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12
212회.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
개봉.
화상촌.
연적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도 효자암으로 나가지 않고 객점에서 빈둥거렸다.
탁자를 닦던 상도가 슬쩍 다가갔다.
“공자님, 오늘은 효자암에 안 가십니까?”
“왜? 내가 있어서 눈치 보여?”
“아닌데요.”
“나가라는 말 같은데?”
“어이쿠!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저 늘 가시던 분이 안 가시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여쭤 본 겁니다.”
“나도 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거기에 쉬러 나가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한자리에서 쉬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쉬는 거지.”
연적하가 하릴없이 상도와 노닥거리고 있을 때다.
이 층에서 내려온 남수경이 연적하를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어머!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객점을 지키고 있대요? 날이 추워져서 안 나가신 건가? 아니지, 그런 거 못 느끼는 분인데.”
말과 함께 남수경이 연적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게 바로 행주를 들고 옆에 서 있던 상도와 남수경의 차이다.
남수경이 말 상대가 되어 주자 상도는 슬그머니 빠졌다.
“자아. 이제 말해 봐요. 왜 나가지도 않고 여기서 끙끙거리고 있는 건지.”
“내가 강아지야? 끙끙거리게.”
“그래서 고민 상담받기 싫어요?”
잠시 딴청을 부리던 연적하가 지나가듯 말했다.
“누가 그러는데 나에게 배다른 형제들 말고 외숙이 살아 계시다네?”
“정말요?”
“어.”
“그래서요?”
남수경은 관심을 보였다.
만약 연적하가 유명교와 정의맹의 싸움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해 줄 말이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혈육과 관계된 일이라면 또 다르다. 친구 입장에서 얼마든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심 노인이 돌아오면 찾아가 볼까 하는데. 이 노인네가 기다리니까 더 안 오는 것 같아.”
“아하! 그러니까 답답해서 혼자라도 가 봐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을 해요? 심 어르신이 어린애도 아니고. 연 공자처럼 며칠 기다릴 수도 있는 거죠. 연 공자가 기다리나, 심 어르신이 기다리나. 같은 거 아니에요?”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연적하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심통을 기다리나, 심통이 자신을 기다리나 별 차이가 없었다.
“도움이 됐나요?”
“어. 굉장히.”
“후훗! 다행이네요. 외숙이 계시는 곳은 어디래요?”
“정주의 석장촌이라네.”
“나중에 심 어르신 오면 말씀 전해 드릴 테니까 마음 편히 다녀오세요.”
“그, 그래도 될까?”
마음으로 이미 결정하고도 연적하는 슬쩍 괜찮은지를 물었다.
이런 게 심통이 늘 말하는 여린 부분이었다.
남수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당연히 되고도 남지요. 혼자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혈육 만나러 가는 건데. 심 어르신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예요. 아니, 먼저 안 가면 왜 기다리셨냐고 뭐라고 할 걸요?”
“그렇지? 그럼 공 숙수에게 음식 좀 싸 달라고 해야겠다. 노숙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가서 행낭이나 꾸려 와요.”
“그래 줄래? 고마워.”
엉거주춤 일어난 연적하는 이 층 숙소로 올라가 짐을 꾸렸다.
외숙과 그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
강소성.
서주.
수구촌.
마을 옆으로 경항대운하(북경에서 서주를 지나 항주에 이르는 거대한 수로)가 조용히 흐르고 있다.
초겨울이지만 아직 물이 얼지 않아 서주를 관통하는 수로 위로 배가 몇 척 떠다녔다.
점심 무렵.
수로와 나란한 관도가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척마대 삼백오십 명과 그들을 따라다니는 상인 오십여 명이 관도를 장악한 탓이다.
서주를 지났다면 장사꾼들 속에 도시의 한량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주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구경꾼은 없었다.
덕분에 척마대 뒤에는 날파리처럼 상인들만 따라붙은 상태였다.
대주인 의천검존 이의정은 선두를 척마대원 삼십여 명에게 맡기고 본진과 함께 걸었다.
그의 좌우에는 청성파 장문인 원양진인, 전진파 장문인 무종상인이 자리했다.
의천문주 군자검 이연익은 후미에서 의천문의 문도들과 함께 있었다.
의천문도들 속에 섞여 있는 그의 자녀들을 건사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문파는 이번 유명교와의 전쟁에 직계비속들을 데리고 왔다. 통과의례처럼 행해지는 강호행에 이보다 더한 상대도 없으니 당연하다.
그 외에도 직계들의 무위가 가장 뛰어나 어쩔 수 없다거나, 후계자에게 명성을 쌓게 하려고 하는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은 혈육과 동반했다.
의천문주인 이연익도 아들 둘과 딸을 데리고 왔다.
아들들과 나란히 걷던 이연익이 셋째딸 이소민을 힐끔 보았다.
딸은 낙양에서 온 소교라는 아가씨와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다.
‘청운관주의 딸이라고 했던가.’
척마대에 또래 아가씨들이 많지 않으니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첫째 이우신이 슬쩍 말했다.
“소교라는 아가씨입니다. 청운관의 대소사를 거의 관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예전에 낙양오협이니 뭐니 하는 놈팽이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그냥 지켜보고 있습니다.”
“낙양오협의 가문도 참전했느냐?”
“예. 복수를 하기 위해 직계들을 이끌고 왔다 들었습니다.”
