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92
192회. 너에게 녹림의 칼자루를 맡겼다.
한참 동안 녹담평을 걷어차던 연적하가 인기척에 천천히 돌아섰다.
곧이어 숲을 가르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자살 바위로 다가왔다.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와 그의 수족과도 같은 십이마군들이었다.
연적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알은체를 했다.
“총채주님? 여기는 또 어쩐 일이세요?”
“이런! 어쩐 일이라니? 내가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말하니 섭섭하구먼.”
석무해가 자살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십이마군들은 따로 지시가 없었음에도 자살 바위를 등지고 돌아섰다.
열두 명이나 되는 절세고수들이 내뿜는 기운에 녹담평은 한껏 몸을 움츠렸다.
연적하 앞에 선 석무해는 얼기설기 지은 초옥과 녹담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왔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이 덜떨어진 놈이 명상 중인 저를 기습하려고 해서 혼내 주던 참이에요.”
“허어! 감히 총순찰을 기습하려 하다니 죽어 마땅한 놈이로다.”
석무해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녹담평을 보았다.
녹담평은 숨통을 조여 오는 살기에 사색이 되어 떨기만 했다.
죽음 직전의 그를 살려 준 것은 연적하였다.
“저를 대신해 삼년상을 치르기로 한 놈이니까 죽이면 안 돼요.”
그제야 녹담평을 향한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과연! 효자로다. 만고의 귀감이 될 일이야. 그런데 저 물고기는 또 왜 저러고 있느냐?”
석무해의 시선이 검에 꿰인 채 아직까지 뻐끔거리고 있는 물고기를 향했다.
“출출해서 구워 먹으려고 하던 참이에요. 입이 많으니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네요.”
“왜? 더 잡으면 될 것 같은데?”
석무해는 낚싯대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여기서 한가하게 낚시나 하려고요?”
“그게 어때서? 나는 너와 함께 낚시를 즐기면 안 되느냐? 나 보기보다 한가한 사람이다.”
“어이쿠! 됐습니다. 저기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네요.”
연적하가 십이마군들을 가리켜 보였다.
“그런데 낚싯대가 보이지 않는구먼? 아직 살아서 숨 쉬는 걸 보면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마침 물가에서 튀어 오르는 놈을 접인술로 당겼어요. 이렇게 손님들이 올 줄 알았으면 잡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냥 버려야겠네요.”
연적하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검을 들어 휘둘렀다.
검신에서 뽑혀 나간 큼직한 물고기가 황하로 날아갔다.
“접인술로 저런 대물을 끌어당기다니 실로 대단한 내력이로구나.”
석무해는 석연치 않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가 접인술로 잡았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의자를 찾던 석무해는 겨우 일어선 녹담평의 오금을 툭 쳐서 엎은 뒤 등에 척 걸터앉았다.
“네가 양다리 걸친 놈들을 정리해 준 덕분에 내 체면이 살았다. 오늘 너를 찾아온 것은 겸사겸사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다.”
“저는 무림 초출이라 도움이 되지 못할 텐데요?”
“허어! 너는 너무 겸손한 게 문제다. 녹림의 총순찰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스스로를 낮춰서야 쓰나. 물론 나는 그런 너의 겸손함을 존중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절대 그러지 마라. 수그리면 목덜미를 물려고 하는 게 세상이니까.”
“아, 예. 참고하지요.”
“남경에서 십두마병들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더구나. 네가 가장 잘 알 것 같아서 확인차 왔다. 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헛소리냐?”
연적하가 석무해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 역시도 정의맹처럼 십두마병의 무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쩝! 연 누님의 예측대로네.’
떠나기 전에 화용독심 남궁연은 석무해가 찾아갈 거라고 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석무해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연적하는 자신이 경험한 십두마병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마지막은 곤륜삼선의 도움이 컸어요. 그들이 돕지 않았다면 밤새워 싸워야 했을 거예요.”
“허! 놀랍구먼. 그저 허튼 소문이려니 했건만. 이거야 원.”
석무해는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십두마병이 죽어서 더 강력한 마물로 되살아난다니 그럴 만도 하다.
“허면 그들이 수도사들을 제물로 바친 것도 사실이냐?”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정의맹이 유명교와 타협할 일은 없겠군.”
“그럴걸요?”
“유명교의 일은 충분히 알겠다. 네 생각은 어떠냐?”
“무슨 생각요?”
“얼마 전에 유명교에서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하더구나. 보나 마나 정의맹과의 전쟁을 앞두고 나를 떠 보기 위해서겠지.”
“아!”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제는 대충 무림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누구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편이라니?
지금까지 다섯 개 산채의 십두마병과 싸우게 한 사람이 누군데?
“지금쯤 유명교도 총채주님이 다섯 개 산채를 정리한 걸 알고 있을 거예요.”
“당연히 알겠지. 그런데도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석무해가 심유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유명교와의 싸움에 앞장섰던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 같은 무림 초출이 뭘 알겠어요?”
연적하는 슬쩍 발을 뺐다.
더 이상 녹림의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석무해는 연적하를 그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너의 식견이 아니라 직감을 믿는다. 직감이야말로 하늘이 내려 준 최고의 선물이지. 부담 갖지 말고 네 느낌을 말해 보거라.”
집요한 그의 물음에 연적하는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유명교는 결국 무너질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감이 그래요.”
석무해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네가 그렇다니 그렇게 될지도.”
“총채주님은 이 싸움에 뛰어들 생각이세요?”
