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2
282회. 심 노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아
천지맹.
의천각.
“십전무후의 생각은 어떤가?”
연적하의 평범한 대답에 실망한 무상도제 장무덕이 남궁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르신께서 팔황신모를 천두마왕이라고 느끼셨다면 그게 맞을 거예요.”
“음.”
장무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풍지산의 소문은 실종으로 인한 막연한 공포가 만든 것이라 큰 의미는 없다고 봐요. 그것과 팔황신모가 풍지산에서 하는 일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거예요. 팔황이 교주가 하는 일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까요.”
“아! 그도 그렇군.”
장무덕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남궁연의 설명을 들으니 마구 꼬인 문제가 하나둘씩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팔황신모가 풍지산에 남아 있는 것은……. 유명교와 팔황신모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직접 눈으로 봤다면 혹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자네 말이 맞네. 정보가 너무 적어서 뭐라 예측할 수 없는게 당연하지. 자네처럼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도 필요한 법이거늘. 쯧.”
장무덕은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는 매사에 너무 아는 척을 해서 문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엉뚱한 진단을 내리게 된다.
청운검 남궁천이 슬쩍 물었다.
“그럼 이후로 천지맹의 계획은 뭔가요?”
“이렇다 할 계획이 없네. 만약 천지맹 본진이 풍지산으로 움직이면 유명교가 뒤따라올 터인데, 그럼 앞뒤에 적을 두게 되는 터라.”
장무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병법을 조금이라도 알면 절대로 이런 상황에서 먼저 움직일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이네요?”
“그렇네. 그래서 모처럼 열린 정파의 회의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
“어르신. 유명교가 그처럼 강하다면, 천지맹에서 전쟁을 끌고 나갈 수 있습니까?”
“쉽지 않을 걸세.”
“허면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시는지요?”
“조만간 유명교와 협상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걸세. 어쩌면 지금쯤 한창 물밑 작업을 하고 다닐지도 모르지. 특히 녹림에서.”
장무덕이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뭔가 들은 게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의 시선에 연적하가 되물었다.
“녹림에서 그런데요?”
“그야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녹림의 총순찰이니까.”
“모르는데요?”
“자네를 두고 녹림의 실세라고 하던데, 실세가 모르면 되나.”
“제가 실세래요?”
연적하가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되묻자 장무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서 놀 인물 같지가 않아서다.
총순찰쯤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꿰고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떠돌이 삼류 낭인 수준이다.
“녹림에서 자네에게 따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없는가?”
“없는데요?”
“총순찰이라면서 그런 것도 없이 지금까지 잘도 녹림을 관리했구먼.”
“그런 게 필요해요?”
“이를 말인가. 뒤로 딴짓들 하고 다니는 걸 알아야 손을 쓸 수 있지 않겠나.”
“아,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괜찮다고?”
“제 앞에서만 허튼짓하지 않으면 돼요.”
“자기들끼리 일을 꾸며서 자네가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어찌하려고?”
“그때는 손 털고 나가면 되죠. 세상은 넓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화상촌에 객잔 하나 가지고 있는 거 아세요? 녹림보다 그게 훨씬 짭짤해요.”
“녹림이 자네에게 나쁜 일의 책임을 뒤집어씌운다면? 그래서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할 텐가?”
“그러지 못할걸요?”
연적하가 장담하자 남궁천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왜?”
“내 앞을 막으면 다 때려 부숴 버릴 거니까요.”
“푸하!”
남궁천은 대소를 터뜨렸다.
어린아이 같은 소리지만 왠지 연적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았다.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던 장무덕이 말했다.
“자네의 의기는 가상하나 본래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라네. 녹림 칠십이 채를 쉽게 생각하지 말게. 그들은 정의맹을 상대로 수백 년간 싸워 온 사람들이네.”
“제가 산채에서 깨달은 건데요. 나쁜 놈들은요, 상대가 수그리면 더 물어뜯어요. 될 대로 되라고 같이 막 때려 부수면, 손해 많이 보는 쪽에서 져 주게 돼 있고요. 저랑 녹림이 싸우면 누가 더 손해를 볼 것 같아요? 무조건 제가 이기는 싸움이라니까요.”
장무덕은 말이 통하지 않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과의 일을 어린아이들 싸움처럼 받아들이니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쯧! 녹림의 사정에 어두운 것 같아서 한마디 해 준 게 너무 엉뚱한 데로 튀었군.’
속으로 혀를 차던 장무덕은 마무리로 들어갔다.
“뭐, 녹림 쪽 일이야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옙!”
연적하는 드디어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저녁.
구천노도 심통은 평소와 달리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 연적하의 주변을 맴돌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흐흐.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말입니다.”
“뭐 할 말 있는 얼굴이구만. 말해 봐. 또 무슨 짓을 저지르고 와서 눈치를 보는 거야?”
마치 할아버지가 사고를 치고 온 손자에게 대답을 채근하는 모양새다.
머뭇거리던 심통은 낮에 기루에서 벌어진 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귀영자군이 떠나기 전에 호가호위(狐假虎威)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하지 뭡니까? 아무래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낮부터 기루에 갔다가 귀영자군이랑 말싸움을 했다는 거 아냐? 와아! 하다 하다 이젠 별짓을 다 하네. 뭐? 월아? 금아? 아휴! 진짜 내가 할 말이 없다. 심 노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아.”
“흐흐. 반로환동의 부작용 같은 거라고 생각하십쇼. 없던 힘이 불끈불끈 솟으니까 저도 좀 곤혹스럽습니다.”
“에라! 이 늙은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증손녀뻘 되는 여자들이랑 그러고 싶어?”
