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21
221회. 평생 아껴 줄 테니 어디 가지 마라
패도 일위천의 시체에서 눈부신 서기가 쏟아져 나오자 어떤 이는 멈춰서 합장을 하기도 했다.
경험 많은 구천노도 심통도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허! 저건 또 뭐지?’
지금까지 다른 마물들은 마치 탈피하듯 십두마병의 시체를 찢고 나왔다.
그런데 일위천은 전혀 달랐다.
무슨 화공이 그린 불화(佛畵) 속의 천수보살이 현세에 나타난 것 같았다.
‘설마 마물이 아닌 건가? 아니면 환각?’
심사가 복잡해진 심통은 즉시 구천기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서기는 점점 짙어졌다.
이제는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심통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호방과 대부방도들은 물론 상방 무사들까지 홀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좋지 않아.’
십두마병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건 지옥에서 온 것이다.
그게 좋은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갑자기 천지사방에서 웅장한 독경 소리가 들려왔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 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사리자…….”
그와 동시에 일위천의 시체에서 거대한 뭔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 장(약 3미터)이 넘는 키에 도검을 쥔 손은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 소리쳤다.
“천수보살님이시다!”
자애로운 그 얼굴은 확실히 불화에서나 보던 천수보살을 닮아 있었다.
벽호방과 대부방도 십여 명이 병장기를 버리고 오체투지 했다.
절간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심통만 뻘쭘한 얼굴이다.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던 천수보살의 눈이 심통에 이르러 멈췄다.
독경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천수보살이 걸음을 떼어 놓았다.
천수보살의 손에 들려 있던 수십 개의 도검이 햇빛을 받아 번득였다.
“크악!”
“컥!”
운 없게도 오체투지 하고 있던 두 사람이 천수보살의 발에 밟혀 육포가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달아나야 하는지, 좀더 지켜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수보살은 심통에게 걸어가며 마치 벼를 베듯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악!”
“도망쳐!”
그제야 벽호방, 대부방, 상방 무사들은 담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반야장이 한순간 아비규환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심통은 파산도 이철산 일행이 빠져나가자 재빨리 전각 위로 뛰어올랐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놀림이다.
그러나 천수보살의 움직임은 그에 뒤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맞은편에 천수보살의 거대한 몸이 유령처럼 내려왔다.
“빌어먹을, 느린 놈은 하나도 없구나!”
심통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마물들은 그 체구가 어떻건 간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아무래도 천수보살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틀린 것 같다.
전각 지붕 위에서 심통과 천수보살의 격전이 벌어졌다.
천수보살은 검법이나 도법 따위는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심통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무수히 많은 손으로 수십 개의 도검을 휘두르니 절기가 따로 없다.
그 모든 게 살초인지라 심통은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심통은 그 와중에도 간간이 천수보 살의 몸통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텅!’ 소리와 함께 튕겨 났다.
절정에 달한 심통의 내력으로는 천수보살의 피부에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한 시진(2시간)쯤 지났을까?
펄펄 뛰던 심통의 체력에도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다.
움직임이 둔해진 심통과 달리 천수보살은 처음과 달라진 게 없었다.
결국 심통에게 위기가 닥쳤다.
칼로 칼을 막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날붙이가 금방 상해서 못 쓰게 되거나 잘려 버린다.
체력의 안배에 신경 쓰다가 심통의 집중력이 흩어졌다.
채앵-.
한순간 심통의 유엽도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유엽도가 반 토막 나자 심통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미 거지반 뭉개진 전각 지붕 위에서 심통은 미친놈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겼다.
이제 싸움은커녕 살아남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쉬익-.
심통의 머리 위로 검 하나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심통이 허겁지겁 몸을 틀어 피하자 양쪽에서 두 개의 도가 날아왔다.
뒤로 물러나며 하나를 피했지만, 나머지 하나가 도중에 방향을 틀었다.
심통은 허겁지겁 반 토막 난 유엽도를 돌려세웠다.
콰직-.
오랜 격전으로 이빨이 나가 있던 유엽도가 다시 한 뼘이나 잘려 나갔다.
이제는 유엽도가 아니라 거의 단검 수준.
그나마도 도 날이 전부 뭉개져 이것으로는 사과도 깎지 못할 게다.
심통은 쓸모없게 된 유엽도를 천수보살의 머리로 냅다 던졌다.
터엉-.
기괴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마치 범종이라도 후려친 듯한 그런 소리다.
심통은 저 천수보살의 속이 텅 비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속이 빈 천수보살이 어떻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대체 마물은 어디로 가고 천수보살이 나타난 거냐고? 시펄!’
마물의 등장도 신기하지만 저 천수보살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통은 재빨리 마당으로 내려왔다.
죽은 이들이 흘린 병기를 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천수보살의 거대한 발에 밟혀 대부분 짓뭉개진 상태였다.
사용할 만한 게 눈에 띄지 않자 심통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심통이 멈칫한 순간 대여섯 개의 도검이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헉!”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궁하면 통한다고 갑자기 허리춤에 덜렁거리고 있던 금강저가 떠오른 것이다.
심통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금강저를 손에 잡고 냅다 휘둘렀다.
채채채챙-.
청동으로 된 것이라 박살 날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금강저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다.
저 무지막지한 천수보살의 도검을 가볍게 튕겨 내 버렸다.
깜짝 놀란 심통은 저도 모르게 금강저를 바라보았다.
녹슬고 볼품없는 청동 장식물이다.
이게 저 도검들을 튕겨 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유엽도를 잘라 버릴 정도로 날카로운 도검이 아니었던가!
