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08
208회. 그 얘기를 왜 지금 합니까!
녹담평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좋은 꿈을 꾸다가 말았는지 상당히 아쉬운 얼굴이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헉!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데서 자빠져 자는 놈이 아닌데……. 그런데 방금 누가 오지 않았습니까?”
“왔다가 갔어.”
“어이쿠! 꿈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내가 왜 자고 있었지?”
녹담평이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한 사람도 모를 정도로 동유수의 수법은 은밀하고 신속했다.
“공자님, 그 사람은 언제 갔습니까?”
“조금 전에.”
“아, 예.”
녹담평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초막 옆으로 돌아갔다.
연적하는 다시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유수의 말이 귓가에 쟁쟁 울리는 듯하다.
-연 공자의 외가는 정주 서쪽의 석장촌에 살고 있소. 아직 외숙의 식솔들이 생존해 있으니 시간 있으면 찾아가 보시오. 외숙의 이름은 이우석이라 하오. 그럼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봅시다.
자신에게도 혈육이란 게 있다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왠지 가슴이 설렜다.
연씨 일족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로 인해 속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에게는 진짜 혈육이 있으니까.
물론 진짜 혈육도 썩 서로를 반길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심 노인이 돌아오면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근데 이 노인네 왜 이렇게 안 와?’
처음으로 연적하는 심통이 보고 싶었다.
***
호광성(호북성의 옛 지명).
무한.
구천노도 심통이 감개무량한 눈으로 도시를 둘러 보았다.
“우라질. 여기가 마지막이로구나.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정주에서 풍연초와 탁고명을 만나고, 오봉산에 들렀다가, 다시 무한에 왔다.
이철산과 한채연, 하소백의 근황을 파악하고 연적하의 소식도 전해 주기 위해서다.
“제길! 모두 하남성에 살면 좀 좋아.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호광성까지 내려와.”
구시렁거리면서도 심통은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통은 천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핫!”
“얍!”
담장 밖으로 기합 소리가 넘어왔다.
대문도 활짝 열려 있는 게 제법 문하생이 많은 모양이다.
심통은 낭랑한 기합 소리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과연, 넓은 앞마당에 수십 명의 십 대 소년 소녀들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심코 돌아보던 사범들 중에 하나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최근 어린 제자들의 검술을 지도하던 유의민이었다.
“심 어르신?”
그는 사해반점에서 본 심통을 단번에 알아봤다.
염소수염과 붉은 박도의 도갑이 꽤나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부님을 찾아오셨습니까?”
“대사부?”
심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보자 유의민은 가볍게 웃었다.
“예, 이 사부님께서 최근에 대사부님이 되셨습니다. 사범들이 많이 늘어서요.”
“아하! 그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제가 모시겠습니다.”
유의민이 공손하게 읍을 한 후에 앞장섰다.
월동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간 유의민은 의검각이라는 간판이 걸린 전각 앞에서 멈췄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새 건물이었다.
“대사부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곳입니다. 제가 기별을 넣겠습니다.”
심통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의민은 전각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이철산이 밖으로 나왔다.
“심 노인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오봉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내가 고작 오봉산의 일로 여기까지 왔으려고. 시간이 없으니 할 말만 하고 가겠네. 공자님께서 개봉의 화상촌이라는 곳에 객잔을 차리셨으니 알고 있게.”
“아, 예.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먼 길 오셨을 텐데 좀 쉬시다가 가셔야지요?”
이철산의 권유에도 심통은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시는 분이시네. 속히 돌아가서 그분을 모시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몰라. 참, 강호가 유명교와 정의맹의 싸움으로 뒤숭숭하니 괜히 설치다 맞아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하하! 잘 알겠습니다. 저도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천검문은 정의맹이나 유명교와 얽힐 일이 없습니다.”
“상방에 있다는 두 사람에게도 주의하라 이르게.”
“예.”
할 말을 마친 심통이 막 돌아설 때다.
삼십 대 사내 하나가 천검문 제자의 안내를 받고 의검각으로 들어왔다.
사내, 태평상방의 행수 약대몽은 이철산과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소리쳤다.
“대사부님!”
“약 행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상방에 일이 생겨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대사부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라니요?”
“부양에서 막 행수가 납치를 당했습니다.”
“…….”
이철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평상방에도 호위가 많은데 왜 천검문까지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심통은 자리를 뜨려다가 ‘납치당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남았다.
대청마루에서 듣고 있던 유의민이 한마디 했다.
“그런 일이라면 상방에도 호위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유의민의 지적에 약대몽이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 소협. 보통의 일이라면 그렇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상대가 유명교인지라. 염치 불고하고 예까지 달려왔습니다. 곧 방주님께서 문주님을 찾아뵐 겁니다.”
유명교라는 말에 이철산은 저도 모르게 심통을 힐끔 보았다.
유명교나 정의맹과 얽히지 말라는 말을 방금 들었는데 시험이라도 하듯 바로 유명교 이야기가 나와서다.
유의민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유명교에서 막 행수님을 납치했다고요? 아니, 왜요?”
“그게 부양에서 막 행수가 정의맹 의기대에 물품 공급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유명교 쪽 고수들이 막 행수를 납치하고는 물품을 회수하라고…….”