“헌데 웬일로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와룡장의 여식이 상방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함께 어울릴 여자가 없어서 조금 불편해 하더라고요.”
“잘됐구나. 쥐꼬리만 한 명성을 얻기 위해 설칠 자리가 아니야.”
“칠파이문이 본격적으로 나서도 어려운 상대입니까?”
“그들의 일반적인 무위는 흔한 사마외도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주의할 대상은 십두마병과 백두마군들이다.”
이연익이 헐렁거리는 왼팔의 옷깃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나도 백두마군인 혼세검마 척진경에게 당했다. 고작 녹림삼존이던 그가 이기어검을 자유롭게 사용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알겠느냐?”
“백두마군이 조부님의 상대가 될까요?”
“척진경의 무위가 예상 밖이었지만 네 할아버지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다른 백두마군들의 무위가 그 정도라면 할아버지가 이길 게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안심이라고? 너는 아비의 잘린 팔을 보고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
“…….”
“제갈 총사가 정주 지부의 보고를 무시했지만, 나와 네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때 정주 지부 사람들은 연적하와 동행을 하고 있었다. 십두마병이 사술을 썼으면 분명히 연적하가 알아보았겠지.”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우신은 그게 조금 못마땅했다.
그래 봐야 녹림의 도적인데 그의 이름만 나왔다 하면 칭찬 일색이었다.
“할아버지는 괜한 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다. 그분이 연적하를 인정하셨으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 거다. 그러니 너희는 무리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내가 물러나라고 하면 지체없이 소민이를 데리고 피하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예.”
이우신이 뚱한 얼굴로 마지못해 답했다.
부친과 조부는 이제 고작 스물한 살 먹은 도적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자신도 집에서나 애들 취급이지 밖에 나가면 그 정도 대우를 받고 있는데 말이다.
불만 가득한 이우신의 팔을 둘째 이우진이 툭 건드렸다.
이우신이 힐끔 보자 이우진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이 안 통하니 그만하라’는 표정이다.
이우신은 동생과 이심전심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작은 위로를 받았다.
이소민이 소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갈 때다.
한 자루 박도를 등에 멘 훤칠한 키의 청년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 소저, 아직 수로가 얼지 않아서 볼만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소민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사대세가인 팽가의 소가주 청천도 팽각명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소민은 살짝 당황한 눈으로 소교를 보았다.
옆에 그녀가 있는데 자신에게만 말을 걸어서 조금 민망했던 것이다.
소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청운관 같은 군소 무관이 사대세가인 팽각명의 눈에 보였을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의천문의 이소민이 착한 거다.
의천문의 제자만 되도 군소 방파와 말을 섞지 않는데 직계가족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니 말이다.
이소민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남경에서부터 팽각명이 다가왔지만 솔직히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냥 알고 지내는 거라면 모를까?
이미 연적하에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남자는 시들했다.
“저는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유명교의 실체를 알면 팽 소협도 그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할 거예요.”
“유명교요? 그 삼류 떨거지들 말입니까? 우리 팽가에서 유명교 잔당들을 몇 번 척살했는데, 아직 소식 못 들으셨나 봅니다?”
이소민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순천부(북경)에 있는 팽가의 일을 남경의 의천문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리가 상대할 자들은 잔당이 아니라 본진이잖아요.”
“하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팽가의 오호단문도에 걸리면 놈들은 뼈도 추리지 못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죄송해요. 점심은 소 소저와 함께 먹기로 약조를 해서요.”
훅 치고 들어오는 팽각명의 제의를 이소민은 차분하게 받아넘겼다.
완곡한 거절에 팽각명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아, 예. 그럼 그 자리에 저도 함께 낄 수 있을까요? 생사를 함께해야 하는 전우들의 식사도 괜찮네요. 소 소저, 그렇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팽각명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소교를 압박했다.
무려 팽가 소가주의 부탁이다.
소교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이 소저만 좋다면 그렇게 하세요.”
순간 팽각명이 재빨리 이소민에게 말했다.
“소 소저는 괜찮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소민은 쉬운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칠파이문의 앞에서 외간 남자와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연적하라면 혹 모를까?
그건 할아버지도 원치 않으실 것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예민해서 지인이 아니면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해요.”
이소민이 철벽을 치자 팽각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군요. 그럼 식사는 조금 더 친해진 뒤에 하도록 하지요. 그럼 저는 이만.”
팽각명은 이번에도 이소민에게만 묵례를 하고 물러갔다.
이소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교에게 속삭였다.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요. 저런 사람과 같이 식사를 하면 체할 거예요.”
“후후.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소교는 이소민이 자신 때문에 팽각명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했다. 칠파이문과 무림 세가의 유대 관계가 돈독해 식사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다.
“아니에요. 괜히 팽 소협과 이상한 소문이 나는 게 싫어서 그랬어요.”
“왜요? 그래도 팽가 정도면 준수하지 않나요?”
칠파이문의 후예라고 해도 또래의 상대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는 팽가의 소가주.
칠파이문의 곁가지들과 사귀는 것보다 팽가의 소가주가 훨씬 괜찮은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이소민이 피식 웃었다.
“소 소저가 아직 괜찮은 사람을 많이 못 봤나 봐요.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답니다.”
팽각명의 행동과 아가씨들의 대화만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