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1
281회. 호가호위(狐假虎威)도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
같은 시간 기루 초연(招延).
기녀들이 시중을 드는 기루는 청루와 홍루로 나뉜다.
청루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판다면 홍루에서는 몸과 웃음을 판다.
초연은 청루다.
당연히 그곳의 기녀들은 시서예악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현실은 그냥 손님들 말상대나 해 주는 정도였다.
실제 금을 연주하는 이들은 전문 악사로 주인이 따로 초청하곤 했다.
구천노도 심통이 기루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무영신투 백교를 이곳에서 만난 뒤로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생김새도 쓸 만하고 말도 제법 통하는 기녀가 있어서다.
심통을 알아본 주인 차중래가 부리나케 입구로 달려갔다.
“아이고! 심 어르신, 어서 오십시오.”
심통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기루 안쪽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가 월아를 찾고 있음을 안 차중래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어쩌지요? 월아는 지금 손님 방에 들어가 있습니다요.”
심통이 못마땅한 눈으로 차중래를 보았다.
보통 때는 알아서 데려다주더니 오늘은 어째 그러지 않을 모양이다.
차중래가 곤란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늘 오신 손님 중에 녹림의 높은 분이 계신데, 그분이 월아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말입니다.”
“높은 분?”
“예, 십이마군 님들 중에 첫째이신 귀영자군 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쩝.”
귀영자군이라는 말에 심통은 돌아섰다.
술자리에서 파천마군의 제자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서다.
최근 녹림도들 사이에서는 구천노도와 십이마군 중에 누가 더 강한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건 녹림의 대마두인 십이마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한 비교였다. 녹림에서 심통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심통 역시 그런 십이마군들의 마음을 알기에 가급적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순간 화들짝 놀란 차중래가 심통의 옷깃을 잡았다.
“어이쿠! 어르신.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가시면 제가 몹쓸 놈이 되고 맙니다요. 저희 기루에서 가장 유명한 금아에게 나으리를 모시라고 하겠습니다. 월아보다 미모나 재능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니 한번 자리를 같이해 보시지요.”
차중래는 최근 단골이 된 심통을 위해 자신이 가진 최고의 패를 내밀었다. 심통의 씀씀이가 크고 점잖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금아? 그 금을 잘 타는 아이 말이냐?”
“예, 예. 보통은 연주만 시키는데 오늘은 나으리의 시중을 들라고 하겠습니다.”
차중래의 제안에 솔깃해진 심통은 슬그머니 다시 돌아섰다.
금아는 초연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로 먼발치에서 그녀의 연주를 듣곤 했었다.
연주만 하는 예기(藝妓)라 생각했는데 옆에 앉혀 준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다.
“금아라 하옵니다.”
흡사 난초를 보는 것처럼 단아한 미모의 기녀가 들어와 공손히 인사했다.
금아를 가까이서 본 심통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본래 남자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여자를 탐한다.
특히나 녹림도에게 여자는 욕정의 대상에 불과하다.
구밀복검으로 불리던 시절의 심통도 여느 녹림도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구천기를 연성한 뒤로 심통은 조금 변했다.
구천기 특유의 허허로움은 활활 타오르는 욕정을 순정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지금 심통의 미소는 어딘지 순후해 보였다.
감정은 상대적이다.
심통의 그런 마음은 금아에게도 전해졌다.
녹림 대마두의 시중을 들게 돼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금아는 내심 놀랐다.
심통에게서 정파의 협객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편안함이 느껴져서다.
두려움이 사라지자 금아는 성심성의껏 심통을 모셨다.
그녀는 명가의 자제에게 하듯 갈고닦은 시서예악을 풀어놓았다.
심통은 그녀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냥 분위기를 즐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오가는 법.
어느덧 대화는 신변잡기(身邊雜記)로 넘어갔다.
“……소녀의 고향은 낙양이옵니다. 이양현에서 자랐지요.”
“이양현이라고? 알고 보니 동향 사람이었구먼.”
심통이 반색을 했다.
자신도 이양현 출신인 까닭이다.
“어머, 정말요?”
“그렇다마다. 어릴 때는 낙하(洛河)에서 물고기도 잡아먹고 그랬느니라.”
“어머! 그러셨구나. 지금까지 살면서 동향 분은 처음이에요.”
어찌나 반가운지 극존칭을 쓰던 금아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었다.
“흐흣! 나도 네가 처음이다. 이양현에서 정주라…….”
심통이 금아의 옆모습을 힐끔 보았다.
가까운 낙양이 아니라 정주까지 온 걸 보면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본래 소녀의 아비는 금와상방의 행수였어요. 무남독녀인 저를 애지중지하셨지요. 덕분에 어릴 때부터 금 선생에게 금을 배웠어요.”
“그래서 금 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구나.”
“어느 날 금와상방에서 고가의 물건이 사라졌는데, 소녀의 아비가 누명을 쓰고 잡혀갔답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옥사를 하셨지요. 그 뒤로 재물은 물론 집까지 빼앗기고 쫓겨나듯 이양현을 떠났답니다.”
“저런.”
“금와상방 사람들 때문에 낙양에서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정주까지 오게 되었지요. 그러다 몇 해 전 어머니가 덜컥 앓아눕게 되었고, 소녀가 이렇게…….”
“쯧쯧!”
심통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행수의 딸로 곱게 자란 금아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애고, 제가 괜한 이야기로 분위기만 망쳐 놓았네요. 죄송해요. 원래 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어르신께서 동향 분이고 편하다 보니 그만…….”