“아! 막 행수께서 정주로 가던 도중에 그런 계약을 맺었나 보군요?”
일대제자이자 천검문주의 조카인 유의민은 상방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태평상방이 무한과 정주 사이를 오가고 있으니 막 행수가 부양에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이윤을 더 남기려고 의기대와 얽혔던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나자 유의민은 이철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도 이철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이철산은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대놓고 심통을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심통의 무위가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가 강호 사정에 밝아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이었다.
심통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철산 정도의 무위로 유명교와 얽혔다가는 바로 죽을 게 분명했다.
심통이 반대하자 이철산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도 지난번 연적하를 만났을 때 유명교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들었다. 솔직히 자신의 무위로 유명교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약 행수님, 송구하지만 저의 무공으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의기대에 도움을 요청하지 그러셨습니까?”
이철산은 의기대의 일로 납치를 당했으니 그들이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의기대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벌써 부양을 떠났다고 합니다.”
“물품 공급 계약을 맺었다면서요?”
“막 행수가 사라지자 다른 상방을 통해 부족한 걸 융통한 모양입니다.”
“허!”
이철산이 안타까운 눈으로 약대몽을 보았다.
의기대가 부양을 떠났으니 막 행수를 구하는 일은 온전히 상방의 몫이었다.
머뭇거리던 약대몽이 한마디 덧붙였다.
“참, 막 행수를 구하러 가기로 한 무사들 중에는 대사부님의 의자매들도 있습니다.”
순간 이철산이 언성을 높였다.
“아니! 그 얘기를 왜 지금 합니까! 언제 출발하기로 했나요? 벌써 떠난 건 아니겠죠?”
“아, 방금 생각이 나서……. 늦어도 내일은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이철산이 유의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 사범.”
“예.”
“나는 곧장 태평상방과 합류할 테니 문주님께 잘 말씀드리도록 해라.”
“예? 지금 바로 가신다고요?”
“언제라도 출발한 분위기인데 내가 여기서 발목을 잡고 있으면 되나. 어차피 함께 갈 거면 빨리 상방에 합류하는 게 낫지.”
한채연과 하소백이 지원 간다는 말에 이철산은 앞뒤 생각하지 않았다.
심통도 한채연과 하소백이 가기로 했다는 걸 알고 이철산을 잡지 않았다.
문득 이철산이 심통을 바라보았다.
“심 노인. 사정이 이렇게 됐습니다. 채연이와 소백이가 간다니 제가 빠질 수 없지 않습니까.”
“나도 동행하겠네. 개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니.”
말이 그렇지 실은 반대 방향이어도 함께 가 줄 생각이었다.
그들이 죽는다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연적하가 슬퍼할 게 뻔했으니까.
심통의 말에 이철산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연적하에게 가장 많이 배운 사람으로 칠파이문의 장문인보다도 더 의지할 만했다.
“감사합니다.”
이철산은 감사한 마음에 공손하게 읍을 했다.
약대몽이 의아한 눈으로 그의 인사를 받는 노인을 힐끔거렸다.
‘저 노인은 누구지?’
누구이기에 천검문의 대사부가 저렇게 고마워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듯 유의민이 한마디 거들었다.
“구천노도 어르신께서 함께 가신다면 문주님도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유명교 놈들도 어르신과 만나면 줄행랑 놓을 테니까요.”
순간 약대몽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정의맹과 유명교의 전쟁으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녹림 총순찰 연적하와 그의 그림자 구천노도 심통이다.
그들은 정의맹이 유명교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부터 십두마병들을 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교에서 연적하와 심통의 척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지만 실은 그들을 가장 두려워 한다’는 말이 시중에 돌고 있었다.
칠파이문도 피해 다닌 유명교를 두 사람이 척살하고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약대몽은 급히 심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어이쿠!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구천노도 어르신을 곁에 두고도 몰라 뵈었습니다. 소인은 태평상방의 행수 약대몽이라 합니다.”
약대몽은 상대가 녹림의 고수인지라 ‘대협’ 대신 ‘어르신’이라 불렀다.
녹림의 거마들 가운데 대협 소리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다.
심통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흡족했다.
과거에는 ‘구밀복검’이라 불렸는데 그건 교활하거나 비겁하게 느껴져서 별로였다.
그에 비해 구천노도는 얼마나 산뜻하고 무게감이 있는가 말이다.
***
남직례성.
부양.
유명교의 고수들은 거의 대부분 정주에 모여 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유명교 고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무림첩 이후 자신이 유명교의 일원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열혈 교도들의 결속은 더 강해졌다.
이를테면 부양에 있는 자칭 유명교의 진골(眞骨, 스스로 유명교의 뼈 중의 뼈라고 하는 자들)인 벽호방과 대부방이 그랬다.
벽호방의 방주 일무원.
그는 십두마병이 된 전임 벽호방 방주 일위천의 아들이었다.
대부방의 방주 강성오.
그의 소원은 일위천처럼 십두마병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두마병을 아버지로 둔 자’와 ‘십두마병이 되고 싶은 자’가 의기투합해 일을 벌였다.
의기대 대신 만만한 태평상방의 막운한 행수를 인질로 잡고 판을 깨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