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39
239회. 그래? 길몽(吉夢)이네
왕손귀가 한 걸음 다가와 소리쳤다.
“맞네, 맞아! 백수범. 잘 먹고 살았는지 얼굴이 그대로네. 박산릉(博山陵, 선계의 신산에 있다는 무덤)에서 나온 보물을 들고 달아나더니, 팔자가 폈나 보이? 늙지도 않은 걸 보니.”
뜻밖의 장소에서 옛 친구를 만난 백수범은 노하기보다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헛! 자네는 많이 삭았구먼. 먼저 알은체하지 않았다면 못 알아볼 뻔했어.”
“흰소리 말고 단검이나 내놔라.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그것만은 안 된다.”
왕손귀의 허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잊고 살았던 사십여 년 전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백수범과 왕손귀는 동향의 친구다.
두 사람의 고향은 사천성 도성(稻城).
도굴로 연명하던 그들은 도성의 삼신산에 있는 박산릉을 털었다.
삼신산.
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한다.
재밌게도 도성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사시사철 눈으로 덮인 삼신산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선내일봉(仙乃日峰), 앙매용봉(央迈勇峰), 하낙다길봉(夏若多吉峰)이라 했다.
그중 선내일봉의 정상에 기이한 구릉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박산릉이라 불렀다.
삼신산에 있어 그냥 박산릉이라 부른 것인지, 정말 신선의 무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름만 박산릉이지 그것을 진짜 무덤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백수범과 왕손귀도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도성을 지나던 수도사 하나가 선내 일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박산릉에서 푸른빛을 보았다’고 했다.
본래 신령스러운 산에 그런 말까지 나오니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박산릉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적당한 무덤을 물색하던 백수범과 왕손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내일봉에 올랐다.
그리고 사흘 밤낮을 매달린 끝에 마침내 박산릉 입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신선의 무덤이라는 박산릉이 이십 년 지기의 우정을 갈랐다.
백수범이 박산릉에서 훔친 보물을 들고 잠적한 것이다.
그 뒤 왕손귀는 고향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언젠가 배신자 백수범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단검은 어디 있느냐?”
“아, 그거? 몇 년 전에 잃어버렸다. 생사의 기로에서 적에게 냅다 던지고 달아났거든.”
“흥! 거짓말하지 마라. 단검만 내놓으면 없던 일로 해 주마.”
“왜 그렇게 단검에 목을 매는데?”
잔혈마도 백수범이 의아한 눈으로 왕손귀를 보았다.
그날 박산릉에서 나온 것은 단검만이 아니다.
주인과 시대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한 보따리나 쏟아져 나왔다.
그중 자신은 돈이 될 만한 금붙이와 단검만 들고 달아났었다.
그런데 왜 금붙이가 아니라 단검에 집착하는 것일까?
왕손귀가 백수범의 팔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기녀를 힐끔 보았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 어려운 눈치다.
그를 지그시 보고 있던 백수범이 기녀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이 방으로 술과 안주를 가져오거라. 여자는 필요 없으니 부르지 말고.”
그는 무려 사십 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와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기녀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늙은이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유곽에서 술과 안주만 먹겠다니?
한마디 하려던 그녀는 늙은이의 포악한 눈빛에 눌려 조용히 물러났다.
싸한 분위기를 감지한 왕손귀의 시선이 백수범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제야 유엽도가 눈에 들어왔다.
“사십 년 동안 장물 시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칼을 쓰며 살았더냐?”
“그렇게 됐다. 들어가자.”
백수범이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왕손귀는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내가 가져간 금붙이도 많았는데 왜 단검만 찾느냐?”
백수범의 질문에 왕손귀가 반문했다.
“그 전에 네놈은 왜 나를 배신하고 달아났느냐? 나는 우리가 친형제보다 더 좋은 관계라고 믿었다. 고작 금붙이 때문에 그랬던 거냐?”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백수범이 말했다.
“그보다는 무덤을 파서 먹고사는 게 지겨웠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미친! 그래서 나를 배신했다고?”
“그때의 너는 도굴에 꽤나 집착했으니까.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게 훨씬 쉽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느냐?”
“개소리. 나도 먹고살기 위해 도굴을 한 것뿐이다. 나라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는 줄 아느냐? 그 기회를 앗아 간 게 네놈이었다.”
“옛날이야기는 그쯤 하고. 왜 금붙이가 아닌 단검을 찾는지나 말해 봐라.”
“박산릉에서 나온 물건 중에 낡은 초상화와 요대가 있었다. 기억나느냐?”
“곰팡이가 잔뜩 핀 초상화와 녹슨 쇠가 달린 요대를 말하는 거냐?”
“그래. 그 초상화에 흐릿하게 화주도사(華州道士) 여암(呂岩)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순간 왕손귀가 기막힌 얼굴로 물었다.
“너는 화주도사 여암이 누군지 모르느냐?”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도사들의 이름을 알아야 하느냐? 뜸 들이지 말고 그게 누군지나 말해 보거라.”
“종남산에서 수련하던 여동빈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 화주도사 여암이다. 우리가 도굴한 그 박산릉이 여동빈의 무덤이었다는 소리지.”
“신선이라는 그 여동빈?”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느냐?”
“그럼 단검은 설마?”
“오래전 떠돌이 수도사가 마을에 와서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박산릉에서 푸른빛을 보았다고 하던.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박산릉으로 가지 않았더냐.”
“기억나다마다. 그게 단검에서 흘러나온 빛이라는 거냐?”
“영물과 법보가 세상에 출현할 때면 광채를 내뿜는다고 했다. 여동빈의 청사는 영물을 잡아 만들었으니 그 모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그 수도사는 청사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너는 정말 그 단검을 청사로 믿고 있구나?”
