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26
226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어떻게 해야 가능하냐?’는 점창파 장문인 생사판관 금화 선인의 질문에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군웅들의 이목이 충분히 집중된 뒤에야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파와 힘을 합친다면 유명교를 없앨 수 있습니다.”
“…….”
한순간 금화 선인은 물론 다른 육파이문과 오대세가 가주들까지 침묵했다.
사파는 유명교보다 오래된 정파의 적이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에서 통과의례처럼 행하는 ‘강호행’도 결국은 사파의 척살이 목적이었다.
죽여야 할 적과 손을 잡아야 유명교를 없앨 수 있다니 기가 막힌 것이다.
금화 선인이 확인하듯 물었다.
“사파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오?”
“사파의 종주인 녹림입니다. 녹림과 힘을 합치면 천하의 사파가 다 따를 테니까요.”
“허! 녹림과…….”
금화 선인은 기가 막힌지 말을 맺지 못했다.
녹림이 누구던가!
그들은 공공의 적이자 척살 일 순위인 도적이다.
고아한 칠파이문과 오대세가에 그런 자들과 손을 잡으라는 것은 모욕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제갈승운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해묵은 원한보다 새로운 원한이 더 컸던 탓이다.
어쩌면 유명교보다 녹림을 다루기가 쉽다는 게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정의맹 입장에서 녹림은 덩치만 크지 실은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녹림이 굶주린 늑대라면 유명교는 피 맛을 본 호랑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늑대의 도움을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술렁거리던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가주들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천문주 군자검 이연익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총사. 살다 보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헌데 녹림이 우리와 손을 잡으려 하겠소?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공동파 장문인 탕마검 편운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이오. 오히려 이참에 어부지리나 얻으려 할 텐데.”
두 사람의 지적에 제갈승운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물론 그냥은 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파천마군의 입맛에 맞는 제안을 해야겠지요. 이를테면 정의맹과 칠파가 잡아 둔 마두들을 방면해 준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의맹과 칠파에는 그간의 강호행으로 잡아 둔 마두가 여럿 있었다.
물론 얻어 낼 것이 있어서 잡아 둔 마두들이다.
그럴 가치가 없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척살을 했으니 말이다.
소림사 장문인 무법선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소림사의 뇌옥에 있는 혈해신마에게서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혈해신마는 삼십 년 전까지 강남 일대에서 활약하던 대마두다. 그를 잡기 위해 투입된 소림사의 고수만 백여 명이 넘는다.
소림사가 혈해신마의 확보에 열을 올린 것은 그에게서 ‘무해신서’를 되찾기 위함이다.
전조(前朝) 말기에 홍건적들이 습격해 와서 소림사를 털어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도둑맞은 복장유물(불상 내부에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넣어 둔 물건) 중에 하나가 무해신서다.
취중에 자신이 무해신서를 익혔다고 떠들어 댄 뒤로 혈해신마는 소림사에 쫓겨 다니다 결국 잡혀갔다. 그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다.
무해신서만 아니었으면 그는 죽어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악인이었다.
제갈승운운 무법선사의 반응을 못 본 척했다.
혈해신마는 파천마군의 의제(義弟)라 그를 빼놓을 수가 없어서다.
다른 육파의 장문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들 문파에도 비범한 사연을 가진 마두들이 한두 명씩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마두들을 방면하는 일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정의맹이 생긴 뒤로 유례없는 일이 아니오?”
청성파 장문인 원양 진인도 거들었다.
“옳으신 말씀이오. 자칫 마도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소. 유명교를 없애고 나면 녹림이 활개를 치고 다닐 터인데, 거기다가 전대의 마두들까지 합세하면…….”
원양 진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제갈승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정도의 대가 없이는 파천마군을 움직이기 어려울 겁니다. 파천마군은 부족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혹할 제안은 그것뿐입니다.”
영결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파가 가둔 마두를 풀어주는 것과 파천마군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파천마군처럼 괴팍한 사람이 그런 제안에 끌릴 이유가 있소?”
“자신이 사파의 종주(宗主)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이니까요. 사파의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면, 그는 사파의 전설로 남게 될 것입니다. 파천마군이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거부한다면?”
“이것은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그런 파격적인 제안을 거부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파는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을 테니까요.”
“아!”
“과연!”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가주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갈승운처럼 신기수사라는 별호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칠파에는 살을 찢는 고통이지만, 파천마군도 거부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수법.
물론 뼈란 녹림이 흘리게 될 피다.
제갈승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녹림이 어부지리를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이 싸움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흘린 피만큼 저들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칠파의 장문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천마군을 움직이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정주.
석장촌.
혼례를 하루 앞두고 촌장은 예비 사돈인 이우석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이우석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석일함의 표정은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그래, 준비는 잘되고 있소?”
밑도 끝도 없는 질문 앞에 이우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촌장님,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아직…….”
보름 전만 해도 단호하게 거절한 그였지만 오늘은 말끝을 흐렸다.
“듣자 하니 내일 계례를 하신다고?”
