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0
260회. 내 머리는 장식인 줄 알아?
칠리하촌.
기루 초연(招延).
천지맹이 발족하고 난 뒤에 흥한 곳을 꼽으라면 기루다.
과거 정의맹 시절에는 손님이 없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사파와 합친 뒤로 무림인들로 미어터졌다.
무림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 역시 대낮부터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들이 바글거렸다.
대부분 사파 고수들이었지만 드문드문 정파와 정사지간의 고수들도 보였다.
기루의 한쪽 구석.
두 늙은이가 이삼십 대 기녀들을 옆에 끼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구천노도 심통과 무영신투 백교다.
주로 심통이 떠들고 백교는 장단을 맞추기에 급급해 보였다.
한창 녹림 산채를 정리하고 다니던 일을 떠벌리던 심통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서, 백 형은 그간 어떻게 지냈소? 얼굴을 보니 영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과거에 함께 지낸 정이 있어서 심통은 ‘백 형’이라 불렀다. 백교가 황송한 얼굴로 답했다.
“말도 마십시오. 그때 저와 함께 적풍채로 갔던 놈들을 기억하십니까?”
심통은 그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염사웅은 그해 칼에 맞아 죽었고, 천일보는 지난해 화살에 눈을 맞아 애꾸가 됐습니다. 눈만 멀쩡했으면 함께 왔을 텐데, 지금 산채를 지키고 있지요. 저도 보다시피 상태가 썩 좋은 건 아닙니다. 평정산을 지나가는 상방이 확 줄어들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형편이랄까.”
“저런, 쯧쯧!”
심통이 안 됐다는 듯 혀를 찼다.
그날 백교와 함께 적풍채로 옮겨갔더라면 자신도 그와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 앞날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개명을 하신 겁니까? 구천노도 심통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허허. 심 형이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다면 저도 남을 걸 그랬습니다.”
“나도 종종 백 형 생각이 나더이다.”
서로 심 형, 백 형이라 부르면서도 두 사람의 말투는 달랐다.
심통은 전처럼 하오체를 썼지만 백교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녹림에서 구천노도 심통의 위치였다.
“이번에 저희 인대(人隊)가 주작대와 함께 호두산으로 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소.”
“십두마병이 대체 뭡니까?”
백교가 심통을 힐끔거렸다.
사실 없는 돈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십두마병의 실체가 궁금해서다.
전해 들은 것만으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초열마인이니, 일각마인이니, 마룡이니 해 대는데 그게 말인지 방귀인지…….”
백교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심통이 말했다.
“보면 알 게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그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같은 소리를 다시 할 생각이 없었다.
백교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주책을 봤나. 기껏 십두마병에 대해 묻고는 헛소리로 대답을 막았구나.’
심통의 심드렁한 얼굴을 보니 다시 묻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지자 기녀들이 눈치 있게 끼어들었다.
“나리님들, 목도 좀 축여 가면서 말씀들 나누셔야지요.”
“유명교는 나리님들을 만나면 맥도 못 출 거예요. 요리가 비는데 더 시켜도 될까요?”
그 와중에 백교 옆의 기녀는 매상 올릴 궁리만 했다.
괜히 민망해진 백교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래! 까짓거! 오늘 배 터지게 먹어 보자! 더 시켜. 아예 탁자를 꽉꽉 채워 보거라.”
“어머, 화끈하시다. 그럼 제가 얼른 주방에 가서 주문하고 올게요.”
백교를 시중들던 기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멋쩍은 얼굴로 수염을 매만지던 백교가 지나가듯 말했다.
“심 형, 혹시 독립할 생각 없으십니까?”
“지금 나에게 산채의 주인이 되라는 거요?”
“심 형께서 깃발을 올리신다면 이 몸은 그 아래 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흐흐흐. 적풍채 생활이 어지간히 힘든가 보구려. 그런 객쩍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하아! 솔직히 죽겠습니다. 염라도부 장한위의 탐욕을 견뎌 낼 재간이 없습니다.”
“사정은 안됐지만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소.”
“그래 봐야 용의 꼬리가 아닙니까? 그보다는 뱀의 머리가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러자 돌연 심통은 양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리며 앞으로 뻗었다.
“틀렸소. 나는 용의 꼬리가 아니라 머리 아래 달린 앞발쯤 되오. 백 형은 머지않아 내가 이 두 손으로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걸 보게 될 거요.”
“허! 이제 보니 큰 뜻을 품고 계셨군요. 혹 제가 심 형을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백교가 은근한 눈으로 심통을 보았다.
적풍채의 고된 생활에 지친 그는 옛날처럼 심통과 함께 뭐라도 해 보고 싶었다.
“없소. 지루한 얘기는 그쯤하고 술이나 먹읍시다.”
심통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달아난 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과거의 인연과 공짜 술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시 말(오후 3시).
백교와 헤어진 심통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호두산의 출정을 앞두고 있지만 심통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혼자 힘으로 십두마병을 처리할 수 있게 되어 그런 것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서던 심통이 흠칫 놀란 눈으로 정면을 보았다.
오전에만 해도 생생하던 연적하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흑수선이 모든 걸 망쳤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연 누님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어.”
“그래서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 말을 듣고 연 누님이 불편한 얼굴로 있다가 갔으니 문제지. 그게 잘된 건 아니잖아.”
