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55
255회. 조장들이 밟은 건 아주 큰 똥이오.
칠리하촌.
천지맹 정주 지부.
현천각.
술시 초(오후 7시).
총사인 신기수사 제갈승운의 집무실인 현천각으로 두 사람이 찾아왔다.
점창파 태상장로 회풍무상검 태을상인과 전진파 장로 일월검 무무 진인이다.
저녁 식사를 하러 막 나가려던 제갈승운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기찰대를 맡은 두 원로 고수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식사들은 하셨는지요?”
제갈승운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속으로는 부디 별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태을상인과 무무 진인은 제갈승운의 맞은편에 앉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수치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무슨 말로 서두를 떼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제갈승운은 궁금했지만 채근하지 못하고 누군가 말해 주길 기다렸다. 태을상인과 무무 진인은 무림의 대선배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을상인의 눈치를 보던 무무 진인이 먼저 나섰다.
연배도 그렇지만, 사건의 전개 순서상 자신이 먼저 말하는 게 맞았다.
점심때 있었던 일은 ‘총사에게 직보하겠다’며 입단속을 시켜 두었다.
구경꾼들에 의해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겠지만 아직 총사는 모른다.
이제 곧 그도 알게 될 테지만.
“그 일이 일어난 건 오늘 점심 무렵이오.”
무무 진인은 차분한 어조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때 뒷전에 있던 연적하가 나섰소. 그는.”
물 흐르듯 이어 나가던 설명이 잠시 주춤했다.
거기서 태을상인이 제압당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험, 그는 기찰대가 의도적으로 녹림을 무시했다며, 총사의 사과를 요구했소. 그를 찾아가 사과하지 않으면 녹림은 칠리하촌을 떠날 거라고…….”
“…….”
제갈승운이 황당한 눈으로 무무 진인을 보았다.
거기서 갑자기 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다.
“그러니까 두 분이 인과관계를 살피지 않아 화가 났는데, 저에게 사과하라고 했다는 거군요?”
제갈승운의 정확한 지적에 무무 진인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사께는 면목 없지만, 그렇게 됐소.”
제갈승운은 울컥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구태의연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녹림 총순찰 앞에서 그런 짓을…….’
이게 바로 칠파이문 원로들이 녹림을 보는 눈이다.
필요에 의해 도적들과 손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한마음 한뜻이 된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칠파이문과 녹림 사이의 벽이 너무 높다.
하지만 제갈승운은 두 장로를 탓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녹림과 한배를 탔지만, 강을 건너면 다시 적으로 돌아서야 하는 까닭이다.
적에게 불공정했다고 아군을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오히려 지금이 전진파와 점창파에게 점수를 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듣고 보니 두 분께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말실수를 가지고 후기지수들의 팔까지 부러뜨린 것은 심한 감이 있지요. 더구나 지금 같은 전시에는, 아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승운의 말에야 두 장로들의 얼굴이 펴졌다.
예기치 않게 휘말린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을상인이 넌지시 물었다.
“총사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오? 사과하지 않으면 녹림을 데리고 떠날 것처럼 굴던데.”
“그 부분은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연적하는 천지맹을 만들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파천마군의 후계자는 십이마군 아닙니까? 연적하보다는 십이마군의 의중이 더 중요할 겁니다.”
“그래도 총순찰이 어깃장을 놓으면 십이마군도 힘들지 않겠소?”
‘젠장!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연적하 앞에서 그런 짓을 했습니까!’
제갈승운은 부글거리는 속내와 달리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 문제는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십이마군이 녹림의 실세라면, 총순찰이라고 해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흠! 십이마군이 녹림의 실세다?”
연적하의 무위를 경험한 태을상인은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녹림만큼 무력을 앞세우는 집단은 없다.
칠파이문은 제갈승운의 판단에 따라 십이마군과의 관계를 우선시했다.
자신과 무무 진인이 연적하 앞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연적하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고, 녹림을 거론할 때 주저함이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 태을상인에게 제갈승운이 말했다.
“천지맹을 만들 때 녹림의 대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십이마군의 으뜸인 귀영자군입니다. 그가 실세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는지라 태을상인은 미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귀영자군과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제갈승운은 자존심이 있어 사과하러 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귀영자군 선에서 해결될 거라 믿었고, 그렇게 되길 바랐다.
***
현천각에서 나온 태을상인과 무무 진인은 한동안 말없이 마당을 걸었다.
멀리 정문이 보이자 두 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저어…….”
“그런데…….”
두 사람의 입이 거의 동시에 열렸다.
멈칫하던 태을상인이 무무 진인에게 먼저 말하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제갈 총사 말입니다. 상황 파악을 잘못하는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빈도도 그 점이 좀 의외였소. 지난번 마물 건도 그렇고, 신기수사라는 별호가 영 미덥지 않구려.”
“사방이 적인데 총사가 제구실을 못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제갈승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장로는 그를 믿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소? 대안이 없는 것을.”
“화용독심이 무불통지라고 하던데…….”
무무 진인이 말끝을 흐렸다.
남궁연의 나이가 삼십 대만 됐어도 자신 있게 추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 셋.
칠파이문에 속한 고수들의 평균 나이를 생각하면 어려도 너무 어리다.
남궁연의 이름이 나왔지만 태을상인은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불통지면 뭐하나. 나이 어린 여자인 것을.
***
칠리하촌.
