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293
293회. 기개가 아주 대협이야
일다경(약 20분)쯤 지났을까?
망연자실한 얼굴로 역오망성 그림 앞에 서 있던 팔황신모가 힘없이 돌아섰다.
‘염마왕과의 합일이 영혼을 바친 것이었구나.’
그것으로 인해 불로불사의 꿈이 깨졌다고 생각하니 원통하기만 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들끓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이게 끝은 아닐 게다.’
천자마는 ‘염마왕에게 바쳐진 상태로는 나의 권속이 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절대로 될 수 없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곰곰 돌이켜 보니 그는 다시 말을 꺼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단호하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만의 망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 년이 하루’라는 욕계의 왕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청류신을 불러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욕계와 닿아 있는 청류신을 떠올리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하고 나니 비로소 주변 정황이 눈에 들어왔다.
역오망성의 그림과 천자마의 진명(眞名), 그리고 검은 염소 시체.
저것들은 ‘욕계의 왕’인 ‘천자마’를 불러내는 비밀스러운 수법이다.
팔황신모는 손을 슬쩍 뒤집었다.
휘이잉-.
그녀의 손끝에서 일어난 돌풍이 땅거죽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콰르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한차례 뒤집혔다.
염소 피로 그린 역오망성과 천자마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한번 손짓하자 검은 염소는 화염에 휩싸였다.
팔황신모는 검은 염소까지 처리한 뒤에 사당을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
교구현.
정오 무렵.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세 남자가 마을로 들어섰다.
교주를 배신하기로 작당한 혼세검마 척진경과 악불 방천각, 그리고 적월 공취산이다.
세 사람은 점심을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까운 반점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건량으로 간단히 해결해 그런 것도 있지만 딱히 쉴만한 곳이 없어서다.
그들이 구석진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하지만 세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풍지산을 코앞에 두니 마음이 심란해서다.
점소이가 대답을 바라고 빤히 바라보자 공취산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대충 요기할 만한 것으로 내오거라.”
“예, 예.”
점소이는 다시 묻지 않고 굽실거리다가 돌아갔다.
잠시 후 국수[刀削面]와 양고기, 소꼬리 찜과 야채 볶음 등이 나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부실한 아침을 먹었음에도 입맛이 없는지 깔짝거리는 수준이다.
그때 누군가 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심코 입구로 고개를 돌리던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는 혼천혈귀 강상피였다.
“아니, 세 분을 이런 곳에서 뵐 줄이야. 합석해도 되겠소?”
강상피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빈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들 그렇게 놀라시오? 우리가 한두 해 같이 지낸 것도 아닌데.”
공취산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 그런 것뿐이외다. 그런데 혈귀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소?”
“나는 세 분을 따라온 것뿐이오.”
“우리를 따라왔다는 거요?”
“그렇소. 어디를 그렇게 조용히 가시나 궁금해서 따라와 봤소. 혹 교주님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오?”
공취산은 대답하지 않고 강상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강상피는 여전히 태평스러운 얼굴이었다.
“왜들 그렇게 보시오?”
이번에는 방천각이 나섰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소? 궁금한 건 그게 전부요?”
“크크. 나라고 눈이 없고 귀가 없겠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나도 한자리 끼워 주시오.”
“…….”
세 사람이 놀란 눈으로 강상피를 보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방천각이 정중하게 되물었다.
“한자리 끼워 달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그걸 굳이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해야 하오?”
그러자 방천각은 대답을 재촉하는 눈으로 강상피를 압박했다.
강상피는 부담 가득한 얼굴로 ‘허! 허!’를 연발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교주는 득도에 미친 여자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십 년 동안 그렇게…….”
“됐소. 그 정도면.”
방천각은 강상피의 말을 끊었다.
그가 교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들은 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대화를 누가 듣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강상피가 음흉한 얼굴로 물었다.
“허면 이제 나도 끼워 주시는 거요?”
방천각이 공취산과 척진경을 힐끔 보았다.
공취산과 척진경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이런 떠그랄.’
방천각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그를 끼워 주지 않았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럽시다.”
“잘 생각하셨소. 한 손이 열 손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소? 그런데 어떻게들 하실 생각이신지? 물론 확실한 한 수가 있어서 여기까지 오셨겠지만.”
“혈귀께서는 지켜만 보셔도 되오. 직접 손쓸 일은 없을 테니까.”
방천각은 음양고에 관해서는 그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단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아직 그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정말 거들지 않아도 되오?”
강상피가 놀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무려 교주를 상대하는 일인데 지켜만 보라니 믿어지지 않아서다.
그러자 척진경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소. 이 몸도 바람잡이에 불과하니까.”
“허! 검마께서도 바람잡이라니. 정말 대단한 수법인가 보오. 알겠소. 더 묻지 않으리다.”
강상피는 저 세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거사가 임박하여 불쑥 끼어들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다혈질로 소문난 강상피가 쉽게 체념하자 공취산이 위로하듯 말했다.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소. 혈귀께서는 문안 인사를 온 사람이라 생각하면 될 게요.”
“알겠소이다. 그래도 결과물은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겠지요?”
“아무렴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제야 강상피는 차려진 음식으로 손을 뻗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은 속으로 혀를 찼다.
