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92
292회. 영혼을 나에게 바치겠느냐?
생각을 이어 가던 십전무후 남궁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현듯 ‘하늘의 중심축’인 ‘천추성’이 빛을 잃은 게 떠올라서다.
‘산풍고’의 괘대로 유명교에 나쁜 일이 생겼다면 천기가 좋아야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그렇다면 ‘천기의 변고’와 ‘산풍고’는 각기 다른 일일 수도 있다.
‘모든 건 풍지산에 가 봐야 알 수 있겠구나.’
문득 남궁연은 강한 운명의 끌림을 느꼈다.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단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이 일을 계획했겠지만, 풍지산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장소였다.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게 맞다.
천지맹은 물론 남궁세가와 연적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누님?”
“응?”
“아까부터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풍지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있잖아요.”
연적하의 호언장담에 남궁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부탁해.”
“맡겨 주세요!”
씩씩하게 화답한 연적하는 사람들이 힐끔 쳐다보자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
정주.
칠리하촌.
의천각.
술시 말(오후 9시).
모처럼 운기 토납에 빠져 있던 청운검 남궁천은 부친인 검왕 남궁벽의 부름을 받았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이야기를 들었다. 낮에 팽가의 아이들과 다툼이 있었다고?”
“다툼은요, 무슨. 하도 무례하게 굴기에 교훈을 조금 준 정도를.”
“상대가 청천도 팽각명, 팽만도, 팽일진, 팽미려라고 들었다. 맞느냐?”
남궁벽이 묘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혼자서 팽가의 후기지수들을 넷이나 상대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다.
특히나 팽각명의 무위는 아들과 비슷하다 알려져 있었다.
그가 포함된 후기지수들이라면 칠파일문의 장로라 해도 당해 내기 어렵다.
그런데 소문은 일방적인 싸움이었다고 한다.
칠파일문의 장문인이 아니라면 그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아들의 얼굴에서 전에 없던 은은한 생기가 느껴진다.
“내가 알고 있는 너의 무위로는 힘들었을 텐데, 기연이 있었더냐?”
“기연이라기보다는 갑자기 막혀 있던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갑자기?”
남궁벽은 아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워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내외공이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예컨대 외공이 초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내공은 ‘의도기도’와 ‘기도혈도’는 물론 ‘혈도경도’의 경지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 삼 단계의 과정에는 왕도(王道)가 따로 없다.
진기토납을 시작한 자라면 평생에 걸쳐 가야 하는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
사람들은 이 세 단계를 ‘벽’이라 칭했다.
평생 노력해도 넘기 어려운 이 벽을 아들이 넘었다는 것일까?
“예.”
남궁벽은 아들의 은은하게 빛나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구나. 아무리 내공심법이 뛰어나다 한들 그 근본은 결국 토납(吐納, 숨쉬기)이다. 벽을 넘게 해 주는 것은 뛰어난 신공(神功)이 아니라 극기(克己)지. 드디어 네가 그 이치를 깨달았다니 기쁘구나.”
“아직 멀었습니다.”
“네 나이에 ‘혈도경도’의 경지라면 자랑할 만하다. 계기가 있었더냐?”
“아, 그게, 그러니까, 실은…….”
머뭇거리던 남궁천은 어쩔 수 없이 진설하와 관계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가 깨달음의 단초인 까닭이다.
아들의 고백에 남궁벽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남궁세가가 멸문의 화를 당했음에도 그는 각성하지 않았다.
그 현장에 없었으니 정신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을 받지 않았으리라.
그렇다 해도 여자 때문이라니.
“나는 네가 다정다감해서 무인으로 대성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그 다정다감이 너를 이끌어 주었구나. 진 소저가 창인문의 제자라 했더냐?”
“예.”
“알겠다. 이번 일로 창인문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조치해 주마.”
“감사합니다.”
“감사는 진 소저에게 하도록 해라.”
“헤헤, 그렇지 않아도 만날 때마다 할 생각입니다.”
“쯧쯧! 사내 녀석이 진중치 못하게.”
남궁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나 되는 놈이 왜 저렇게 체신머리가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계곡.
정오 무렵.
계곡으로 향하는 팔황신모의 가슴은 무척이나 설렜다.
‘왕들의 하늘’에 산다는 ‘천자마’와의 만남은 그녀로서도 뜻밖이었다.
‘염마왕’은 합일의 진행 과정만 있을 뿐, 딱히 그 이후가 없다.
아쉽게도 그 합일은 죽어야만 빛을 본다.
그건 그녀가 바라는 것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었다.
염마왕과의 합일을 위해 유명교를 만들었지만 그게 최종목표는 아니다.
그녀의 꿈은 지금의 몸으로 불로불사하는 것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팔황신모는 계곡에 도착했다.
신딸인 청류신을 염매(魘魅)로 만든 계곡이다.
계곡 물가에는 목줄을 한 검은 염소 한 마리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팔황이 준비해 둔 검은 염소다.
팔황신모는 염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작고 단단한 염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염소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 뿐 적극적으로 피하려 하지 않았다.
목줄에 길이 들어 그런 것이다.
빠득.
한순간 염소의 목이 부러졌다.
팔황신모의 손이 염소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피가 뿜어 나왔다.
그녀는 염소의 따뜻한 피로 계곡 옆 공터에 역오망성을 그려 나갔다.
팔황신모는 그림 중앙에 천자마의 이름을 적은 뒤 염소를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 청류신이 가르쳐 준 대로 그를 불렀다.
