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9
29회. 참석하라는 초대장이다.
구밀복검 심양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젠가 이름 모를 야산에서 백교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풍 채주를 따르는 놈들이 박대할 텐데 그걸 어찌 참으시려고.
-상관없소. 어차피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할 테니까.
-쩝, 그럼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나는 어린 연가 놈과 그 주변의 반편이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려서.
자신의 앞에서 찍소리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기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돌아온 거였다. 만약 이렇게 개망신당할 줄 알았다면, 백교와 함께 적풍채로 갔을 것이다.
심양각의 귓가로 풍연초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둥이가 있으면 말을 해 봐라! 대체 어떤 개후레자식들이 사해루에서 오봉십걸의 이름을 팔았는지! 왜 말을 못 해? 코 밑에 뚫린 건 똥구멍이냐?”
심양각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풍연초는 지금 ‘개후레자식들’이라고 했다. 그 말은 그날 사해루에 갔던 모두, 즉 자신도 해당된다는 소리다. 천하의 구밀복검이, 별호조차 없는 풍연초 따위에게 그런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이놈!”
심양각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도적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심양각을 바라보았다.
황요명은 제발 참으시라고 고개를 흔들기까지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연적하 앞에서 오봉십걸과 싸워서는 안 된다. 지랄맞은 연적하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으니 무조건 참아야 한다.
그런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심양각은 더욱 날뛰었다.
“네놈이 어디서 감히! 이 육시랄 놈의 새끼가!”
욕설과 함께 심양각의 몸이 날아갔다.
단숨에 황요명 앞까지 간 심양각이 번개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너지! 네놈이 감히 오봉십걸을 사칭했지! 왜! 왜! 왜 그런 짓을 했느냐! 갈기갈기 찢어서 육젓을 담가 먹어도 시원치 않을! 개만도 못한 놈아!”
퍽. 퍽. 퍽.
심양각의 주먹질에 황요명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 심양각은 지체 없이 발로 황요명을 짓밟았다.
심양각의 무자비한 발길질은 황요명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어느 순간부터 황요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심양각도 발길질을 멈췄다.
심양각의 눈에 언뜻 착잡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제 오봉산 제일봉에 올라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 새끼야. 연적하는 인외(人外)의 경지라 본좌도 어쩔 수 없다.’
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노도사가 천지상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둘이 제일봉에서 뭘 하는지 궁금했다.
겁이 났지만 몰래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천지상인이 검을 흔들자, 화답하듯 하늘에 태극이 나타났다.
놀랐지만 처음엔 단순히 도사들이 잘한다는 도술쯤으로 생각했다.
뒤이어 연적하가 허공에 박도를 휘저었다.
오봉산 제일봉 위 청천 하늘에 돌풍과 함께 거대한 청룡이 강림했다.
그제야 태극과 청룡이 도술에 의한 게 아님을 알았다.
도술이 아니면 대체 뭘까? 고민하는데 태극과 청룡이 어우러졌다.
청룡은 마치 여의주를 탐하듯 온몸으로 태극을 희롱했다.
두 개의 태극을 가지고 놀던 청룡이 그중 하나를 흘렸다. 아니, 정확히는 태극이 청룡의 발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태극과 청룡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
떨어진 태극이 바위 절벽에 닿는 순간, 집채만 한 바위가 부스러져 흘러내렸다.
그제야 천지상인이 보여 준 게 ‘무당파의 비기인 태극혜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단한 걸 가지고 놀던 연적하의 청룡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연적하와 천지상인은 천외천의 경지에 든 사람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두커니 서서 상념에 잠겨 있던 심양각의 귀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애들과 여자와 늙은이가 싫어.”
깜짝 놀란 심양각이 황급히 연적하를 향해 돌아섰다.
연적하의 눈동자에 증오가 가득 서려 있었다.
가는 곳마다 돌을 던진 애들과, 십 년간이나 그를 가둔 큰엄마 백미주, 그리고 모든 걸 알면서도 방치한 연씨 원로들을 향한 분노다.
심양각을 보고 있으면 왜 자꾸 연씨 원로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놀란 심양각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연 형님,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저놈들과 함께 사해루에서 식사를 한 것은 맞지만, 정말 사칭은 하지 않았습니다. 풍 채주님! 믿어 주십시오!”
어찌나 놀랐던지 평소 대놓고 무시하던 풍연초에게도 말을 높였다.
“늙은이, 알아서 잘 해. 한 번만 더 짜증나게 굴면 갈아서 촌장 밭에 거름으로 뿌려 버릴 테니까.”
살벌한 연적하의 경고에 심양각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소리쳤다.
“그럴 일 없습니다! 오봉십걸 형님들을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누구라도 형님들을 사칭하면 제가 찢어 죽일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이 순간 심양각은 마음을 비우고 오봉십걸의 아랫사람이 되기로 맹세했다.
심양각이 절하자 그를 따르던 도적들도 우르르 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풍연초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오봉산채의 서열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다.
***
천지상인은 석 달을 꽉 채우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조용히 산채를 떠났다. 그 기간 동안 오봉산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오봉산채가 관리하는 지역이 크게 넓어졌다.
다섯 개의 봉우리에서, 오봉산 인근의 야산까지 죄다 오봉산채의 구역이 됐다.
만수상방의 토벌 실패 이후로 더 이상 상방들은 오봉산채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상인당 은자 한 냥의 통행세를 내는 것은 물론, 어떤 상방은 산채에 선물을 올려 보내기까지 했다. 마치 칠파이문에 지역 상인이나 유지들이 선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타지의 상방이나 상인들과 시비가 벌어질 때를 제외하면 칼부림도 없었다.
