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4
254회. 사자의 심장을 가진 승냥이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자존심 강한 무인들의 꿈은 대부분 무력시위와 관련되기 마련이다.
구천노도 심통에게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과거 구밀복검 심양각 시절부터 쌓여 이제는 한이 되다시피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살아생전 칠파이문에 큰소리 팡팡 쳐 보는 것이다.
사실 구밀복검은 그에게 가슴 아픈 별호다.
흉중에 칼을 품고도 꿀 바른 말로 비위를 맞춘 것은 힘이 없어서였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승냥이라고나 할까?
주화입마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적하에게 심법을 배운 것도 그 때문이다.
연적하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넘고 싶다’ 했지만, 한계를 넘어 뭘 할 건가?
그건 결국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목에 힘주며 살겠다는 소리였다.
한 마리 수사자처럼 말이다.
그러던 그가 구천여일진경의 삼백자 구결로 다시 태어났다.
혼탁하던 내력까지도 연단을 거쳐 구천기로 흡수했다.
강호의 경험과 새로 익힌 절기들은 승냥이였던 그를 사자로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심통은 진짜 야수처럼 ‘그르릉’거리는 목울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전신에서 투기가 철철 넘쳐흐른다.
그 모습에 연적하는 살짝 당황했지만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는 심통이 그래도 대화로 풀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구밀(口蜜), 즉 입에 꿀을 바른 사람이었으니까.
점창파의 태상장로이자 기찰대 일 조 조장인 태을상인은 다가오는 심통을 지그시 보았다.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붉은 유엽도와 금강저.
영락없는 심양각, 아니 심통이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원로들 사이에 심통의 정체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천지맹이 정의맹의 후신이니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은 최근 심통이 잘나가는 이유를 법보의 효능으로 생각했다.
제마대 술사들이 법보로 마물을 처리한 뒤로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태을상인도 심통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가호위라거나,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따라서 뛰는 것쯤으로 여겼다.
그런 심통이 투기를 풀풀 날리며 다가오니 가소로웠다.
과거 하남성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점창파 태상장로 앞에서 무게를 잡다니?
어차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유도할 거면서 말이다.
물론 그가 타협안을 제시하면 진지하게 고려할 생각이긴 하다.
녹림 총순찰과 흑수선이 얽힌 일이라 들쑤셔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런 생각은 긴장감 없는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우리를 따라 천지맹으로 가겠소? 아니면 이 문제를 풀 다른 방도가 있소?”
태을상인의 말에 심통이 냉소를 날렸다.
“흥! 그런 개방귀 같은 소리는 점창파에나 가서 해라. 너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 애송이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양심 없는 놈들과 무슨 대화란 말이냐?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너희도 무인이라면 칼을 들어라! 쫄리면 꺼지시든지!”
광오한 심통의 말에 반점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닭 날개를 들고 쪽쪽 빨던 연적하도 하던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심통을 보았다.
‘저런 미친.’
잘 풀라고 보냈더니 첫마디가 싸우잔다.
오죽하면 보고 있던 흑수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을 정도다.
“저렇게 막 나가도 괜찮아요?”
사람 심리라는 게 또 이상하다.
옆에서 말리면 더 나가고 싶어진다.
미녀 앞에서 큰소리치는 남자의 본능이 조금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연적하는 뼈만 남은 닭 날개를 툭 던지고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늙은이야.”
“그래도 일이 커지면…….”
“괜찮다니까. 그리고 녹림은 뒷일을 생각하는 거 아니야.”
“…….”
순간 흑수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부친은 늘 ‘뭔가 하기 전에 결과를 생각하라’ 했다.
정작 본인은 내키는 대로 했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연적하는 당당하게 말했다.
녹림은 뒷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맞다.
뒷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도적질과 맞지 않는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의 말이 진리다.
흑수선은 슬쩍 연적하를 훔쳐보았다.
처음에는 부친이 하도 칭찬을 해서 어떤 사람인지 볼 생각으로 접근했다.
자신의 미모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의 언행을 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총순찰님,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자신의 질문이 상황에 맞지 않고, 뜬금없다는 걸 알지만, 너무 궁금했다.
“어.”
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흑수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나온 사내는 없었다.
심지어 자식을 둔 남자들조차도 총각 행세를 했다.
그런데 연적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강북제일미녀라 불리는 흑수선을 앞에 두고 말이다.
“아, 그러시구나.”
그녀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다시 연적하를 시중드는 일에 집중했다.
심통의 말에 울컥한 전진파 장로이자 기찰대 삼 조 조장인 무무 진인이 버럭 소리쳤다.
“심통! 간덩이가 부었구나! 녹림 총순찰을 따라다니며 호가호위하더니, 끝내 네 주제를 잊은 거냐!”
흥분한 무무 진인은 이제야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사실 칠파이문과 오대세가 원로들에게 심통은 그 정도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다.
“으흐흐흐! 호랑말코 같은 도사 놈이,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짖어 대는구나! 호가호위? 주제를 잊어? 오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덤벼 봐라.”
심통의 도발에 무무 진인은 검을 뽑아 들고 뛰어나갔다.
전진파의 장로가 된 뒤로 이런 모욕은 처음인지라, 앞뒤 재지 않고 싸움에 응한 것이다.
무무 진인은 무극검의 초식으로 심통을 찔러 갔다.
그는 천지맹이니, 맹약이니 따위를 잊고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상대의 생사를 도외시한 살기등등한 검식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무극검의 팔 초식을 다 쏟아부었음에도 심통은 멀쩡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폭풍 같은 무무 진인의 검식을 다 받아 낸 뒤에 심통이 크게 외쳤다.
