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69
269회. 공교롭군, 정말 공교로워
환우검 선우담의 요청에 화용독심 남궁연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호두산에 불을 지르면 유명교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산에서 내려올 거예요.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치면, 비록 우리가 열세라 해도 우위에 설 수 있어요.”
‘헉!’
선우담은 그제야 ‘욕을 먹고 살아남는다’는 말의 뜻을 알았다.
호두산에 불을 지르면 인근 백성들에게 지탄받는 건 당연한 일.
더 나아가 황실에서 죄를 물을 수도 있었다.
‘진정 무서운 아가씨로다.’
저건 그야말로 국가 간의 전쟁에서나 쓸 수 있음 직한 전술이 아닌가 말이다.
그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궁연이 두려우면서도 탐났다.
놀라기는 검왕 남궁벽도 마찬가지다.
산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산자락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직결된 일인 까닭이다.
더구나 불이 번지면 그 후과는 감당할 수조차 없다.
불길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일이 잘못되면 무림 방파 간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연아, 집에 불을 질러도 중죄인데 하물며 호두산은 황실의 재산이다. 방화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면 황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그런 걱정도 살아남은 뒤에야 할 수 있는 거예요.”
“…….”
남궁벽은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맞다.
고민은 산 자의 몫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죽느냐 사느냐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어차피 욕을 먹더라도 살아남기로 한 이상 결과는 이미 정해졌는지 모른다.
“어찌하면 되겠느냐?”
남궁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 때, 최대한 넓은 지역에 불을 놓아야 해요. 경신술의 고수가 그 일을 해 준다면 더 효과적이겠죠. 주작대와 인대는 적들이 하산할 지점, 즉 북쪽에 잠복하고 있어야 하고요.”
“불길이 호두산을 태우고 인근 마을까지 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녁에 내리는 비가 불길을 잡아 줄 거예요. 그 뒤로 하루 이틀쯤 꽃샘추위가 계속될 테니, 노숙은 좀 불편하겠네요.”
“비가 내릴 거라고?”
남궁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려서부터 딸은 날씨의 변화를 기가 막히게 예측하곤 했다.
딸이 말했으니 비는 올 것이다.
선우담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남궁연과 남궁벽을 번갈아 보았다.
‘허! 제갈량이 아니고서야 그걸 어찌 안다고…….’
하지만 남궁연의 재능을 생각하면 영 허튼소리로 들리지도 않았다.
“남궁 소저, 설마 화공을 제안한 것도 비가 내릴 줄 알고 그런 것이오?”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도 같은 소리를 했을 거예요. 우리가 살 길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아!”
선우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아가씨의 지혜와 담력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궁연을 본가의 며느리로 맞이해야 한다.’
오십 년만 젊었어도 자신이 죽자사자 쫓아다녔을 것이다.
선우담은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며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그때 남궁벽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조호이산지계를 사용할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호두산에 불을 지를 경신술의 고수가 필요하오. 그 일에 자원할 사람이 있소?”
“…….”
주작대와 인대 고수들은 남궁벽의 시선을 피했다.
후환이 두려워서다.
방화로 세간에 욕먹는 건 감수할 수 있지만, 황실에 찍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남궁벽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의 인심이 이렇다.
책임질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제가 할게요!”
연적하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정사파 고수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맙구나.”
남궁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적하의 무위라면 어지간한 고수 열 명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이었다.
“아버지, 아니, 대주님 저도 하겠습니다!”
남궁천도 힘차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남궁벽은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경신술이 부족해 이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남궁천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부친의 말마따나 검술이라면 몰라도 경신술은 그저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천의 행동은 다른 사람을 자극했다.
향산산채의 채주 무영비마 방비진이 입술을 질겅 씹었다.
‘저런 애송이도 지원하는데…….’
녹림에서 경신술의 고수로 알려진 자신이 몸을 사리면 평생 손가락질 당하리라.
“내가 하겠소.”
군웅들의 이목이 일제히 방비진에게로 향했다.
남궁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무영비마의 경신술은 하남에서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청해도 부족할 판에 스스로 해 주겠다고 나서 주니 고마울 뿐이다.
“고맙소. 부탁하리다.”
무영비마 이후로는 더 자원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남궁연은 연적하와 방비진을 데리고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풍향과 시간을 정해 주고 먼저 떠나보냈다.
***
호두산.
왕호산장.
신시 초(오후 3시).
백두마군 혼천혈귀 강상피는 십두마병이자 서안 최고수인 냉혈마도 태경림을 불러들였다.
“당주님, 부르셨습니까?”
“천지맹 떨거지들이 낙양으로 오고 있다는데, 아는 바가 있느냐?”
“금시초문입니다만,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 그러겠습니까?”
“무산낭랑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하오면 수하들을 보내 조사를 할까요?”
“그럴 것까지는 없다. 너도 알다시피 호두산은 백마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우리를 지나지 않고는 낙양에 갈 수가 없는데 뭐하러 진을 뺀단 말이냐?”
“하오면?”
“산 주변이나 잘 둘러보게 해라. 수상쩍은 놈들이 기웃거리지는 않는지.”
“예.”
“그리고 여자들 말인데…….”
강상피가 말끝을 흐리자 태경림이 냉큼 답했다.
