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22
222회. 천지개벽을 해도 거행한다
하남성.
정주.
석장촌.
신시 초(오후 3시).
점심 식사를 마친 이우석은 촌장을 찾아갔다.
촌장 석일함은 갑자기 찾아온 예비 사돈 이우석을 반갑게 맞이했다.
“허허허. 어쩐 일인가? 아니, 아니지. 곧 사돈이 될 사이에 내가 무슨 소리람. 일이 없어도 올 수 있는 것을. 잘 왔네. 차라도 한잔 마시세.”
석일함은 오늘따라 머쓱한 얼굴로 서 있는 이우석을 객청으로 안내했다.
“그래, 조카가 찾아왔다지? 사돈댁에 생존한 가족이 있었다니 나도 기쁘구먼. 혼인식 전에라도 한번 소개를 시켜 줄 수 있겠는가?”
노회한 석일함은 이우석을 벌써부터 사돈으로 호칭했다.
그가 혼인에 대해 감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저어, 그렇지 않아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시려고? 아, 참. 보름 후의 혼인식에 현령께서 참석하겠다고 하시더군. 공사에 다망하신 분이 뭘 이런 곳까지 오시겠다는 건지 원. 혼사가 인륜지대사라서 꼭 참석하시겠다나? 허허.”
석일함이 웃으며 이우석을 응시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설사 취소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우석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양쪽 집안에서 혼사를 결정해 놓고 일방적으로 깨려니 영 부담스러운 것이다.
“갑자기 혼사를 치르려니 준비할 게 많은가? 사돈 형편을 알고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 그건 우리 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사돈은 그냥 몸만 오면 되네.”
석일함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눈빛으로 이우석을 응시했다.
보통 때의 이우석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과거와 조금 달라졌다.
조카에게 자식을 팔아넘겼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촌장님, 두 집안의 혼사를 없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그동안 딸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딸애가 원하지 않는 혼례라 취소를 했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유화가 이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예.”
“그럴 리가. 며칠 전에도 유화는 혼인을 할 것처럼 말했는데. 자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면 자네가 변심을 했다거나.”
사돈에서 자네로 호칭이 바뀌었다.
부드럽기만 하던 석일함의 눈빛도 차갑게 번득였다.
“비록 내 아들이 재취(再要)라지만 나무랄 곳 없는 남자일세. 더구나 이건 단지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야. 현령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혼인이지. 자네가 지금 우리 집안의 체면을 뭉개 버리겠다는 건가?”
체면을 뭉갠다는 말에 이우석의 얼굴이 굳었다.
대부분의 뼈대 있는 집안은 체면에 생사를 건다. 만약 신부 측에서 혼약을 깬다면, 석일함에게 그보다 더한 망신도 없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이우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과거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팔았다는 걸 몰랐다면 모를까?
그걸 알면서 어떻게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송구합니다. 저희가 부족해서 파혼을 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욕은 저희가 다 먹겠습니다.”
“송구하다고 될 일이 아닐세. 사람들이 자네 집안을 욕할 것 같은가? 아니지. 분명히 뒤에서 우리 석씨가 분수에 넘는 걸 넘보다가 망신당한 것이라고 비웃을 테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꼴은 볼 수가 없네. 그러니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게.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꼴 보지 않으려면.”
석일함은 마침내 죽음을 입에 올렸다.
단호한 말투와 날카로운 눈빛, 이건 거의 협박이나 다름 없었다.
사실 석일함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처음 혼사를 주변에 알릴 때 지인들은 축하하면서도 ‘도둑놈’이라고 놀려 댔다.
어린 신부는 석장촌의 미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소녀가 마흔다섯이나 먹은 아들의 재취 상대라니 배도 아팠을 것이다.
도둑놈이라는 욕을 먹어 가며 추진한 혼사였다.
그걸 혼인식 보름 전에 돌연 신부 측에서 깨 버리면 이런 망신도 없다.
