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
3회. 피할 수 없는 길
백미주는 그러고도 부족한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넌 생각하고 말하는 게 둔하니까,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알겠지?”
“……네.”
순간 백미주의 손가락이 연적하의 쇄골로 파고들었다.
“악.”
“방금 내가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 해……써……요.”
연적하가 상체를 뒤틀며 힘겹게 답했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미주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어쭈? 이젠 내가 하는 말이 우습니? 그래도 계속 말을 하네?”
“아, 아, 아…….”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연적하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잠시 후 백미주의 손이 떨어졌다.
“이제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어른들이 묻는 말에 공손하게 대답 잘하고.”
“…….”
어린 연적하는 아까부터 큰엄마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을 잘하라고 했다가,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어질어질한 게 쓰러질 것 같다. 연적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머리를 잔뜩 움츠렸다. 그제야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셋째인 연설주가 그런 연적하를 보며 키득거렸다.
“푸훗! 얘 진짜 자라 같아. 자라야, 자라야, 어서 자라거라~.”
“풋!”
“하하!”
첫째 연무백과 둘째 연승백도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용히들 하지 못하겠니?”
백미주의 엄숙하고 단정한 음성으로 아이들을 야단쳤다.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때마침 안뜰을 지나던 총관 연무독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른들 세상과 달리 배다른 아이들은 잘 어울려 지내는 모양이다. 연씨 일족을 위해서나 와룡장을 위해서 잘된 일이다.
만약 아이들이 서로 반목한다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 것인가!
‘그래, 그렇게만 자라거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연무독에게 멀리서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연무독이 가만 보니 마을 초입에 세워 두었던 하인이다.
드디어 손님들이 온 것일까?
연무독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분들이 오셨느냐?”
“예, 마차가 마을에 들어서는 걸 보고 달려왔으니, 곧 보일 겁니다요!”
“알겠다. 가서 일 보거라.”
“예!”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연무독은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 점검하고는 정문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앞마당에 연무룡까지 나와 있었다.
“장주님, 왜 나와 계십니까?”
“모처럼 형님이 오신다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연무독이 장주인 연무룡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이번에 검왕께서 방문하시면 그 소문만으로도 낙양이 들썩거릴 것입니다. 장주님께서는 여전히 강호에 뜻이 없으십니까?”
“무독아, 육 년 전에 의형께서 오겠다고 한 걸 만류한 사람이 나다. 이제 와 내 뜻이 바뀔 것 같으냐?”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가 아닙니까?”
“후후, 아깝지 않냐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미소를 짓고 서 있던 연무룡이 돌연 시를 읊조렸다.
빈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空山不見人)
사람의 말소리만 울려오네(但聞人語響).
노을빛이 숲 속 깊이 들어와(返景入深林)
다시 푸른 이끼 위로 비치네(復照靑苔上).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 왕유가 지은 시이다. 시의 공부가 얕았던 연무독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장주님, 아직도 돌아가신 이 부인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 나는 그저 사람마다 각기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무공을 익혔다고 평생 무림인으로 살라는 법은 없지 않으냐?”
“하지만…….”
연무독이 말끝을 흐렸다.
장주이자 사촌형인 연무룡의 자질이 아까워서다.
그는 연씨 일족 중에 가장 뛰어난 기재였다. 무림에서 은퇴한 뒤에도 연씨 일족은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 연씨 일족 모두가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다. 연무룡이 과거의 상처를 털고 일어나 와룡장을 무림 세가로 키워 내는 것이다.
그런 연씨 일족의 바람과 달리 연무룡은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나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잠시 후 사두마차와 열두 명의 무사가 만들어 내는 육중한 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연무독은 급히 문 앞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연무룡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작고 아담한 와룡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안채로 이어진 월동문에서 백미주와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연무룡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르다.
사람은 원하는 원치 않는 그 길을 가야 한다.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연무룡은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돌아섰다.
용암처럼 들끓던 마음이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현실로 돌아와 번쩍 고개를 드니 어느새 남궁벽과 그의 가족들이 보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연무룡은 뚜벅뚜벅 걸어가 남궁벽의 앞에 섰다.
“형님, 그동안 먼저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하! 이 사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시게. 이쪽은 내 안사람과 아이들이라네.”
남궁벽이 손으로 부인과 자식들을 가리켜 보였다.
“서방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장하은입니다.”
장하은이 신검세가의 여주인답지 않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마차 안에서 연무룡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자신을 한껏 낮춘 것이다.
“숙부님 저는 남궁천입니다. 그리고 이 애는 제 동생인데 남궁연이라고 합니다.”