점차 오봉산을 경유하는 길은 상인들에게 인기 있는 상로로 각광받았다. 사실 고가의 귀중품을 운반한다거나 취급하는 상품의 양이 많은 상인에게 은자 한 냥의 통행세는 푼돈인 까닭이다.
평화롭던 어느 날 오후.
한 중년 남자가 저무는 햇살을 받으며 산채로 올라왔다. 그는 입구에서 만난 도적들에게 자신이 녹림의 사자임을 밝혔다.
풍연초는 급히 연적하를 제외한 의형제들을 상화각으로 불러들였다.
상석에 앉은 녹림의 사자 음풍묘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녹림 총재주이신 파천마군 님의 제자다. 강호에서 음풍묘군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으니, 너희도 나를 그렇게 부르면 된다.”
음풍묘군의 말이 끝나자 풍연초가 재빨리 여덟 명의 의형제를 소개했다.
“……그리고 저쪽의 아이가 오봉십걸의 열 번째인 하소백입니다.”
음풍묘군의 게슴츠레한 눈은 한채연과 하소백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본래 두 여자는 가난하게 살 때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산채가 안정된 뒤로 무공만 익히니 미모가 더 두드러졌다. 이제는 미색이 고운 명가의 제자같이 보일 정도다.
“흐흐, 오봉십걸의 소문은 들었다. 얼굴 반반한 여걸이 둘 있다더니 과연 듣던 대로 뛰어나구나. 그런데 어째 하나가 비는 것 같다?”
“아, 예. 일곱째 아우는 지금 폐관수련 중이라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풍연초는 사자가 괜히 연적하의 성질을 건드려 맞기라도 할까 봐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음풍묘군이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산채가 보봉현에 빨리 자리를 잡은 것도 요행이 아니었구나. 장하다. 산적들이 주색잡기만 하다가는 상방이나 오대세가, 칠파이문에 뒤를 잡힐 수도 있다. 총채주님께 너희들의 그 노력을 꼭 전해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받아라.”
음풍묘군이 거두절미하고 붉은 배첩 하나를 휙 내던졌다.
황급히 배첩을 받은 풍연초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는 시월 강남의 만사평에서 녹림대회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초대장이다.”
“아!”
풍연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그러나 강호 사정에 어두운 풍연초는 강남의 만사평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저어,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무림초출이라 강남의 만사평을 모릅니다. 아둔한 아우를 위해 조금만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흐흐, 그랬구나. 남직례성의 황산 아래쪽에 있는 평원이 만사평이니라.”
“아! 이제 보니 남직례성에 있었군요. 늦지 않게 꼭 참가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험. 험.”
음풍묘군이 갑자기 헛기침을 터뜨렸다.
뒤늦게 풍연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이쿠! 이런 실례를.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오늘 밤 아우가 모시겠습니다. 산채를 내려가면 하가촌이라고 있는데, 거기 기루의 물이 아주 괜찮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래도 굳이 오늘밤 모시겠다니 기특하기는 한데…….”
자리에서 일어난 음풍묘군은 한채연과 하소백을 힐끔거렸다.
기루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채연은 징그럽다는 듯 한차례 몸을 떨었다.
풍연초와 탁고명이 재빨리 음풍묘군의 좌우에 달라붙었다. 그가 두 여동생에게 다른 마음을 품기 전에 서둘러 데리고 나가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발 빠른 행동으로 음풍묘군은 입맛만 다시며 상화각을 떠나야 했다.
***
그러나 사파의 거마인 음풍묘군을 대접하는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해시 초(오후 9시)쯤 됐을까?
술에 취한 음풍묘군이 풍연초와 탁고명을 끌고 산채로 되돌아온 것이다.
“에라, 이놈들아. 뭐? 물이 좋아? 산채에 있는 계집들보다 못해. 그 애들더러 술상 봐 오라고 해!”
음풍묘군은 ‘산채에 있는 건 모두 채주의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다. 그래서 지금도 풍연초가 아까워서 두 여자를 내놓지 않는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노형님, 아니, 어르신, 제발요. 저희 산채의 애들은 술자리에 불러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냥 기루로 가시지요. 여기서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풍연초가 그의 팔을 잡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취기가 오른 음풍묘군은 두 여자를 품을 욕심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당연히 풍연초와 탁고명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상화각 앞에 도착한 음풍묘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해! 내가 그냥 넘어가 줄 것 같아? 빨리 그 애들더러 술상 봐 가지고 오라고 해! 이 새끼들아!”
“어르신,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주십시오.”
풍연초가 주위를 살피며 애원했다.
그는 어떻게든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녹림 칠십이 채의 말단이 높은 분들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음풍묘군은 풍연초가 여자들을 부르지 않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녹림의 산채를 두루 다녔지만 이런 푸대접은 처음이다.
기분이 상하자 불콰하던 술기운도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되면 일단 힘으로 찍어 누르고 빼앗는 수밖에 없다. 녹림도의 삶에서 뺏고 뺏기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
음풍묘군은 암천수라진결의 공력을 일주천시켰다.
조금 전까지 혼탁하던 눈에서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감히 본좌의 명을 거역하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내력이 담긴 음풍묘군의 호통 소리가 오봉산채를 뒤흔들었다.
순간 풍연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났다.
무당파 장로도 안중에 없는 연적하가 총채주의 제자라고 봐주겠나!
잠자리에 들었던 도적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도적들 속에서 두 여자를 발견한 음풍묘군은 더욱 기가 살아 날뛰었다.
“너희 두 년! 당장 술상을 봐 오거라! 만약 거절한다면 오늘 본좌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