계례라는 말에 이우석은 뜨끔한 얼굴로 촌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의외로 촌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조카가 준비를 하겠다고 해서요.”
“잘 생각하셨소. 그렇지 않아도 ‘계례도 하지 않은 어린 신부를 들인다’고 말이 있던 참이오. 나이가 열여섯이나 됐는데 계례를 하지 않았다고 어리다니 원.”
촌장의 칭찬에 이우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혼례를 위한 계례가 아닌데, 촌장은 그 둘을 연관지어 말하고 있었다.
“사돈께서 용케도 혼례 전에 계례 치를 생각을 했구려. 그 경비도 내가 지불해 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준비해 주시구려.”
석일함은 이유화의 계례를 혼인을 위한 것처럼 말했다.
그라면 혼사를 강행하는 건 일도 아니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이우석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반쯤 체념한 상태다.
조카는 야반도주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빚은 나 몰라라 하지.
촌장은 강제로 혼사를 치르겠다고 하지.
빼도 박도 못 하고 중간에 낀 그는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방문을 열고 음식이 들어왔다.
이우석은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촌장의 집안 전체가 음식 냄새로 가득한 것 같다.
석일함이 인자하게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드시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소. 내일 혼례식 때 쓸 음식인데.”
***
이우석은 촌장 집에서 한 상 얻어먹고 오후 늦게야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을 열고 막 들어가던 이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마루 위에 뭔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천으로 단단히 동여맨 큼지막한 상자들이다.
촌장이 보낸 예물이려니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용물이 궁금했지만 조카와 처가 난리를 칠까 봐 애써 외면했다.
작은 방에는 처와 두 딸이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아직 날이 훤한데 방에서 자식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처가 왠지 낯설다.
“오늘은 일이 없었소?”
“촌장님 집에 일하러들 가는데 거긴 갈 수 없잖아요.”
“아. 허긴 나도 거기서 오는 길인데 시끌벅적한 게 그 때문이었군.”
“그 집에는 왜 갔어요?”
“왜 갔겠소? 잘 보이려고 갔지. 촌장님과 척을 짓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한 건 아니죠?”
“이 사람이 날 뭐로 보고. 애들도 있는데 무슨 그런 말을.”
이우석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처가 얄미웠다.
이럴 때 보면 여자들은 감정에 치우쳐 현실의 문제에 둔한 것 같다.
“마루의 물건들은 뭐요?”
물론 촌장이 보낸 선물인 줄 알면서 묻는 것이다.
그런데 막내딸 이시화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도사? 도 뭐라고 했는데, 하여튼 그 사람이 보냈어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이우석이 이유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큰딸 이유화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머니와 저도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몰라요. 시화가 오전에 받아 둔 것들이라.”
“흠! 내가 알고 지내는 도사가 없는데…….”
“맞다. 위사? 위 모라고 했는데, 그분도 보냈어요.”
“도사와 위사가 보냈다고? 그게 대체 누구지? 이 근방에 도관이 있었나? 하여튼 촌장님 발이 넓어. 그래도 사돈이라고 우리까지 챙겨 줬나 보네.”
“우리가 왜 그 집 사돈이에요!”
장소미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유화와 시화의 눈초리까지 사나워지자 찔끔한 이우석이 변명을 했다.
“누가 사돈이래. 사돈이라고 지레짐작해서 보낸 거라는 말이지.”
“그래도 기분 나쁘니까, 그 사돈이라는 소리 입 밖에 꺼내지 마세요!”
이우석이 어쩔 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다.
밖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계십니까!”
이때다 싶어 이우석이 벌떡 일어났다.
“손님이 왔나 보네. 내 나가 보리다.”
달아나 후다닥 방에서 빠져나간 이우석은 마루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담장 너머에 장정 셋이 등짐을 지고 서 있었다.
“뉘시우?”
“이곳이 이 대인의 집이 맞습니까?”
‘이 대인’이라는 말에 이우석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석장촌에 이씨는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은 대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아니다.
설마 촌장의 처가라고 벌써부터 대우가 이렇게 달라지는 건가?
그렇구나!
친우들이 부러워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석장촌에 이가는 나밖에 없소만. 대인과는 거리가 좀 먼데…….”
“존함이 이, 우 자, 석 자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촌장의 친척 중에 높으신 분들이 많다더니 역시나 말투부터가 다르다.
“형양현의 현령이신 석강월 대인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안으로 들여 놔도 되겠습니까?”
“되긴 되는데,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파혼하겠다고 하고서 감히 현령이 보낸 선물을 받다니?
왠지 일이 커지는 느낌에 이우석은 슬슬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는 촌장과 자신의 집안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현령이 보낸 선물 더미를 보니 가볍게 끝날 일 같지가 않다.
남자들이 선물을 내려놓자 그렇지 않아도 작은 마루가 꽉 찼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정의맹 정주 지부는 물론, 정주 사파연합인 삭풍회까지.
마루에 자리가 부족해 방으로, 나중에는 방에도 자리가 없어 처마 아래에 쌓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