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04
204회. 거울 같은 사람
개봉으로 향하는 관도.
안찰사 부사 천량지가 말없이 걷고 있는 안찰사 사연휘를 힐끔거렸다.
“할 말 있으면 하게.”
“일이 잘 끝났는지 궁금해서요.”
천량지는 일찌감치 자리를 피해 주었기에 어떤 말들이 오고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사연휘가 미묘한 얼굴로 검게 물들어 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과적으로야 바라던 대로 됐지만 이걸 잘 끝났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목숨을 건진 대가로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연적하에 대한 원한이 깊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다 타 버린 장작처럼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겁박당한 일을 생각하면 원한이 깊어져야 마땅한데 말이다.
“연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갑작스러운 사연휘의 질문에 천량지는 잠시 멈칫했다.
문득 한 달쯤 전에 나누었던 무관 임사성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가 연적하에게 한차례 까이고 개봉부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게다.
“그자의 인성은 어떠해 보이던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예, 사파 출신 같은데 남초결을 살려 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지만…….”
그때 임사성은 찜찜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왜?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인을 겁박한 걸 보면 보통 흉악한 놈이 아닌 것 같아서요.”
생각해 보니 모든 게 그날과 비슷했다.
다만 상대가 사연휘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날 곁에서 지켜보던 임사성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가 갔다.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임사성과 같은 대답을 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묵직한 울림이 느껴진 사연휘는 천량지를 힐끔 보았다.
“앙금이 실린 목소리군.”
“그에게 두 차례나 데었으니까요.”
“후후. 그래. 자네는 두 번 데었지.”
사연휘가 웃었다.
뜻밖의 행동에 천량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점심까지만 해도 그는 ‘대들보에 목을 매고 싶다’고 했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고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그러던 그가 웃고 있는 것이다.
“놀라는 얼굴이군.”
“예, 연 공자의 태도가 돌변할 때만큼이나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자네는 그를 잘 모르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대인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는 내 앞에서 거침없이 말했지만, 나름 예를 지켰다네.”
“그가 예를 지켰다는 말씀이십니까?”
서문휘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그래. 그에게 협박받는 와중에도, 믿을 수 없게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네.”
“그게 가능합니까?”
“그는 존대를 하며 정중하게 내 의견을 물었네. 내 생각에는 처음 자네와 그의 관계도 그러했을 것 같은데. 아닌가?”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일세.”
천량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연휘의 말속에는 너무도 많은 함축이 담겨 있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관이 아둔하여 대인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자네는 그의 신위를 목격한 뒤로 언행에 조심했겠지?”
“예.”
“그러다가 조금 익숙해졌다 싶을 때, 보통 사람들처럼 속세의 권력에 순종할 것을 권했고, 박살 났지.”
“그, 그렇습니다.”
“나는 이곳에 올 때 체면을 내려놓았네. 그에게 먼저 인사하고, 아들의 잘못도 시인했지. 만약 내가 여기에 와서도 안찰사의 권위를 앞세웠다면, 내 아들은 죽었을 걸세.”
“…….”
천량지는 조용히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안찰사와 연적하 사이의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자존감이 낮으면서 높은 사람이네. 자신을 낮추기에 주저하지 않지만, 만약 타인이 자신을 낮게 보고 무시하면, 반드시 힘으로 찍어 눌러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지.”
“괴팍한 사람이군요.”
“괴팍이라기보다 거울 같은 사람이라는 게 맞을 걸세.”
“거울요?”
“그래. 보이는 그대로 되돌려 준다고 할까? 상대가 예를 다하면 예로 대하고,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면 힘으로 되돌려 주지. 그게 거울이 아니면 뭔가.”
“과연, 말씀을 듣고 보니 괴팍이 아니라 거울 같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에 천량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예를 갖추었을 때 자신을 존중했다. 그 관계를 깬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내가 그에게 예를 다했기에 그는 나를 존중했지.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온 제안은 협박이었지만 말이야.”
“그가 대인을 협박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사연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협박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의 억측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는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네. 자신에게 없지만 세상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말일세.”
“그런 게 있겠습니까?”
천량지가 고개를 저었다.
연적하 같은 무인이 가지지 못한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재물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손만 뻗으면 알아서 굴러들어 올 텐데 말이다.
“속단하지 말게.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천량지가 사연휘를 힐끔 보았다.
그의 음성에서 원망이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제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행동에 분노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네.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트리니까. 금의위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상대에게 이를 갈고 있어 봐야 내 손해가 아니겠는가?”
“허면 잠시 덮어 두신 것입니까?”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네. 그가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고 하나 감히 조정 대신을 협박한 것은 사실이니까. 금의위가 그를 내친 이후라면 혹 내 본심을 알 수 있을지도. 나도 궁금하구먼.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복수인지 용납인지.”
“대인께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실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지금까지 그래 오셨으니까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사연휘는 속으로 ‘자네를 잠시 원망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라고 중얼거렸다.
***
남직례성.
합비 남쪽 소호.
무산소축.
석양이 붉게 물든 유시(오후 5시-오후 7시) 무렵.