“아니다. 잘 들었다. 오랜만에 고향 생각도 나고 좋았다. 그럼 집에는?”
“어머니가 혼자 계세요.”
“아직도 아프고?”
“네. 거동이 불편해서 하루 종일 방에만 계세요.”
“돌보는 사람은 있느냐?”
“아니요. 이곳에서 버는 돈으로는 약값을 대기도 빠듯해서요.”
“그랬구나.”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다.
방문 밖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기물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통과 금아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차중래는 소란이 일어나자 허둥지둥 복도 안쪽으로 달려갔다.
부서진 방문 위에 기녀 월아가 쓰러져 있었다.
뒤이어 두 중년인이 인상을 팍팍 쓰면서 방에서 걸어 나왔다.
귀영자군과 학산산채 채주 시산마도 혁무춘이었다.
마침 차중래를 발견한 혁무춘이 대뜸 욕을 퍼부었다.
“너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아! 계집들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리 개판이냐!”
“어이쿠! 나으리, 우리 월아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저년이 감히 우리 귀영자군 님과의 잠자리를 거절했다. 감히 기녀 따위가!”
“헉! 나으리님들, 저희 기루는 입구에 청등이 달려 있습니다. 청루라고 알리는 표시이지요. 청루의 기녀들은 몸을 팔지 않습니다.”
상대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차중래는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혁무춘이 냉소를 쳤다.
“흥! 그딴 시답지 않은 소리는 집에 가서 하고. 누구라도 우리 귀영자군 님이 원하면 가랑이를 벌려야 한다. 심지어 네놈 마누라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감히 기녀 따위가 거부를 해? 그렇게밖에 교육을 못 시킨 거야? 어?”
말과 함께 혁무춘은 차중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억’하는 소리와 함께 차중래가 뒤로 날아갔다.
뒤에 서 있던 기루의 호위무사들이 급히 쓰러진 차중래를 부축해 일으켰다.
“끄응…….”
신음 소리와 함께 차중래가 눈을 끔뻑였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차중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기녀들과 손님들은 겁을 집어먹고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건 기루 호위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녹림 채주와 십이마군의 일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아! 이 일을 어쩐다.’
차중래가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다.
씩씩거리던 혁무춘이 차중래를 부축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에게 다가갔다.
“너 이놈들! 어디 소속이냐!”
“저희는 상무방에서……. 억!”
대답하던 무사 하나가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나뒹굴었다.
혁무춘은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차중래 근처에 있는 호위무사들을 개잡듯 두들겼다.
“너희 놈들은! 기루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엉? 감히 기루 주인이라는 놈이 십이마군님께 청루가 어떻고 홍루가 어떻고 씨부리게 만들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윽! 윽!”
“악!”
세 명의 호위무사를 짓밟던 혁무춘이 갑자기 차중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이놈. 다시 말해 보거라. 월아라는 년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덜덜 떨며 지켜보던 차중래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방문을 열고 누군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심통이었다.
금아가 심통의 뒤에 몸을 숨기듯 따라갔다.
심통을 발견한 혁무춘은 차중래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구천노도 심통?”
그러나 심통은 혁무춘을 무시하고 말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청루에 왔으면 술 시중이나 받고 마는 거지. 계집과 떡을 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홍루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니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으면 쓰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듣고 있던 혁무춘이 톡 쏘아붙였다.
“구천노도. 내 뒤에 계신 분이 누군지나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천하의 귀영자군 님이 원하시는 일이란 말이오!”
“어험. 귀영자군 님이 아니라 황상이라고 해도 주도(酒道)는 지켜 줘야지.”
“뭐라? 감히! 명성 조금 얻었다고 십이마군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혁무춘이 심통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그래도 그는 구천노도의 무위가 신경 쓰여서 칼은 빼 들지 않았다.
혁무춘의 주먹이 번개처럼 심통의 얼굴로 날아갔다.
하지만 심통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주먹을 피했다.
철썩!
찰진 소리와 함께 혁무춘이 뒷걸음질 쳤다.
모두가 눈 한 번 깜빡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귀영자군의 앞까지 밀려난 혁무춘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주룩.
그는 뜨거운 것이 윗입술을 타고 흘러내리자 손등으로 쓱 훔쳤다.
시뻘건 피가 손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런 씨벌.”
분노한 혁무춘이 칼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앞으로 튀어가려 할 때다.
굳게 닫혀 있던 귀영자군의 입이 열렸다.
“그만.”
“예?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끄응, 예.”
혁무춘은 감히 귀영자군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귀영자군이 무덤덤한 눈으로 심통을 보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그의 속에서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네놈이 십이마군의 일에 찬물을 끼얹어? 고작 구밀복검 따위가?’
심통의 과거를 아는 귀영자군은 이 모든 게 치욕스럽기만 했다.
“흐으. 심 노형. 기억해 두지. 호가호위(狐假虎威)도 오래가지는 못할 거야. 가자.”
말을 마친 귀영자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루를 떠나갔다.
혁무춘이 비릿한 시선으로 심통을 일견한 후에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이고! 어르신, 감사합니다. 덕분에 월아도 저도 살았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으리 정말 고마워요.”
차중래와 월아가 심통에게 나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심통은 귀영자군과 혁무춘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출입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호가호위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니?
노회한 심통은 그가 남긴 말에서 음험한 모략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