기루 방심(芳心).
해시 초(오후 9시).
기루 가장 안쪽의 귀빈실에 이 남 이 녀가 마주 앉아 대작(對酌)하고있다.
두 기녀와 천지맹 총사인 제갈승운, 십이마군의 첫째인 귀영자군이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제갈승운은 기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대접받는 입장인 귀영자군은 묵묵히 제갈승운을 지켜보기만 했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 사람을 물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소?”
“실은 오늘 낮에 칠리하촌에서 작은 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시비요?”
귀영자군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물론 같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니 모를 리가 없지만 말이다.
“기찰대와 녹림 총순찰과 작은 마찰이 있었답니다. 그 일로 연 공자가 대로해서 ‘녹림을 데리고 떠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제갈승운이 슬쩍 귀영자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강호에서 닳고 닳은 귀영자군이 쉽게 속마음을 드러낼 리가 없다.
“허어! 그런 일이!”
단지 감탄사뿐, 귀영자군은 단 한 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답답해진 제갈승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 공자가 천지맹의 맹약을 깨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흥! 총순찰에게 맹약을 깰 권한 같은 건 없소. 총채주님이시라면 모를까.”
“역시 그런 게지요? 한시름 놓았습니다.”
“총순찰이 녹림과 함께 칠리하촌을 떠나겠다고 한 게 확실하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총사인 제가 그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했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죄라는 말까지 나온 거요?”
“청룡대의 후기지수들이 식사 중에 구천노도 심통과 연 공자에게 무례한 언행을 했답니다. 그 일로 심통이 후기지수들의 팔을 부러뜨렸고요. 칠파이문의 기찰대가 만류하는 과정에서 심통과 시비가 붙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본 연 공자는 기찰대가 녹림에만 책임을 전가한다고 화를 냈고요. 따지고 보면 사소한 일인데 다들 신경이 예민하다 보니…….”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제갈승운은 같은 내용임에도 최대한 칠파이문에 유리하도록 설명했다.
귀영자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로 수하들에게 전해 들은 것과 비슷했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말이다.
귀영자군의 안색을 살피던 제갈승운이 슬쩍 물었다.
“허면 녹림이 칠리하촌에 남는 것으로 알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다른 문제요.”
“예?”
“총순찰이 녹림을 데리고 떠나는 것과 맹약은 아무 관계가 없지 않소?”
“관계가 없다고요?”
“천지맹의 맹약은 ‘정파와 녹림이 힘을 합쳐 유명교와 싸운다’ 아니오? 녹림은 칠리하촌을 떠나서도 유명교와 싸울 것이오. 그러니 맹약을 깨는 게 아니라고 할 수밖에.”
“그건 설마, 녹림이 연 공자를 따라갈 거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소. 총순찰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와야 하는 게 우리의 규칙이오.”
“십이마군도 그의 지시를 따른다는 말씀입니까?”
“푸헐! 십이마군은 녹림이 아닌 줄 아시오? 총채주님 다음이 총순찰이오. 우리 십이마군은 그저 총채주님의 제자일 뿐이외다.”
순간 제갈승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개만도 못한 놈! 천지맹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파천마군의 대리인인 것처럼 굴더니!’
그제야 제갈승운은 자신이 지금까지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그러면, 연 공자는 왜 천지맹의 조직을 구성할 때 나타나지 않은 겁니까?”
“그 빌어먹을, 아니, 그는 귀찮은 일을 싫어하오. 그래서 내가 대신 나섰던 거요.”
“…….”
멍하니 앉아 있는 제갈승운에게 귀영자군이 말했다.
“그가 사죄하라고 했으면 빨리 찾아가 사죄하는 게 좋을 거요. 그놈, 아니, 그에게 칠리하촌을 떠나는 건 고민거리도 아닐 테니까. 최악의 경우, 정말 천지맹이 깨질지도 모르오.”
“설마 칠파이문과 파천마군의 맹약을 그가 깰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갈승운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순간 귀영자군이 어깨를 들썩이며 푸들푸들 웃었다.
“크크큿. 맹약? 총채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에게 녹림의 칼자루를 맡긴다고 하셨소. 당신도 머리가 있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게요. 녹림이 천지맹에 합류한 것도 그가 결정한 거요. 이제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소? 기찰대 조장들이 밟은 건 아주 큰 똥이오. 그걸 온몸으로 잘 닦아 내야 하는 게 당신이고. 자아, 속 쓰린 얘기는 그쯤 해 두고 오늘 밤은 실컷 취해 봅시다.”
귀영자군은 제갈승운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상대를 보고 있으려니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연적하를 건드리다니.
오랜 세월 마음고생할 그를 생각하니 술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연적하도 짜증 나지만 제갈승운도 그 못지않은 놈이라 그런 모양이다.
***
칠리하촌.
동편 산기슭의 작은 집.
늦은 밤.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이던 연적하가 물었다.
“심 노인. 아까는 왜 그랬어?”
“아까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화로 잘 풀어도 되는데 기찰대 장로들에게 싸우자고 했잖아. 과거의 구밀복검답지 않게 말야.”
“저도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을상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뭐가 확 치밀어 오르지 뭡니까.”
“왜?”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럼 안 되지. 하여튼 그 사람들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제 말이요!”
두 사람은 늦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소리는 조손(祖孫) 간의 대화 같은데, 할아버지 쪽이 혈기가 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