“어떨 것 같으냐?”
석무해가 야릇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모르겠는데요?”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천고의 기재인 남궁연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자신이 무슨 수로 석무해의 속셈을 알아낸단 말인가!
“이건 내 느낌이다만, 녹림은 네가 겨누는 칼끝을 따라갈 것 같구나.”
“제가요? 하하. 저는 이 싸움에 관심 없는데요?”
“그럴까? 지금까지 내 느낌은 빗나간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려나?”
“그리고, 총채주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신데, 왜 제 칼끝을 따라간다고 하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바로 무림이 파탄 나지만, 네가 움직이면 하나의 흐름이 되거든. 그래서 나는 네가 일으킬 흐름을 타 볼 생각이다.”
연적하는 도무지 석무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객잔같이 자영업을 하는 흐름요?”
“오호! 객잔 운영에 관심이 있느냐?”
“예, 놀고먹기 좋잖아요.”
“그것도 좋지. 그런데 너는 장사를 할 상이 아니야.”
“관상도 볼 줄 아세요?”
“절밥을 먹을 때 조금 기웃거렸었지. 그때는 내가 녹림이 될 줄 몰랐거든.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너를 보면 소싯적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래도 저는 이 싸움에 끼지 않을 겁니다.”
“허허허! 상관없다. 하나만 알아 두거라. 내가 너에게 녹림의 칼자루를 맡겼다는 거. 물론 그걸 휘두를지 말지는 너의 자유지만.”
“무슨 말로 꼬셔도 소용없어요.”
“푸하하! 네가 절색의 가인이라면 모를까? 내가 왜 너를 꼬신단 말이냐?”
연적하와 석무해가 한창 밀고 당길 때다.
관목 숲을 헤치고 한 떼의 무림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삼보방의 사람들과 개봉 제일의 방술사 고월상인이 찾아온 것이다.
선두에서 바쁘게 걸어가던 방주 사인검 녹일취의 걸음이 느려졌다.
중년으로 보이는 열두 남녀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고월상인 역시 멈춰 서서 열두 남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허어! 누구지? 저 정도 되는 고수들이라면 알려졌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개봉의 고수를 떠올려도 맞는 사람이 없었다.
“녹 방주, 저들이 누군지 혹 아시겠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절정의 기도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녹일취는 뒷말을 삼켰다.
자신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
고월상인의 방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저 정도 고수에게는 이빨도 안 박힌다.
그때 십이마군의 첫째인 귀영자군이 한 걸음 내디뎠다.
다음 순간 귀영자군의 신형은 어느새 녹일취 앞에 도달했다.
귀영자군이 스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희는 누구기에 감히 이곳을 침범한 것이냐?”
말과 함께 귀영자군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녹일취는 살기가 숨통을 조여 오자 버둥거리며 다급하게 답했다.
“크윽! 소인은 개봉 삼보방의 방주 녹일취라 합니다.”
“노, 노부는…… 고월상인이오.”
녹일취와 고월상인이 단숨에 제압 당하자 함께 온 삼보방도들은 놀라서 굳었다.
귀영자군이 살기를 더욱 끌어 올렸다.
“너희 같은 잡놈들이 무슨 일로 이곳에 몰려온 게냐? 누구의 지시를 받았더냐?”
“으윽!”
“윽!”
고꾸라질 듯 비틀거리던 녹일취는 고월상인의 팔을 잡고서야 겨우 낭패를 면했다.
휘청거리던 고월상인 역시 녹일취를 의지해 균형을 잡았다.
황망 중에도 녹일취는 무리를 대표해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게 분명한지라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야 했다.
“으윽! 저희는, 단지, 연 공자를 만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순간 전신을 짓누르던 살기가 사라졌다.
“연 공자? 총순찰님을 왜 찾아온 것이냐?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죽는다.”
‘총순찰님’이라는 말에 녹일취와 고월상인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연 공자라는 사람이 저토록 가공할 고수가 존대를 할 정도였다니!
놀람도 잠깐, 밑바닥을 전전하며 삼보방을 일군 녹일취가 기지를 발휘했다.
“소인의 아들이 연 공자님의 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여 필요한 것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방문했던 것입니다.”
삼년상에 대해 알고 있던 귀영자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다. 허나 지금은 총채주님과 총순찰님이 대화를 나누고 계시니 접근할 수 없다. 따로 부를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해라.”
말을 마친 귀영자군이 막 돌아서려 할 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녹일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송구하온데 연 공자께서 어느 문파의 총순찰님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연 공자님은 녹림의 총순찰이시다.”
“헉!”
녹일취의 탄성을 뒤로하고 귀영자군은 단숨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령 같은 귀영자군의 신법을 본 고월상인이 뒤늦게 중얼거렸다.
“허, 설마 저들이 십이마군이라는 말인가.”
십이마군이라는 말에 녹일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정사지간의 문파인 삼보방에서 십이마군은 칠파이문의 장문인과 동급이었다.
‘설마 연 공자가 녹림 총순찰 연적하?’
그도 녹림의 총순찰 연적하가 정주에서 벌인 일을 알고 있다.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혈족까지도 몰살시킨다는 희대의 악마.
거기까지 생각하자 무릎이 후들거렸다.
떨고 있는 녹일취에게 고월상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녹 방주, 연 공자라는 사람이 연적하였던 것 같소. 나는 이대로 돌아갈 터이니 다시 찾지 마시오.”
고월상인은 녹일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녹일취는 부러운 눈으로 고월상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