자님,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혼자 가시다니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끝까지 공자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연적하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가면 심 노인은 바로 죽어. 모아 둔 돈은 쓰고 죽어야 할 것 아냐.”
“주, 죽다니요. 험. 험.”
심통은 헛기침만 할 뿐 반박하지 못했다.
그도 십두마병의 무위를 아는지라 감히 아니라고는 하지 못한 것이다.
청운검 남궁천은 화용독심 남궁연과 연적하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미 남궁연과 상의를 했다면 번복의 여지가 없다. 아쉽지만 그게 최선인 거다.
‘하아! 내 무공이 약한 게 한이다.’
지금으로서는 함께 가 봐야 짐일 뿐이다.
그걸 알기에 남궁천은 빈말이라도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설차수 일행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하지만 심통처럼 동행하지 못해 억울한 표정은 아니었다.
천하의 남궁천과 남궁연 남매도 포기한 위험한 길이다. 당연히 자신들이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적하가 차분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서하촌까지만 함께 가기로 했어요. 설 소협 일행은 서하촌에서 정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심 노인은 이사 아저씨와 서하촌에서 나를 기다리고.”
“끙! 알겠습니다. 괜히 그놈들이 자극한다고 욱해서 무리하지나 마십시오.”
심통은 무림 초출인 연적하만 홀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상대해야 할 십두마병들은 사파에서 잔뼈가 굵은 마두들이다. 그 놈들의 야비한 수작에 연적하가 넘어가지 않기만 바랐다.
“지금까지 욱한 사람은 심 노인밖에 없어. 누가 누구보고 욱하지 말래.”
심통의 염려를 일축한 연적하가 남궁천에게 말했다.
“형님과 연 누님과도 서하에서 작별했으면 좋겠어요. 두 분도 이제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셔야지요. 남궁세가 분들과 오래 떨어져 계셨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남궁천이 아쉬운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왜 그는 보내려고만 하는 걸까?
“형님, 제가 말은 안 했지만 전에 의천검존의 이기어검에서도 달아난 적이 있어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십두마병 열 명이 몰려와도 저를 잡을 수 없어요.”
“…….”
그제야 남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은 들었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화장을 했는지 화사하게 치장한 은월과 서문학이 연적하 일행에게 다가왔다.
서문학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행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연적하의 옷깃을 은월이 살짝 잡았다.
“공자님은 제가 숙소로 모실게요.”
“이쪽이 아닌가요?”
연적하가 앞서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였다.
은월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은공께는 특별히 좋은 방을 준비해 두었어요. 이쪽으로 오시어요.”
그녀는 연적하를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연적하는 별생각 없이 은월을 따라갔다.
남궁연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연적하가 은월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가 화사하게 단장을 하고 왔을 때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첫날밤의 신부나 기녀가 아니고서야 누가 밤에 화장을 한단 말인가?
‘설마…….’
한순간 피가 차갑게 식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기가 뭐라고 남녀지간의 일을 따져 묻는단 말인가.
그때 남궁천이 뒤를 힐끔 보더니 중얼거렸다.
“좋을 때다.”
그도 은월의 속셈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서문학을 따라가던 심통과 설차수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향했다.
심통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부러우시오?”
“부럽긴요.”
남궁천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두 남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진설하가 나직이 말했다.
“남궁 소저,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요?”
“아니, 저 아가씨가 연 공자님을 데리고 가잖아요.”
남궁연이 씁쓰름한 얼굴로 답했다.
“그녀는 창기가 아니에요. 남녀 간의 일에 제삼자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요.”
“그, 그런가요.”
진설하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생각해 보니 남궁연의 말대로 저건 남녀 간에 알아서 할 문제였다.
서문학은 사람들에게 차례대로 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연적하 일행이 모두 방으로 들어가자 느긋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침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진설하가 말했다.
“정말 대범한 여자네요. 연 공자님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할 줄이야.”
“사람마다 살아가는 법은 다르니까요.”
남궁연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낙화유수라는 말처럼, 젊은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자리에 연적하의 부모가 있었다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이 연적하와 은월의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설하는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만난 지 고작 하루 만에 뭘 얼마나 안다고…….”
“하루를 지내도 알 수 있고, 십 년을 지내도 알지 못하는 게 사람의 인연이랍니다.”
남궁연은 창가에 서서 어두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은월이 하루라면, 자신은 십 년이다.
그녀는 첫눈에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고 ‘고산유수’를 연주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혼신의 힘이 실린 예사롭지 않은 음률이었다.
예기라는 신분의 특수성이 그녀를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오늘 연적하와의 하룻밤을 그녀는 평생 동안 마음에 담고 살아가리라.
그때 진설하의 자조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소저는 평범한 분이 아니세요. 저는 이렇게 분하고 화가 나는데. 그래도 역시 소저의 생각이 맞고 제가 틀린 거겠죠?”
‘내 생각이 맞다고?’
남궁연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을 사는 여자’와 ‘내일을 보는 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분명 오늘을 사는 여자가 이길 게다.
그녀는 일생 단 한 번의 기회를 헛되이 흘려 버리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