혼자서 은밀하게 뒤따라오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
“우웩!”
귀영자군이 허리를 꺾고 먹던 음식을 게워 냈다.
그야말로 똥물까지 토해 낸 귀영자군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돌아섰다.
“씨벌! 더는 못 참겠다. 사생결단을 내야지…….”
이대로라면 객사를 하게 생겼다.
설마설마했는데 연적하의 미친 짓은 끝이 없었다.
처음에 칠리하촌에서 가지고 온 건량만 다 먹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악랄한 놈은 항상 건량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자신은 신선한 것을 먹고 쉰내가 나는 것만 개밥 주듯 던져 주었다.
자신과 시산마도 혁무춘은 돈이 있어도 건량을 사지 못했다.
총순찰인 자신이 수하들을 챙겨 줘야 한다면서 쉰 것만 먹이기를 오늘로 벌써 칠 일.
아래위로 얼마나 쏟아 냈는지 이젠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이를 갈며 걸어가는 귀영자군의 발목을 혁무춘이 잡았다.
“참으십쇼. 지금 몸 상태로 가시면 정말 맞아 죽습니다.”
“병신 같은 놈!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다. 총순찰은 우리를 길에서 죽일 생각인 게야.”
“그래도 가시면 정말 죽습니다. 극악공자 아닙니까? 혈해마도와 절영수도 운이 좋아 살았던 겁니다. 아랫도리를 그렇게 밟히고 살아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우리도 운이 좋으면, 살 수 있습니다.”
“지랄. 더는 못 살겠다. 너나 개처럼 상한 음식을 받아먹으며 오래오래 살거라.”
귀영자군은 혁무춘의 손길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십 장(약 30미터)쯤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연적하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누님은 천둔검이 단지 검법을 가리키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죠?”
연적하의 물음에 십전무후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검법이라면 흉내라도 내는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 게다가 너도 알겠지만 전해지는 검식도 없어. 그냥 구결뿐이야. 그게 뭘 뜻하는지 알겠니?”
“모르겠는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모른다는 게 정답이야. 그러니까 도사들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말고 답을 찾아봐.”
듣고 있던 구천노도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공자님. 어차피 도사 놈들은 익히지도 못한 검법입니다. 자기들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니 마니 하는 게 웃긴 일인 겁니다. 그놈들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십시오.”
“그것도 말이 되네?”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통의 설명을 들으니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천둔검을 수련할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누군가 자신이 불러 주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칠리하촌의 뒷산에서 ‘천둔검!’이라고 고함을 지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간절히 부르면 와 줄 것 같았다’고 할까?
생각에 잠긴 연적하의 귓가로 심통의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님, 귀영자군이 오는데요? 그런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흐흐흐”
심통은 귀영자군이 사고를 쳐 줬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연적하는 귀영자군이 서너 걸음 앞에 도달하자, 그제야 힐끔 올려다보았다.
“왜? 뭐?”
퉁명스러운 그의 태도에 귀영자군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총순찰님.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저는 총채주님의 직계 제자입니다. 그런 저에게 상한 음식이라니요? 그것도 칠 일 내내…….”
“운 좋은 줄 알아. 내 제자였으면 너는 뱀처럼 배로 기어 다녀야 했을 거야.”
화가 난 귀영자군은 눈을 부릅뜨고 연적하를 쏘아보았다.
“십이마군에게 이리 대하시면 안 됩니다.”
“음식 가리는 걸 보니 배가 부르구나?”
“음식을 가렸다고요? 저는 공식적으로 녹림의 순찰입니다. 누가 녹림의 순찰에게 상한 음식을 먹인단 말입니까?”
“그래서 안 먹겠다고?”
“예, 더 이상 상한 음식은 먹지 않겠습니다.”
“그럼 먹지 마. 나도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일 생각 없으니까.”
“앞으로 저와 학산 산채 채주가 먹을 음식은…….”
“먹지 마.”
연적하가 귀영자군의 말을 끊었다.
“먹지 말라고요?”
“안 먹겠다면서? 그럼 먹지 말라고.”
“총순찰님! 상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희가 무슨 개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개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개를 끌어들여? 너희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야. 그런 놈들에게는 상한 음식도 과분해. 주제를 모르고 어디서 입을 놀려?”
“십이마군을 조롱거리로 만들지 말고 차라리 죽이십시오.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
귀영자군의 결기 어린 말에 염탐조 고수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연적하가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제 젓 꼴리는 대로 하는 녹림에 이런 영웅이 계신 줄은 몰랐네. 기개가 아주 대협이야. 이런 사람이 왜 녹림에 있지? 칠파일문으로 안 가고?”
‘씨벌, 안 먹히는 건가?’
긴장한 귀영자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녹림도에게 ‘영웅’이니 ‘대협’이니 하는 것은 가장 심한 욕설이었다.
“우리 오봉산채에서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데, 귀영자군은 확실히 다르네. 개똥밭에서 구르느니 저승으로 가겠다는 거잖아?”
귀영자군은 연적하의 게슴츠레한 눈을 연신 훔쳐보았다.
그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다.
하지만 눈꺼풀에 절반쯤 가려진 그의 눈동자에서 뭘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정말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십이마군의 수좌인데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