“공자님, 지금 중요한 건 월아나 금아가 아닙니다요. 귀영자군이 한 말을 생각해 보십쇼.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냄새는 심 노인 입에서 나고 있어. 안주로 뭘 먹은 거야? 왜 이렇게 지독해?”
“농담 아닙니다. 아무래도 귀영자군이 뒤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 노인.”
“예.”
“저승은 나이순으로 가는 게 아니야. 알지?”
심통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 사람이 먼저 갈 수도 있다’는 소리인 까닭이다.
“저어, 그건 공자님에게 불리한 말씀 같은데요?”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좀 들어. 마찬가지로 무위(武威)도 나이 순서가 아니라는 소리야. 귀영자군 아니라 십이마군이 똘똘 뭉쳐도 나한테는 안 돼.”
“귀영자군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만약 파천마군 님까지 연관되어 있다면요?”
“총채주님은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하려던 연적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는 무림의 사정에 어두워 파천마군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심 노인, 총채주님은 어떤 사람이야?”
심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분이시지요. 본인은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고 하시지만, 술자리서 농담 잘못했다가 그분에게 맞아 죽은 마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 내 앞에서는 실실 웃고, 농담도 잘하시던데?”
“예,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요. 그러다가 맞아 죽은 놈들이 많습니다.”
“와아. 장난 아니네?”
“파천마군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었겠습니까? 총채주님이 눈에 거스른다고 생각한 순간, 죽습니다. 지금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공자님 전임자도 그렇게 갔으니까요.”
“이전 총순찰이 총채주님에게 죽었다고?”
“예, 술김에 흑수선에게 껄떡거렸다가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지요. 유명한 얘긴데 모르셨습니까? 공자님도 흑수선과 너무 자주 어울리지는 마십쇼.”
“뭘 어울려. 흑수선이 가는 곳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지.”
“여하튼 총순찰도 단칼에 날려 버릴 정도로 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필요에 따라 나도 날릴 수 있다는 말이네?”
“그러고도 남지요. 귀영자군도 그걸 알고서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걸 테고요.”
“그걸 아는 사람이 요즘처럼 민감한 시기에 귀영자군과 싸워?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기녀를 두고?”
“험, 험. 주도(酒道)를 지키다 보니.”
“주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월아, 금아 때문이겠지. 가만? 이 늙은이가 어린 아가씨들을 둘이나 거느리고 다닌다는 거야?”
“기녀는 여자도 아니라면서 뭘 그렇게 질투를 하십니까?”
“질투가 아니야. 이건 거룩한 분노라고. 심 노인. 늙은이가 그럼 못 써.”
“예, 예, 언제나 제가 몹쓸 놈인 건 맞습니다요. 그런데 귀영자군의 일은 어떻게 할까요?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제가 은밀히 알아볼까요?”
“알아볼 인맥은 있고?”
“흐흐. 제가 칠리하촌에서 그냥 놀고먹은 게 아닙니다. 그간 아우로 삼은 놈들만 열 명이 넘습니다.”
“그럼 살짝 좀 알아봐. 멍하니 있다가 뒤통수 맞는 건 진짜 싫거든.”
“예, 맡겨만 주십쇼. 그래도 제가 한때는 구밀복검으로 불리던 놈입니다. 음모, 모략, 궤계 따위는 절대로 이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으흐흐흐.”
“아, 그 웃음소리나 좀 어떻게 해 봐. 나까지 진짜 나쁜 놈이 된 것 같다고.”
“흐흐흣!”
반항이라도 하듯 심통의 음산한 웃음이 더 커졌다.
***
다음 날.
천지맹에 장무덕이 남궁연을 찾아간 이야기가 퍼졌다.
의천각 주변에 있던 군소 방파들의 입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대화 내용이 궁금해진 칠파일문과 사대세가 대표들이 장무덕을 찾아갔고, 풍지산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총사는 팔황신모가 천두마왕이 되기 위해 머무르고 있다고 했지만, 남궁연은 다른 이유라 했다.
처음에는 총사의 의견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남궁연 쪽으로 돌아섰다.
뒤이어 ‘총사가 또 헛다리를 짚었다’는 말이 나왔다.
참다못한 제갈승운은 그날 오후 정식으로 천지맹의 회의를 소집했다.
통천각.
제갈승운은 속으로 이를 갈며 정사파 대표자들을 둘러보았다.
‘분명 팔황신모는 아직 천두마왕이 되지 못했다. 만약 그 마녀가 천두마왕이 되었다면 백마사에 가서 유명교를 지휘했을 것이다.’
아직 천두마왕이 아니라서 백두마군들 앞에 나서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 단순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니!
그는 군웅들의 단순함에 탄식하며 남궁세가 쪽을 힐끔 보았다.
모두가 저 ‘십전무후’라고 불리는 남궁연이 부추겨서 생긴 일이다.
‘오냐. 네년이 죽기를 원한다면 죽여 주마.’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제갈승운이 군웅들 앞에 나섰다.
“어제 우리는 무상도제 님에게 풍지산의 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명교 교주인 팔황신모가 왜 아직도 풍지산에 있는지를 논의했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천두마왕이 되기 위한 것이라 결론 내렸는데, 오늘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하더군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제갈승운이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를 슬쩍 보았다.
내부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지 다들 무덤덤한 얼굴들이다.
“저는 십전무후가 이런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겠다고요.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팔황신모가 왜 풍지산에 남아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제갈승운의 전향적인 변화에 정사파 고수들이 가볍게 술렁거렸다.
그가 이처럼 대놓고 남궁연을 띄워 준 적이 없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