“필요하시면 더 잡아 오겠습니다.”
강상피는 여색을 밝히는 마두다.
그를 위해 아녀자들을 잡아 오는 게 최근 태경림의 주된 임무였다.
“늙은이들은 좀 걸러 내고, 싱싱한 애들로 데리고 오거라.”
“늙은이라 하심은?”
태경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십 대 이상은 상납한 적이 없는데 늙은이라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허! 회춘에 효험이 있으려면 이십 대도 아슬아슬하느니라. 하물며 한풀 꺾인 삼십 대와 잠자리를 해서 뭘 얻을 게 있다고.”
“아, 예.”
그러니까 어린애들로 데려오라는 소리였다.
나이가 어려 그냥 내버려 둔 여아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장신촌이었던가.’
태경림이 한창 호두산 인근 마을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다.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누군가 외쳤다.
“당주님! 불입니다! 호두산에 불이 났습니다!”
깜짝 놀란 강상피와 태경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산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듣기 싫은 가장 끔찍한 소리가 산불이다.
우당탕 쿵쾅.
강상피는 문짝을 부술 듯 열고 마루로 뛰쳐나갔다.
과연! 왕호산장을 중심으로 삼면에서 희뿌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강상피는 태경림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이놈! 그래서 내가 입산을 금지시키라 하지 않았더냐!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분명히 인근 마을에 주의를 주었습니다. 약초꾼들도 오지 않았는데…….”
“그럼 저 불은 뭐냐! 귀신이 불장난이라도 했다는 거냐!”
연기가 점점 짙어지자 강상피의 얼굴에 핏줄이 섰다.
내막을 알 리 없는 태경림은 고개를 떨구고 강상피의 화가 가라앉기만 기다렸다.
발을 동동거리며 ‘씨발씨발’해 대던 강상피가 말했다.
“수하들을 보내 불을 꺼라!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이면 바로 달려와 보고하라 하고!”
“예!”
태경림은 황급히 강상피의 면전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 왕호산장에서 백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산 아래로 내달렸던 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채 일각(1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아직 정문에 서 있는 태경림에게 말했다.
“호법님! 강풍이 불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화전민들은 벌써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고요. 우리도 산장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북쪽만 조금 괜찮고 삼면이 불바다입니다!”
“이런 제길!”
화가 치밀어 오른 태경림이 기둥을 후려쳤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정문 한쪽의 축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치 없는 수하 하나가 말을 보탰다.
“저어, 연기가 더 짙어지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닥쳐!”
태경림의 호통에 찔끔 놀란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태경림은 그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알아! 새끼야! 누군 눈이 없는 줄 알아! 이까짓 산불에 뭘 그렇게 쫄아서 지랄이야!”
퍽. 퍽. 퍽.
태경림의 주먹질은 사내가 쓰러지고 나서야 멈췄다.
백오십여 명의 유명교 고수들은 입을 꾹 다물고 지시가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태경림은 아무 말도 없이 쌩하니 돌아서 산장 안으로 사라졌다.
메케한 연기가 서서히 왕호산장을 뒤덮었다.
반 각(약 7분)이나 지났을까?
안채로 갔던 태경림이 강상피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들 뒤로 산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잡혀 온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상피가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북쪽이 그나마 괜찮다니 그쪽으로 하산해라. 가다 보면 우장신촌이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겠다. 모두 떠나라.”
“존명!”
자욱한 연기 속에서 유명교 고수들이 큰 소리로 답했다.
곧이어 백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흩어졌다.
밀려오는 메케한 연기를 흩으려 손을 흔들던 강상피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지옥이 따로 없구먼.”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젓던 강상피가 멈칫했다.
문득 천지맹이 떠올라서다.
“공교롭군, 정말 공교로워.”
“무슨 말씀이신지요?”
“천지맹 이야기를 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났으니 하는 말이다.”
“입만 열면 백성을 위한다고 떠들어 대는 자들이니 아닐 것입니다. 그자들은 황실이 두려워서라도 불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강상피는 조금 찜찜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이 정도 불은 고양이를 무는 것을 크게 넘어선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수하들은 항상 십두마병을 중심으로 뭉쳐 다닌다.
그 십두마병이 무려 일곱.
처음 열 명을 데리고 왔지만, 셋은 얼마 전 은밀히 팔황의 뒤에 붙였다.
‘고작 이백여 명의 숫자로 그들을 당해 낼 수는 없지.’
천지맹이 모두 몰려온다면 혹 모를까? 그 전에는 어림도 없었다.
“당주님, 연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습니다. 하산길이 가려질 수 있으니 그만 가시지요.”
태경림의 재촉에 강상피는 아쉬운 얼굴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유명교 고수들이 모두 사라지자 일꾼과 여자 들도 허겁지겁 달아났다.
***
강상피의 생각대로 유명교도들은 십두마병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건 불길을 피해 달아나는 촉박한 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십두마병 거력패도 옥계생은 도갑을 휘둘러 잔나무를 쳐 내며 아래로 내달렸다.
아직 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욱한 연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연기가 조금 덜하다고 느낀 그가 ‘푸하!’ 하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쉴 때다.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와. 오랜만에 가슴이 설레는 걸 보니 십두마병 같은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