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83
283회. 동고독락(同苦獨樂)이라는 말 몰라?
그때 통천각의 문을 열고 뒤늦게 한 사람이 들어왔다.
회의에 단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는 녹림 총순찰 연적하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정사파 고수들이 침묵했다.
그건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의 태도 변화만큼이나 군웅들의 이목을 끌었다.
제갈승운도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연적하는 십이마군의 여섯을 힐끔 본 후에 남궁세가 옆으로 태연히 가서 앉았다.
마치 자신이 녹림이 아닌 남궁세가의 일원인 것처럼 말이다.
‘뭐 하자는 거지?’
한순간 귀영자군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녹림의 대표가 남궁세가 쪽으로 가니 기가 막혔다.
이런 자리에서 남궁세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소리다.
귀영자군은 연적하의 그런 행동이 눈에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연적하는 구경하러 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몸을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정파와 사파의 자리는 대체로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자연히 십이마군의 여섯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두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연적하가 팔짱을 끼고 불쾌한 얼굴로 귀영자군만 집요하게 응시한 것이다.
그건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유를 모르는 귀영자군은 속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지만 왜 그러냐고 묻지 못했다.
연적하의 이상 행동으로 분위기가 묘해지자 제갈승운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 험. 그럼 계속해서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팔황신모가 왜 풍지산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십전무후가 말한 것처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제갈승운은 거듭 십전무후를 들먹였다.
풍지산이라는 말에 누구라도 십전무후를 떠올리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의 입에서 남궁연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군웅들은 그녀를 힐끔거렸다.
“……하여 풍지산을 염탐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임무는 매우 위험하니 적임자를 선발해야 할 것입니다. 팔황의 추적을 따돌릴 절정에 달한 무위와 술법, 그리고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할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해당하는 고수가 있다면 추천해 주십시오. 임무의 특성상 각 대의 대주님들은 제외하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총사와 의견을 조율한 맹주 무극상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사의 공지 대사는 갑작스러운 총사의 제안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총사의 말은 지금 염탐할 사람들을 선발하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위험한 일이지만 그것 외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팔황신모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이기도 하고요.”
“흐음.”
공지 대사는 약간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천지맹에서 할 만한 일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도 뭐하니 염탐이라도 하는 게 나으려나.’
공지 대사는 군웅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총사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공지 대사님, 이 건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오. 없소.”
공지 대사를 끝으로 아무도 염탐조 선발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천지맹의 정사파 고수들은 염탐조 구성에 한마음 한뜻으로 매달렸다.
가장 먼저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할 사람으로 남궁연의 이름이 나왔다.
술법 쪽으로는 곤륜삼선이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몇몇 고수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무위가 부족하여 선발되지 않았다.
청운검 남궁천이 자원했지만, 그 역시 같은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가 후기지수 중에 으뜸이었지만 절정에는 이르지 못한 까닭이다.
적임자가 부족해 제갈승운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다.
귀영자군과 혼자 눈싸움을 하고 있던 연적하가 말했다.
“그런 중요한 일에 녹림이 빠지면 안 되겠죠? 저기 귀영자군 아저씨와 심통과 나도 갈게요.”
순간 깜짝 놀란 귀영자군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헛! 총순찰, 그건 곤란하오. 나는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대번에 연적하의 말이 짧아졌다.
적의가 느껴지는 연적하를 보고도 귀영자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이 자리에서 밝히기 곤란하오.”
“지금 항명하겠다는 거야?”
연적하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귀영자군은 연적하가 살기를 풀풀 날리자 크게 당황했다.
‘아니, 저놈이 오늘 왜 저러지?’
칠리하촌에서 단 한 번도 그와 부닥친 적이 없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는 보란 듯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항명이 아니라…….”
“아니면 나랑 같이 가는 거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참 이상도 하지? 난 유명교 교주보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더 싫더라고. 마지막으로 물을게. 나랑 같이 갈래? 제삿밥을 먹을래?”
“……가겠소.”
결국 귀영자군은 꼬리를 내렸다.
매우 더럽고 불쾌했지만, 차마 연적하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녹림은 그럴 경우 가차없이 상대를 죽인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의 손에 죽은 마두들도 적지 않았다.
정파 고수들은 입을 쩍 벌리고 연적하를 보았다.
공개 석상에서 귀영자군과 같은 이를 협박하는 그에게 충격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제갈승운조차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굴릴 정도였다.
잠깐의 침묵은 무상도제 장무덕에 의해 깨졌다.
“나도 가리다. 풍지산에 대해 잘 아는 이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장무덕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지원자도, 추천을 받은 이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염탐조의 구성을 마치겠습니다. 염탐조는 따로 출정식을 갖지 않겠습니다. 자체적으로 조장을 선출하시고,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십시오.”
제갈승운은 빠르게 회의를 마무리 짓고 통천각을 떠났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군웅들의 눈치가 보여서 오래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통천각을 빠져나갔다.
여섯 마군과 녹림 채주들이 나가자마자 구천노도 심통은 연적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니, 공자님. 왜 귀영자군을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데려가면 안 돼?”