“혹시 누굴 좋아하는지도 말씀드렸습니까?”
“내가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바보인 줄 알아? 나도 생각이란 걸 하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는 건 결국, 공자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만 말한 거네요?”
“연 누님처럼 고아한 분 앞에서 그런 저속한 말을 했으니 화낼 만도 하지. 내가 흑수선이 언제고 큰 사고를 칠 줄 알았어. 왜 하필 연 누님에게 그런 소리를 해 가지고!”
연적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점입가경이라더니, 기가 막힌 심통은 연적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적하나 남궁연이나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서는 수준이 비슷한 것 같다.
‘쯧쯧!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면 다 풀릴 것 같은데 뭘 저렇게 굽이굽이 돌아가는지 원.’
보다 못한 심통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제가 월하노인(月下老人)의 일을 좀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월하노인이 뭔데? 밤중에 누구 집 담을 넘겠다는 소리야?”
“흐흐. 그건 도둑놈이고요. 남자와 여자를 맺어 주는 사람을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심통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연적하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괜히 일 벌일 생각하지 마. 난 흑수선보다 심 노인이 더 무서워.”
“공자님, 제가 예전에 구밀(口蜜)이라 불리던 사람입니다. 믿어 주십쇼.”
“하지만 알고 보니 복검(腹劍)이었지. 누구 인생을 절단 내려고 그래? 집어치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한 떼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몰려왔다.
연적하와 심통은 거의 동시에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적풍채 도적들의 잔뜩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뒤늦게 연적하와 심통을 발견한 적풍채 도적들이 일제히 허리를 접었었다.
“총순찰님! 안녕하셨습니까!”
곧이어 잔뜩 흥분한 적풍채 채주 장한위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총순찰님! 정파 놈들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정파 기찰대 놈들이 쳐들어와서 제 수하를 잡아갔습니다!”
“왜 또 무슨 사고를 쳤는데?”
“사고 같은 게 아닙니다. 제마대의 술사 하나가 어디서 법보를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그걸 제 수하가 훔쳐 갔다면서 끌고 간 겁니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왜 적풍채 사람을 끌고 가? 그 사람이 누군데?”
“백교라는 늙은이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심통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자산과 술을 마시고 가더니 바로 잡혀 간 모양이다.
하여간 바람 잘 날이 없는 사람이다.
“백교?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심 노인, 그가 누군지 알겠어?”
“공자님께서 배신자라고 부르던 늙은이 아닙니까. 무영신투 백교요. 오봉산채에 있다가 적풍채로 간.”
“아! 그 치사한 도둑놈?”
그제야 연적하는 백교가 누군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장한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지난번에 총순찰님께서 천지맹 총사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또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무조건 녹림 짓이라고 하니 아주 돌아 버리겠습니다.”
연적하가 애매한 눈으로 장한위를 보았다.
무영신투라는 별호대로 백교는 손버릇이 나쁜 도둑이었다.
심지어 오봉산채의 도적들도 그와 지내는 동안 많은 물건을 도둑맞았다.
솔직히 자신이라 해도 백교를 의심할 것 같았다.
“장 채주, 그 법보라는 거 말야. 백교가 훔쳐 가지 않은 게 확실해?”
“그게, 또, 그러니까, 일단 자기 말로는 아니라고 하니 믿어 줘야……. 험.”
장한위는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자신도 백교의 결백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난 것은 채주인 자기 앞에서 저들 마음대로 백교를 끌고 가서다.
“그러니까, 백교는 아니라고 하는데, 기찰대가 끌고 갔다 이거네?”
“예. 그렇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에이, 법 같은 소리는 하지 말고. 언제 우리가 법 따지고 살았어?”
“아, 예. 송구합니다.”
장한위는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도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하지만 총순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까닭이다.
그는 연적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뭉개진 백교가 적풍채에서 연적하의 험담을 엄청나게 늘어놔서다.
그 바람에 장한위는 연적하를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궁연의 일로 속을 끓이던 연적하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 버릇 못 고친다고 총사가 잘못했네. 백교가 손버릇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무작정 그러는 건 아니지.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암요. 그건 총순찰님과 녹림을 무시한 행동입니다.”
장한위가 옆에서 장단을 맞췄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심통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남에게 매 맞고 개 옆구리를 찬다더니……. 딱 그 짝일세.’
남궁연 문제로 끙끙 앓더니 총사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도리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법보를 되찾고 도둑을 잡으려면 남궁연의 도움이 필요한 까닭이다.
심통이 넌지시 말했다.
“공자님, 백교의 말을 믿으십니까? 자칫 잘못하면 역으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남궁 소저를 먼저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간 활화산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연적하가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심통의 말이 맞다.
천생 도둑인 백교의 말만 믿고 총사에게 쳐들어가기에는 왠지 불안했다.
‘출정까지 이제 고작 사흘이 남았는데 그 전에 해결할 수 있을까? 누님이라면 가능할지도…….’
‘아니야.’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남궁연을 끌어들였다가 지지부진해지면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요즘 개나 소나 총사를 욕하는 것처럼 말이다.
“총순찰님?”
“공자님?”
장한위와 심통이 번갈아 가며 연적하를 불러 댔다.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연적하가 버럭 소리쳤다.
“아 진짜! 나도 생각이란 걸 좀 하자! 내 머리는 장식인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