“어르신. 제발…….”
“이미 석씨 문중에 혼인을 널리 알렸으니 그런 소리 말게. 혹시 갑자기 찾아온 사촌이 반대라도 했나? 왜 갑자기 혼인을 취소하자는 소리를 하는가? 어제까지도 잘 지내던 사람이.”
“하아! 실은…….”
어쩔 수 없이 이우석은 자신의 부끄러운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 아들이 찾아와 그런 말을 하는데…….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밀어붙일 수 있겠습니까? 유화도 내키지 않는 혼사라고 하고요. 그러니 제발 혼사를 취소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내가 자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유화를 며느리로 데려오기 위함이 아니었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다는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자네는 유화를 나에게 팔아넘긴 게 아니야. 석장촌에서 제일가는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승낙한 것이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그래서 혼인을 약속했으면 된 거네. 철부지 조카는 자네가 알아서 설득하게. 난 또 무슨 다른 일이 있나 했더니만, 별일도 아니었구먼.”
“촌장님.”
“어허. 자네와 우리 집안의 혼사에는 삿된 일이 끼어들지 않았었네. 그걸 아는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돌아가서 조카나 만나 보래도.”
당사자인 이유화가 거부한다고 했음에도 석일함은 조카 탓을 했다.
“…….”
이우석은 촌장의 완고한 태도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우석을 향해 석일함이 다른 생각 말라는 듯 한마디 했다.
“천지개벽을 해도 이번 혼사는 차질없이 거행될 걸세. 현령까지 참가하는 석장촌의 경사스러운 일에 더 이상 잡음 만들지 말게.”
천지개벽을 해도 거행한다는 말에 이우석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평소 촌장의 인자한 모습에 ‘사정하면 잘 되겠지’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촌장의 단호한 표정과 날 선 눈빛을 보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배수의 진’을 친 장수의 얼굴이었다.
하기야 석씨 가문의 체면이 달린 일이니 강행할 수밖에 없으리라.
***
방산.
일 남 일 녀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외숙의 집을 찾아갔던 연적하와 그의 사촌동생 이시화다.
약속대로 장작을 만들기 위해 산에 간 연적하를 이시화가 따라나선 것이다.
“오라버니. 나무해 봤어요?”
“아니.”
“그럼 고생 좀 하겠다.”
“괜찮아.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잖아.”
“그러지 말고 그냥 태워 먹은 장작 값을 아빠한테 주고 쉬지 그래요?”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돈은 써야 할 때 써야 하는 법이야.”
“그럴 때 써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되는 일에 왜 돈을 써?”
그러자 이유화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와 미치겠네. 이래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무섭다니까. 산에서 장작이 그냥 생기는 줄 알아. 아빠가 얼마나 힘들면 엄마랑 함께 갔겠어요?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야지, 그걸 또 날라야지. 보통 일 아니라고요. 사람들이 괜히 장작을 사는 줄 알아요?”
“외숙이 숙모랑 같이 나무하러 산에 간 줄 아냐? 쯧쯧! 그러니 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나무하러 가지 뭘 하러 가요?”
“애들은 몰라도 돼.”
“이따가 아빠한테 일러야지. 오라버니가 이상한 소리 했다고.”
“내가 언제 이상한 소리를 해?”
“방금 그랬잖아요. 아빠랑 엄마가 나무하러 산에 간 게 아니라고.”
“어른들이 장작만 하셨겠냐? 나물도 캐고, 토끼도 잡고, 그러는 거지.”
“한겨울에 무슨 나물 타령이에요.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인 줄 아네. 웃겨. 정말. 내가 이르나 안 이르나 두고 보기나 해요.”
“얼마면 되냐.”
“열 문?”
연적하는 품을 뒤졌지만 동전은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은자 한 냥을 꺼내 이시화에게 내밀었다.
은자를 본 이시화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헉! 저 거스름돈 없는데요?”
“그냥 가져.”