백팔 명의 무림인들이 소호에 나타났다.
선두의 무인이 들고 있는 깃발에 적힌 붉은 두 글자는 ‘의기(義氣)’.
무산소축을 바라보고 있는 검왕 남궁벽에게 선우세가의 가주 선우담이 말했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는가? 가서 밀어 버리지 않고.”
“너무 조용하군.”
“그야 당연하지. 주력은 정주로 보냈을 테니까. 연아, 그렇지 않으냐?”
선우담의 물음에 화용독심 남궁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부님, 개방의 정보에 의하면 저들은 오십여 명을 웃돌아요. 십두마병도 최소한 하나 이상은 남아 있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 지나치게 조용하긴 해요.”
“그래 봐야 오십여 명에 불과한데, 뭐라도 대비하기 전에 들이치는 게 낫지 않을까?”
선우담은 남궁연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지라 계속 그녀에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쯧쯧’하고 혀를 차던 남궁벽이 말했다.
“어차피 선우가주의 말대로 남아 있는 숫자라고 해 봐야 오십여 명에 불과합니다. 좌우를 경계하며 이대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남궁벽이 결정을 내리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윽고 남궁벽은 기수와 함께 선두로 나섰다.
잠시 후 선두가 굳게 닫힌 대문에 도착했다.
남궁벽이 손끝을 대문에 가져다 대자, 육중한 대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남궁벽의 안색은 더욱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이미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다.
‘설마 안으로 들어오라는 건가? 실로 광오한 놈들이로군.’
고작 무산소축의 잔류 인원으로 정의맹 의기대를 상대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정보와 달리 남아 있는 무산소축 십두마병은 자그마치 셋이나 됐다.
남아 있는 세 명의 십두마병 중에 가장 선임인 구유마검 비연자가 스산한 눈빛으로 의기대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총관의 말대로 정말 남궁벽을 필두로 정의맹 고수들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젠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서찰의 내용은 사실이다.
한 가닥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라갔다.
바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싸움이라니!
비연자가 미동도 않고 지켜보자 다른 사람들 역시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의기대는 남궁세가 스물다섯, 선우세가 마흔, 무당파 마흔, 곤륜삼선 셋 등 총 백팔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는 백팔 명이나 됐지만 남궁벽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기에 움직임이 일사불란했다.
백팔 명의 고수들이 천천히 전진해 무산소축 앞마당에 도착했을 때다.
전각 지붕 위에 은신해 있던 유명교 고수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비연자가 재빨리 손을 까닥였다.
그러자 삼십여 명의 고수들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촤촤촤촤-.
삼십여 개의 화살이 백팔 명의 고수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기습이다!”
남궁벽의 짧은 외침과 함께 난전이 시작됐다.
활시위를 당기던 유명교 고수들은 의기대 대원들이 지붕 위로 뛰어오르자 도검으로 바꿔 들었다.
유명교 고수들은 숫자가 확연하게 밀리는 데도 꼬리를 말지 않았다.
곧이어 남궁벽과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 선우담 앞에 세 명의 노마두가 나타났다.
비연자와 총관 혈귀 완사석, 월장영사 매화조다.
잠시 자신의 상대를 바라보던 여섯은 거의 동시에 상대에게 달려갔다.
비연자는 검, 완서석은 도, 매화조는 암기의 달인이었다.
석양 아래 도검이 번득이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우모침이 날아다녔다.
차차차창- 쉬쉿-.
“이익!”
선우담은 어깨가 따끔거리자 이를 악물었다.
저 미친 매화조는 우모침을 쓸 때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의기대 고수들은 물론 유명교도들까지도 여럿 우모침에 맞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모침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미친놈처럼 뿌려 대니 소용 없었다.
몸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우모침이 박혀 있었다.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점차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선우담은 마음이 급해졌다.
“놈! 개처럼 꼬리를 말고 달아날 셈이냐!”
매화조는 와락 덤벼든 선우담을 미꾸라지처럼 피하며 손을 휘둘렀다.
움찔.
또 우모침이 날아오는 줄 알고 놀란 선우담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크크큿! 놀라기는.”
매화조가 웃으며 빈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달라붙는 선우담을 떨쳐 내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이다.
얼굴을 붉히던 선우담이 “이놈!” 하는 소리와 함께 매화조를 향해 도약했다.
그의 신형이 공중에 떴을 때,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쉬쉬쉬-.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소리, 지긋지긋한 우모침이었다.
선우담은 양패구상이라도 하려는 듯 이를 악물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남궁연이 날아와 벼락처럼 검을 떨쳤다.
티티티팅-
우모침은 남궁연의 검막을 뚫지 못하고 불꽃처럼 반짝이며 터져 나갔다.
깜짝 놀란 매화조가 멈칫할 때다.
그 기세를 몰아 남궁연과 그녀의 검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매화조는 황급히 옆에 있던 유명교도 하나를 잡아 앞으로 던지고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남궁연의 검공은 신검합일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쩌억!
유명교도의 몸을 두 쪽으로 가른 검이 매화조의 이마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