“욕계(欲界)의 왕, 천자마(天子魔)시여! 부족한 종이 당신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오니, 강림하여 주소서!”
순간 역오망성의 중앙에서 검은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팔황신모는 검은 연기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팔주령으로 인신공양을 할 때 느끼던 마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악 중의 악이라고나 할까?
세상의 악을 천 번, 만 번 중첩해도 저 검은 연기 한 줌만큼도 안 될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올 정도다.
한순간 그녀는 청류신이 자신을 배신해 저승의 독이라도 쓴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검은 연기는 사악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검은 연기는 다시 역오망성의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제야 팔황신모의 굳어 있던 안색이 조금씩 풀어졌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모두 사라졌다.
역오망성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팔황신모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오망성의 중심에 키가 십 척(약 3미터)쯤 되는 남자가 오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천자마?”
팔황신모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한 손에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데, 창대 끝에는 기이한 글자가 적힌 깃발이 달려 있었다.
남자가 뭐라고 말했지만 팔황신모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잠깐 인상을 찡그리더니 돌연 손가락으로 팔황신모를 가리켰다.
깜짝 놀란 팔황신모는 손바닥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천자마의 공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순간 천자마의 손끝에서 나온 바람이 팔황신모를 한차례 휘감고 지나갔다.
휘리링-.
팔황신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자마의 수법을 막지 못하고 온몸이 그대로 노출된 까닭이다.
그녀가 암암리에 진기를 일 주천 하고 있을 때다.
“네가 팔황신모냐?”
천자마의 말이 똑똑하게 들려오자 팔황신모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청류신이 말한 욕계의 왕, 천자마이신가요?”
“옳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용케도 나를 불러냈구나.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제가 원하는 것은 불로불사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불로불사? 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나 있느냐?”
“이대로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닌가요?”
“틀렸다. 이 우주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불로불사가 없다고요?”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를테면 너의 세계에서 말하는 천 년이 ‘욕계’의 하루다. 그런 욕계에서 이 몸은 십만 년을 살았지. 그렇다면 나는 불로불사의 존재냐?”
“…….”
팔황신모는 멍한 눈으로 천자마를 보았다.
그런 것은 미처 생각한 적이 없었다.
천 년이 하루와 같은데, 그런 세계에서 십만 년을 살았다니?
뜻밖의 전개에 넋을 잃고 서 있는 팔황신모에게 천자마가 다시 말했다.
“‘왕들의 하늘’에서 불로불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어떤 자들은 죽는 것이 소원이기도 하지. 그러니 다시 묻겠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그렇다면 저도 천자마 님처럼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 수 있나요?”
팔황신모는 천자마처럼 살고 싶었다.
“그것이 너의 소원이냐?”
“예.”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요?”
“네가 나의 권속이 되어야 한다.”
“천자마 님처럼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되겠습니다.”
“나의 권속이 된다는 것은 너의 영혼을 나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예.”
팔황신모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이미 염라왕과 합일한 상태라 영혼이 어찌 되는지에는 관심도 없다.
“가까이 오라.”
천자마의 부르자 팔황신모는 지체 없이 역오망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자마가 허리를 수그려 팔황신모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팔황신모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에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천자마의 눈은 마치 밤하늘처럼 깊고 넓었다.
염마왕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암흑에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헛!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왔지?’
팔황신모는 숨을 멈추고 천자마의 눈치를 살폈다.
뭘 믿고 처음 보는 천자마 앞에 이렇게 가까이 왔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고 할 때다.
천자마의 솥뚜껑만 한 손이 번개처럼 팔황신모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팔황신모여, 너의 영혼을 나에게 바치겠느냐?”
이미 물릴 수도 없는 상황, 팔황신모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답했다.
“꿀꺽, 예.”
“너 팔황신모는 태초로부터 내려온 맹약에 따라 나 천자마의 종이 되기를 원하느냐?”
“예.”
순간 천자마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욱씬.
마치 천자마의 손톱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다.
살을 찢고 뼈를 뚫는 끔찍한 고통에 팔황신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악!”
그녀는 미친 듯 상체를 뒤틀었지만, 천자마의 힘은 너무도 강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는 팔황신모의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 팔황신모는 누구의 강요가 아닌 너 자신의 의지로 너의 영혼을 나 천자마에게 넘기기로 했다. 맞느냐?”
“아아악! 맞아요! 다 맞아요!”
팔황신모는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버둥거렸다.
그런 팔황신모를 보는 천자마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부터 너 팔황신모는 나 천자마의……. 응?”
갑자기 천자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팔황신모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의식이 도중에 끊어져서다.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팔황신모의 머리통을 노려보던 천자마가 물었다.
“너 다른 왕에게 바쳐진 몸이더냐?”
“여, 염마왕요.”
순간 천자마의 손이 팔황신모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끔찍한 고통이 사라지자 팔황신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팔황신모에게 천자마가 말했다.
“염마왕에게 바쳐진 상태로는 나의 권속이 될 수 없다. 아쉽군.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는데…….”
그 말을 끝으로 천자마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팔황신모가 소리쳤다.
“천자마 님!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떻게 하면 권속이 될 수 있냐고요!”
그러나 이미 떠나 버린 천자마가 대답을 할 리가 없다.
팔황신모는 멍한 얼굴로 역오망성을 바라보았다.
한차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거의 다 들어왔던 불로불사가 연기처럼 흩어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