문득 곤륜삼선이 법보 어쩌고 하던 게 떠올랐다.
‘설마 이것도?’
법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천수보살에 맞설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심통이 오랜만에 호통을 쳤다.
“이 똥물에 담가 죽일 놈 같으니! 그냥 곱게 죽지 어디 괴상한 모습으로 사람을 괴롭혀! 그것도 이젠 끝이다! 이 몸이 너를 성불시켜 주마!”
심통이 금강저를 들고 천수보살에게 달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심통을 향해 십여 개의 도검이 날아 들었다.
쉬이이익-.
처음부터 천수보살의 도검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숫자가 많고, 단단하고, 빠르다는 것만 빼면 마구잡이였던 셈이다.
그에 비해 심통은 절정의 경지에 이른 도객.
빠르기만 한 단순한 칼부림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채채채채챙- 채챙-.
콩 볶는 것처럼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지친 심통이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천수보살의 도검들은 튕겨져 나갔다.
앞길이 훤하게 뚫리자 심통은 천수보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금강저가 천수보살의 몸통에 박혔다.
순간 심통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유엽도로는 상처도 나지 않던 천수 보살의 피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혈질인 심통은 크게 소리치며 연거푸 가슴을 찔렀다.
“죽어! 죽어! 죽어!”
콰직. 콰직. 콰직.
고통을 느끼는 듯 천수보살의 팔들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모습만 천수보살이지 실체는 마물인 모양이다.
천수보살의 손이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수십 개의 도검이 사방팔방에서 그물처럼 조여 오자 심통은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뒤로 물러났던 심통은 천수보살이 반격을 하기도 전에 다시 달려 나갔다.
혹시나 싶어 금강저에 구천기를 밀어 넣으니 이게 웬일?
구천기는 자신이 사용하던 유엽도보다 훨씬 부드럽게 금강저를 휘감았다.
금강저에서 순백의 광망이 넘실거렸다.
본래 날붙이에 진기를 불어넣으면 대부분 힘을 이기지 못해 터져 나간다.
무인들이 명검이나 명도를 찾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런데 부실해 보이는 청동제 금강저가 대해(大海)처럼 자신의 공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보통 물건이 아니구나!’
심통은 마음 놓고 금강저를 휘둘렀다.
금강저에서 백색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거대한 륜을 만들었다.
구천세법 사식 풍화겁륜(風火劫輪)이다.
검기로 된 수레바퀴에 닿자 천수보살의 도검이 성둥성둥 잘려 나갔다.
천수보살이 발악하듯 수십 개의 팔을 휘젓자 풍화겁륜은 조각나 흩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섬전처럼 날아간 금강저가 천수보살의 이마를 뚫고 들어갔다.
“캬아아아아아!”
이번에는 천지사방에서 독경 소리 대신에 고통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이윽고 천수보살의 몸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심통은 부랴부랴 앞으로 달려갔다.
금강저를 찾기 위해서다.
낡고 녹슨 금강저를 회수한 심통은 보물이라도 되는 양 쓰다듬었다.
“어이쿠! 이 녀석.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좀 일찍 나를 만났으면 좀 좋아? 내 평생 아껴 줄 테니 어디 가지 마라.”
뒤늦게 돌아온 이철산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심통을 보며 물었다.
“마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처리했네.”
심통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마물만 보면 달아나던 인생이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이까짓 자잘한 상처로 치료는 무슨.”
심통이 별일 아니라는 듯 허세를 부렸다.
사실 그는 지금의 이 벅찬 감동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저어, 등쪽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난자를 당했는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난자당했다고? 뼈가 보일 정도로?”
심통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극도의 흥분으로 잊고 있던 통증이 파도처럼 일시에 밀려왔다.
누군가 송곳으로 온몸의 뼈에 붙은 살점을 살살 긁어내는 느낌이다.
“끄으으…….”
심통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똥 마려운 사람처럼 몸을 배배 꼬며 힘겨워 하자 이철산은 안절부절못했다.
반야장의 안채.
누에고치처럼 온몸을 흰 천으로 둘둘 말고 누워 있던 심통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시중을 들던 이철산이 급하게 다가갔다.
“왜 일어나십니까?”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어차피 죽으면 싫어도 평생 누워 지낼 텐데.”
“하하. 죽다니요, 반로환동 중이시라면서요?”
이철산이 거뭇거뭇한 심통의 귀밑머리를 신기한 듯 보았다.
산채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심통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
“반로환동은 무슨. 그정도 경지였으면 이 고생도 안 하지.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지금쯤 상방에 도착했겠군. 자네도 이제 슬슬 무한으로 돌아가게.”
약대몽 행수와 상방 무사들은 반야장 뒤편 창고에서 막운한 행수를 구해 먼저 떠났다.
그러나 이철산과 한채연, 하소백은 자신을 치료한다고 남아 있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며칠 늦게 가도 문주님과 태평상방 방주님이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다 막 행수님을 구하려다 입은 상처 아닙니까.”
이철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심통의 상처를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천수보살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곳의 마물은 전에 들었던 것들과는 다른 것 같더군요. 왜 그런 걸까요?”
“글쎄. 난들 아나. 곤륜삼선이나 화용독심 남궁 소저라면 알 수 있을지도.”
“그런데 그 금강저는 대체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조원촌의 신당에서 나를 닮은 늙은이가 죽기 전에 줬다니까.”
“부럽다. 정말 그 신당 터에서 주우셨나 보네.”
이철산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