“그게 전부냐! 그럼 이제 내 차례다!”
돌연 심통의 유엽도가 시퍼런 광망에 휩싸였다.
도기와 도강의 중간쯤 되는 그 모습에 무무 진인은 물론 태을상인까지 흠칫 놀랐다.
시퍼런 광채에 휩싸인 유엽도가 건곤감리의 사괘를 쾌속하게 찍었다.
순간 도기의 광풍이 무무 진인에게 몰아쳐 갔다.
구천세법 삼 식 운룡풍호다.
광풍 속에 언뜻언뜻 시퍼런 광망을 뿌리고 있는 유엽도가 보였다.
무무 진인은 전면으로 검기를 뿌리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따따따땅-.
우당탕!
결국 도풍에 밀린 무무 진인은 반점의 문틀을 부수고 밖으로 튕겨 났다.
“우웩!”
밖으로 나간 무무 진인은 내상을 입었는지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그런 무무 진인을 보던 태을상인이 노기 어린 얼굴로 심통에게 말했다.
“감히 기찰대의 조장을 상하게 하다니! 알량한 무공을 믿고 안하무인이로구나!”
태을상인은 심통의 무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칠파이문의 장로를 상하게 한 것은 용서가 안 된다.
더구나 공무 수행 중인 기찰대 조장을 공격해 다치게 하다니!
이제는 연적하가 나선다 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심통을 제압하시오! 저항하면 죽여도 좋소!”
말과 함께 태을상인이 먼저 검을 뽑았다.
곧이어 열아홉 명의 정파 기찰대 고수들이 심통을 향해 다가갔다.
보다 못한 흑수선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사파 고수들에게 말했다.
“뭐해요? 다들 구경만 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채근에 아홉 명의 사파 고수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사실 적보다 아군이 많다면 괜찮은데, 그 반대라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무려 칠파이문의 장로들인 까닭이다.
그래도 그들은 감히 흑수선을 거역하지 못하고 심통의 좌우에 늘어섰다.
태을상인은 어차피 저 아홉도 잡아가야 할 죄인들인지라 망설이지 않았다.
“맹약을 어기고 기찰대에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포박하시오! 죽여도 좋소!”
그러자 심통이 지지 않고 외쳤다.
“개소리!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질 것 같으냐! 맹약을 어긴 것은 너희들이다! 죽고 싶으면 와라!”
팽팽한 긴장 속에 양측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질 때다.
또다시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반점 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이냐!”
“총순찰님! 저희가 왔습니다!”
그들은 녹림의 부채주들로 이루어진 사파 기찰대였다.
우당탕. 쿵쾅.
의자와 탁자를 밀어붙이며 스무 명의 사파 기찰대가 심통에게 다가갔다.
태을상인과 정파 기찰대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태을상인이 사파 기찰대를 향해 말했다.
“기찰대가 법을 집행 중인데 이게 무슨 짓들이오! 당신들도 기찰대면 죄인을 잡아야지 어찌…….”
“죄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연적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을상인과 정파 기찰대를 향해 걸어갔다.
“이봐. 노인장. 당신 도사야? 아님, 썩을 관인이야? 누구한테 함부로 죄인이래?”
“뭐라! 감히!”
연적하의 막말에 태을상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점창파의 태상장로에게 노인장이라니!
그건 아무리 상대가 녹림 총순찰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태을상인의 반응에 연적하가 더 화를 냈다.
“감히? 지금 감히라고 한 거야? 내가 점창파 제자야? 아니면 당신이 내 할아버지라도 돼? 어디다 대고 감히래?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말과 함께 연적하가 가까이 있던 탁자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젓가락 통에 있던 젓가락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연적하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쉬쉬쉬쉭-.
젓가락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 갔다.
날아가던 젓가락들은 태을상인의 한 치(약 3센티)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젓가락만 쳐다보았다.
강력한 진기가 실린 젓가락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태을상인의 몸에 금방이라도 박힐 듯했다.
대경실색한 태을상인은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검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허공섭물도 아니고, 접인술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젓가락 하나하나에 강력한 기운이 실려 있어서, 하나라도 몸에 박히면 중상을 면치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때 젓가락 하나가 천천히 전진해 태을상인의 속눈썹을 건드렸다.
파르르.
태을상인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연적하를 보았다.
다른 여덟 명의 장로들도 숨소리조차 죽이고 연적하에게 집중했다.
“노인장, 사람이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야. 저기 팔 부러진 애송이들이 나에게 뭐라고 한 줄 알아? 사기꾼, 개 후레자식이라고 했어.”
물론 콕 찍어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다.
대체로 비하하는 분위기였는데, 심통이 그걸 확정해 줬을 뿐이다.
태을상인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설사 후기지수들을 죽인다 해도 죄를 묻기 어려웠다.
“그런데 무무 진인은 물론 노인장도 무조건 심통만 물고 늘어지더라고? 심통이 무슨 죄가 있어? 같은 식구 욕보인 애송이들 혼내 준 것도 죄야? 그것도 고작 팔을 부러뜨린 것뿐이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잡아가서 죄를 묻겠다고? 녹림이 동네북이야? 그러라고 천지맹에 가입한 줄 알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몰랐소.”
“기찰대 만든 사람이 누구야?”
“총사요.”
“그 사람이 잘못했네. 나한테 와서 빌라고 해. 안 그럼, 녹림은 칠리하촌에서 떠날 거야.”
“…….”
태을상인은 차마 가타부타 말하지 못했다.
연적하는 우두커니 선 그를 내버려 두고 허공의 젓가락을 하나씩 집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