첫째인 남궁천이 내친김에 지나치게 과묵한 여동생의 소개까지 곁들였다.
“하하, 형수님,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반갑다. 아주 잘 자랐구나.”
연무룡이 웃고 있을 때다.
백미주가 아이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왔다.
“어머! 여보, 당신은 나와 아이들은 소개시키지 않을 작정이세요?”
뒤늦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연무룡이 얼굴을 붉혔다.
“아! 제가 너무 좋아서 깜빡했습니다. 형님, 그리고 형수님. 제 아내와 아이들입니다.”
연무룡의 소개에 백미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느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주버님, 그리고 형님. 백미주라고 합니다.”
남궁벽과 장하은도 백미주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렇게 어른들 간에 인사가 끝나자 백미주가 첫째인 연무백의 등을 슬 그머니 떠밀었다.
“너희들도 인사 올리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양쪽 집안의 아이들까지 인사를 끝내자 연무룡이 다소 지친 얼굴로 말했다.
“형님, 그리고 형수님,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두고,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세.”
남궁벽이 아들 남궁천을 불러 가벼운 주의를 주었다.
“네가 가장 큰형이니 동생들을 잘 돌보도록 해라.”
“예, 걱정하지 마시고 말씀들 나누십시오.”
남궁천이 맡겨 달라는 듯 제 가슴을 팡팡 쳐 보였다.
“나는 네 녀석이 제일 걱정된다. 행여 누구 한 사람도 상처 입지 않게 잘 돌보거라.”
문득 남궁벽의 눈이 한쪽에 오도카니 서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이제 여섯 살에 불과한 연적하는 불안한 얼굴로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남궁벽은 연적하와 남궁연의 표정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아이들의 성품은 부모의 사랑과 무관한 것일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
연무룡의 큰아들 연무백은 남궁세가에 가서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이제 여덟 살에 불과한 남궁연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연무백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남궁연이 도통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작고 귀여운 얼굴에는 일체의 감정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결국 연무백은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형인 연무백이 실패하자 눈치를 살피던 둘째 연승백이 나섰다. 연승백은 눈처럼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궁연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진 형과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연승백이 아무리 웃긴 이야기를 해도 남궁연은 웃지 않았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남궁연은 마치 한 마리 어린 천리마처럼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일개 와룡장의 아이가 남궁세가의 무공으로 단련된 철각(鐵脚) 남궁연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승백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궁연에게 서서히 지쳐 갔다.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쁜 것을 향한 연승백의 순정도 체력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남궁전은 두 형제가 동생에게 달라붙는 것을 보고 내심 고마웠다. 두 아이들의 노력으로 남궁연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렸으면 하는 바람까지 가졌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아이는 독백에 지쳐 떠나고, 다른 아이는 남궁연의 체력에 밀려 낙오됐다.
혼자 남겨진 남궁연은 그제야 안도의 표정으로 와룡장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남궁천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 함께 있어 주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제 아홉 살인 연설주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라버니, 별호가 청운검이라면서요? 원수를 만나면 막 싸우다가 죽이고 그러나요?”
“누,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협객 소설에 그렇게 나온다고 하던걸요?”
“소, 소설에?”
“예.”
“그럼, 그런가 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남궁천은 건성으로 답하고 동생을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연무장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남궁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와룡장을 지키는 무사들이 있어서 혼자 장원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그런데 연설주라는 이름의 어린 꼬마 아가씨가 딱 달라붙어 찾으러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강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네에?”
‘크으……. 졌다.’
결국 남궁천은 연설주에게 잡혀 자신이 경험한 무림의 이야기를 탈탈 털어놓아야 했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다.
***
어린 연적하는 와룡장이 무서웠다.
아빠는 자상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은 큰엄마와 보내야 했다.
연적하는 아직 엄마와 큰엄마의 차이를 모른다. 그래도 큰엄마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큰엄마는 늘 야단을 쳤고, 야단을 칠 때마다 아프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연적하는 와룡장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러다가 찾아낸 게 별채에 있는 개구멍이다.
오래전 와룡장의 별채에 머물던 식객 중 하나가 큰 개를 키운 적이 있다. 외부로 통하는 별채의 개구멍은 그 개가 뚫어 놓은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식객과 개와 연적하밖에 없다. 그 식객은 지난해에 개를 데리고 떠났다. 그 뒤로 개구멍은 연적하의 것이 됐다.
연적하는 오늘도 개구멍 앞에 섰다.
외부로 통하는 정문과 후문은 어른들이 지키고 서 있어서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개구멍은 다르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막는 사람도 없다. 이 작은 구멍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연적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큰엄마의 눈에서 달아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곳으로 왔다.
눈도 다리도 가슴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