이시화는 냉큼 돈을 받아 품 안에 집어 넣었다.
“이 돈이면 장작 열 짐도 넘게 사겠다. 돈도 많으면서 그냥 장작값으로 내지 왜 이 고생을 해요?”
“지금의 외숙에게는 동전 한 문도 아까워서.”
“나한테 주는 건 안 아깝고요?”
“어. 너는 나와 신세가 비슷하잖아.”
“뭐가 비슷해요? 오라버니는 부자고 나는 가난한데?”
“너도 나처럼 부모복이 없잖아.”
“뭐래? 오라버니 부자면서 왜 부모 복이 없대요? 그 돈은 다 어디선 난 건데요?”
“내가 놀면서 번 돈이야.”
“풋! 놀면서 어떻게 돈을 벌어요?”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제법 깊숙이 들어왔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오자 이시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멀리까지 와요? 나무는 산 아래도 많잖아요. 집까지 가져가려면 힘들 텐데.”
“가까운 곳은 외숙의 몫으로 남겨 놔야지. 나는 먼 곳에서 해도 돼.”
“아, 예, 예. 그럼 이제 나무를 잘라 봐요. 직접 해 봐야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지.”
“너는 추운데 집에 있지 왜 따라 나와서 잔소리냐?”
“낯선 곳에서 오라버니 심심할까 봐 같이 있어 주는 거라고요. 추우니까 빨리 나무나 해요. 얼어 죽겠네. 정말.”
“춥냐?”
“그럼 겨울에 춥지 더워요?”
“아, 내가 그런 걸 깜빡깜빡해.”
“피이!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사람이 어떻게 춥고 더운 걸 깜빡해요? 하여튼 입만 열면 이상한 소리야.”
“잠깐만. 추우면 안 되지.”
연적하가 들고 있던 도끼로 주변 나무를 툭툭 건드리고 다녔다.
콰앙. 콰앙. 콰앙. 쿵.
밑둥이 매끈하게 잘린 나무 십여 그루가 차례로 쓰러졌다.
답답하던 숲이 조금 훤해졌다.
연적하는 도끼로 가볍게 쓰러진 나무를 톡톡 쳤다.
그럴 때마다 나무는 마치 도마위의 파처럼 균일하게 다듬어졌다.
이시화가 눈 몇 번 깜빡이는 동안 장작은 그녀의 허리 높이까지 쌓였다.
대충 준비가 끝나자 연적하는 장작 더미에 손을 대고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화르륵.
얼어 붙은 숲 한가운데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 있는 이시화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이리 와서 몸이나 녹이고 있어. 금방 장작 만들 테니까.”
“오라버니 나무꾼이었어요? 엄청 빨리하네? 불은 또 어떻게 붙인 거예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도끼로 툭툭 건드려 주면 되는데.”
“불은요?”
“너 사람 몸 안에도 물과 불이 있는 거 알아?”
“또 또 이상한 소리.”
이시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촌 오라버니는 입만 열면 이상한 말을 한다.
근본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런 점은 좀 별로다.
“와아. 미치겠네. 내가 이런 말 하면 심 노인은 받아 적을 기세로 덤벼드는데.”
“심 노인이 누군데요?”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노인네 있어.”
“뭐하는 할아버지인데 오라버니를 따라다녀요? 그렇게 할 일이 없데요?”
“어. 그런데 너도 나 따라다니고 있잖아.”
“난 할 일이 없으니까요.”
“아! 그렇지.”
연적하는 자신이 말로 이시화를 당해 내지 못함을 알고 돌아섰다.
이시화는 모닥불을 쬐며 연적하가 나무 사이를 오가는 걸 물끄러미 보았다.
커다란 도끼를 수수대처럼 가볍게 흔드는데 그럴 때마다 나무가 툭툭 끊어졌다.
마당에서 잠깐 장작 손질을 할 때도 땀범벅이 되는 아빠와 너무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