“딱히 안 될 건 없지만 그가 무슨 수작 부리는지 조사하라면서요?”
“어. 그런데?”
“은밀하게 뒤를 캐 봐야 하는데 그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시면 좀 그렇죠. 너무 눈에 띄잖습니까? 곧 녹림에 소문이 다 날 텐데.”
심통의 말에 남궁천이 슬쩍 끼어들었다.
“적하야, 귀영자군과 무슨 일이 있었느냐? 갑자기 왜 그의 뒤를 캐기로 한 거냐?”
“아, 어제요. 심 노인이 기루에 갔다가 그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더라고요.”
연적하는 간략하게 심통과 귀영자군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었어요.”
“아하! 그래서 아까 그렇게 귀영자군을 노려보았구나?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제가 그를 노려봤어요?”
연적하가 되묻자 심통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잡아먹을 듯 귀영자군만 보셨잖습니까? 공자님께서 그를 덮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내가 왜 그를 덮쳐?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심 노인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아?”
“그런데 회의 내내 왜 그러셨습니까?”
“귀영자군 면상을 가까이서 보니까 기분이 별로더라고. 그게 전부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싫다는데 왜 굳이 데리고 가시려고요?”
그러자 남궁천이 아는 척을 했다.
“혹시 ‘친구를 가까이하라. 적은 더 가까이하라’는 말을 실천한 거냐? 그거 쉽지 않은 일인데.”
“아유, 아니에요 형님. 그냥 꼴 보기 싫어서 고생 좀 시키려고 그런 거예요.”
“…….”
한순간 심통이 멍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꼴 보기 싫은 놈 고생시키려고 악착같이 끌어들였다니?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겠다.
“공자님, 꼴 보기 싫은 놈을 왜 억지로 끌고 다니면서 보려고 하십니까?”
“남겨 두면 질펀하게 놀러 다닐 텐데, 그런 놈을 두고 가라고? 안 돼. 동고독락(同苦獨樂)이라는 말 몰라? 고통은 싫어하는 사람과 나누고, 즐거움은 혼자 누려야 하는 거야.”
듣고 있던 남궁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적은 더 가까이하라’는 말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앞으로는 나도 동고독락 해야지.”
심통은 연적하와 남궁천을 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두 사람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동고독락이라니?
보기 싫은 놈이 있으면 치워 내면 될 일이지, 왜 수고스럽게 끌고 다닌단 말인가?
***
낙양.
백마사.
늦은 밤.
악불 방천각의 숙소에 세 백두마군이 모였다.
방천각과 적월 공취산, 그리고 혼세검마 척진경이다.
주로 방천각과 공취산이 말을 하고 척진경이 경청하는 모양새였다.
“교주님은 풍지산에서 나올 뜻이 없는 것 같소. 교주님이 오시면 천지맹쯤은 단숨에 요절낼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것 같소.”
방천각의 말에 척진경이 물었다.
“뭐가 사실이라는 거요?”
“평소 교주님은 ‘천하 제패에 관심이 없다’고 하질 않았소. 빈말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오.”
“흠.”
척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팔황신모는 천하에 뜻이 없어 보였다.
삼십 년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명만 내리면 천지맹 정도는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풍지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원.’
이번에는 공취산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교주님이 아직도 도복(道服)을 입고 있다 하더이다. 아직도 꿈같은 일을 좇고 있는 게요. 하지만 정사파가 우리를 무림 공적으로 선언한 이상, 교주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천하를 상대로 싸울 수밖에 없소. 그것이 현실인데 교주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소.”
그는 팔황신모를 ‘교주’라 칭하고 슬쩍 척진경의 안색을 살폈다.
무덤덤한 표정을 보니 역시나 교주 쪽은 아닌 것 같다.
방천각이 한마디 보탰다.
“지금의 유명교는 강남의 사교(邪敎)가 아니오. 천하인이 우리의 다음 행보에 주목하고 있소. 그런데 한가하게 득도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그러자 척진경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하시구려. 이 몸이 내세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건 두 분도 잘 아시지 않소?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공취산이 작심을 한 얼굴로 말했다.
“일찍이 진승(진나라 때 난을 일으킨 사람)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하지 않았소. 팔황신모만 천두마왕이 되라는 법이 있소? 누구라도 천두마왕이 된다면 천하를 발아래 둘 수 있을 것이오.”
이제는 대놓고 교주에서 팔황신모로 더 끌어내렸다.
하지만 척진경은 그걸 지적하지 않음으로 자신도 동조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하지만 천두마왕의 진언은 교주만이 알고 있지 않소.”
“교주의 손에서 그 진언을 빼내 올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소?”
“그게 가능하오?”
척진경이 관심을 보였다.
솔직히 교주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유명교는 그저 더 상승의 경지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우리는 가능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걸 만큼 무모하지 않소.”
그렇게까지 말하자 척전경은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어떻게?”
“그걸 들으면 검마께서는 무조건 우리와 손을 잡아야 하오. 그래도 알고 싶소?”
순간 척진경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운명의 기로에 놓였음을 알았다.
교주의 개로 남느냐,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를 선택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