“그야 가지고 간 네놈이 더 잘 알겠지. 말해라. 단검은 어디 있느냐?”
“미안한 말이지만 청사가 아니다.”
“무슨 소리냐?”
“네 말대로 그 단검은 내가 지난 사십 년 동안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푸른빛을 뿜은 적이 없다. 보검처럼 날카로워 뭐든 잘 자르기는 했지만.”
“멍청한 놈. 법보가 허구한 날 빛을 발할 줄 알았느냐? 우리가 발굴하던 날도 빛은 나지 않았다. ‘스스로 원해야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쯤은 알아야지.”
“쩝, 네 말대로 설령 그게 청사라 해도 이제는 소용없다. 잃어버렸으니까.”
“사실이냐?”
“유명교 십두마병인 이 몸이 뭐가 아쉬워서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백수범이 오연한 얼굴로 왕손귀를 보았다.
왕손귀는 그의 심유한 눈빛에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의 그는 이전에 알고 지내던 도굴꾼 백수범이 아니었다.
“유명교 십두마병이라고?”
“그래. 삼십 년쯤 전 유명교에 투신해서 십두마병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 너는 왜 그 단검을 돌려 달라고 한 것이냐?”
왕손귀가 체념한 얼굴로 답했다.
“요즘 천지맹에서 법보를 큰돈 주고 매입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랬다.”
“안됐군.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다 해도 네게 갈 일은 없었을 게다.”
“그랬을 테지.”
왕손귀는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맹에서 유명교와의 전쟁에 쓰려고 법보를 사 들이는데 백수범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백수범이 품 안에서 전표 몇 장을 꺼내 팍삭 늙은 고향 친구 앞으로 내밀었다.
“사십 년 전 네 몫까지 들고 간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고, 넣어 둬라.”
왕손귀가 냉큼 전표를 받았다.
천 냥짜리 전표가 무려 다섯 장이나 됐다.
“고, 고맙다.”
그늘져 있던 왕손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백수범이 십두마병임을 알고 포기했는데 이게 웬 횡재인지 모르겠다.
그날 밤 백수범과 왕손귀는 무려 사십 년 만에 화해를 하고 만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
정주.
칠리하촌.
동편 산기슭의 작은 집.
출정식 전날 밤.
“하하하.”
“킥.”
밤늦게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던 구천노도 심통이 눈을 번쩍 떴다.
사람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사방 십 장(약 30미터)이 고요했다.
꿈인가 싶어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옆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지?’
상체를 일으키고 보니 연적하가 자면서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만 하면 연적하가 키득거렸기 때문이다.
전처럼 악몽에 시달리는 것보다 낫지만, 그래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로 오감이 예민해져 있는 심통은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했다.
마침내 출정식의 날이 밝았다.
연적하는 꼭두새벽부터 목욕재계를 한다며 부지런을 떨었다.
“공자님, 아직 날도 추운데 웬 목욕입니까?”
“주작대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잖아. 내가 녹림이라고 다들 눈여겨볼 텐데, 냄새는 피우지 말아야지. 녹림이라면 다들 냄새나고 더러운 줄 안다고.”
곧이어 연적하는 살얼음이 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머리 위에 들이부었다.
촤아아-.
“남궁 소저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시고요?”
“푸아! 잘 보이고 말고 할 게 어딨어? 해도 바뀌었으니까 겸사겸사 한 번 씻으려고 하는 거야.”
이윽고 연적하는 몸에 물기를 닦아 낸 뒤,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몸에 때가 끼지 않아 땀만 씻어 낸 것이다.
순식간에 끝난 목욕이었음에도 심통은 혀를 내둘렀다.
“목욕을 너무 자주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직 몇 달 안 지난 것 같은데.”
“그러니 사람들이 심 노인을 싫어하는 거야. 좀 자주 씻고 다녀.”
연적하의 타박에 심통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제는 자다가 한참 웃으신 거 압니까?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렇게 웃으셨습니까?”
“내가 웃었다고?”
“예. 제가 놀라서 깼을 정도로 큰 소리로요.”
“그래? 좀 재밌는 꿈을 꾸긴 했어.”
“재밌는 꿈요?”
“머리에 사슴처럼 큰 뿔이 돋아난 이무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어.”
“흐흐. 다 큰 어른이 무슨 그런 꿈을 꾸십니까. 아직 키가 더 크려나 봅니다?”
“키가 크는 꿈이야?”
“본래 키가 클 때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길몽(吉夢)이네.”
연적하가 작은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 보니 목욕을 끝낸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참, 어제 의천문의 셋째 소저까지 왔었다고요?”
“어.”
“그 아가씨도 좀 생뚱맞은 구석이 있네요. 설마 오봉산에서의 일을 따지러 온 건 아닐 테고. 왜 왔답니까?”
“발대식 날 멀리서 나를 봤다. 반가워서 인사나 하러 왔다 하더라고.”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별말 없던데?”
“그것참! 칠파이문의 제자들은 콧대가 높아서 사람들을 잘 안 만나기로 유명한데. 공자님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고요?”
“그렇다니까. 그냥 내 인품을 보고 찾아온 걸 수도 있어.”
“흐흐. 녹림에 인품이라니요? 웃자고 하신 말씀이면 성공하셨습니다.”
“…….”
진심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다니.
뻘쭘한 얼굴로 일어선 연적하가 마루에 놓았던 검을 집어 들었다.
어제 청운검 남궁천이 가져다 준 연무백의 검이다.
손잡이를 잡으니 착 달라붙는 게 ‘와룡검’보다 더 느낌이 좋았다.
슬쩍 검을 뽑아 보니 역시나 검신에 ‘와룡’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와룡검객 연무백은 정주 와룡장의 가주였다.
가주가 쓰던 검이라 그런지 이게 와룡검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왜 바꿔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