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4
314회. 녹림과 정파는 옛날부터 그랬어요.
회의실의 술렁거림은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팔황신모에게로 가는 길이 팔문팔 상진으로 막혀 있으니 궁금해도 딱 거기까지였다.
좌중의 시선이 다시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에게로 향했다.
본래 총사란 해결책을 내놓는 자리다.
한순간 제갈승운의 눈 밑이 실룩거렸다.
사람들의 기대는 알지만 팔상팔문진은 자신에게도 무리였다.
십전무후 남궁연의 머리와 무상도제 장무덕의 무위로도 전전긍긍한 진법을 무슨 수로?
솔직히 지난번 염탐조는 천지맹 최고의 구성이었다.
‘제길, 누가 가도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고.’
제갈승운이 원망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힐끔 쏘아보았다.
그가 새삼 팔황신모를 거론하는 바람에 자신의 무능만 부각될 판이었다.
“교주를 감시하려면 팔문팔상진을 뚫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교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지요. 하지만 염탐조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갈승운의 말에 고수들은 탄식했지만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 장문인 영결상인이 쐐기를 박았다.
“기척 없이 팔문팔상진 너머의 교주를 감시할 수는 없을 게요. 무상도제와 십전무후, 곤륜삼선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 모를까?”
간접적으로 그들을 무공과 진법, 술법의 대가라고 인정한 셈이다.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자신의 이름이 제외되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천지맹에서 따로 팔문팔상진을 연구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파훼법을 발견하면 다시 염탐조를 운영하도록 하지요. 팔황신모와 관계된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도 되겠습니까?”
제갈승운은 애써 연적하를 무시하고 다른 방파의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그게 좋겠소.”
“그럽시다.”
이견이 없자 제갈승운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팔황신모는 팔상팔문진의 연구를 마친 뒤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유명교와의 전쟁 종결에 관한 건입니다. 이미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유명교에서 먼저 그런 제안을 해 왔습니다. 전력상 우위에 있는 저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교주가 한 말이나 백마사의 분위기를 보면 거짓이나 기만전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그가 말을 멈추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제갈승운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지맹을 해체하고, 백 년간 유명교를 대상으로 무림첩을 돌리지 말라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
방파의 대표들은 잠시 침묵했다.
종전의 조건에 대해 처음 듣는지 다들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비해 해당 사항이 없는 녹림 고수들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있다.
유명교와 녹림은 어느 쪽이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서로 척을 질 이유가 없다.
유명교가 녹림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녹림이 천지맹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임시로 소림사를 대표하고 있는 공지 대사가 물었다.
“설마, 이후로 백 년간 유명교를 적대시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보다는 정파의 연합을 견제할 목적인 것 같습니다.”
“개별적으로 아무래도 좋으나 모이지는 말라?”
“유명교를 대상으로 하지 말라는 걸 보면 모임을 금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과거 정의맹 같은 정파의 협의 단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여겨집니다만 확실한 것은 만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누군가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거야 원, 항복하라는 소리보다 더하네. 왜 정파만 쥐 잡듯 하는 거지?”
한순간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의 말대로 이건 정파에게 굴욕적인 제안이었다.
천지맹의 또 다른 축인 사파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 해도 될 정도다.
정파에 속한 대표들의 시선이 녹림을 향했다.
아슬아슬한 동거를 하고 있지만 저들은 유명교보다 더한 자들이다.
저런 자들을 믿고 계속 싸울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유명교의 편파적인 제안은 정파 고수들에게 불신의 씨앗을 심기에 충분했다.
제갈승운은 그런 정파의 분위기를 금방 간파해 냈다.
유명교의 제안이 천지맹을 분열시키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손익계산에 골몰했다.
전쟁을 끝내려면 천지맹은 어차피 해체돼야 한다.
더 이상 녹림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연적하를 쳐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가?’
천지맹에서 연적하의 비중은 꽤나 높다.
그가 녹림의 책임자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정파와 사파의 긴장이 높아지면 저놈도 견제를 받을 테지?’
정파에서는 더 이상 연적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영향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남궁연이나 남궁세가의 행보도 위축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야릇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저들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저들과 종전 협상을 시작할까 합니다. 참고로 맹주님과 칠파일문, 사대세가는 전쟁 중단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방파의 대표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찬성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모두가 동의를 표하자 제갈승운이 마무리 지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니 유명교와 종전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유명교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칠리하촌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막상 ‘종전 협상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이 나오자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유명교가 너무 강하니 싸움을 끝내는 게 현명하다.
머리는 그런데 유명교에 피해를 당한 방파들의 가슴은 또 달랐다.
누군가는 하늘을 원망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했다.
회의가 끝나자 녹림도들이 가장 먼저 회의실을 떠났다.
녹림이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녹림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왔다.
“녹림과 유명교 사이에 뭔가 거래가 오갔을 거요.”
“파천마군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본래 같은 놈들이 아니오? 등에 칼을 꼽지 않은 것만도 어디요?”
“총사, 녹림을 칠리하촌에서 내보낼 수 없겠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소이다.”
“맞소. 해가 지면 집 밖을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요.”
“나는 칼을 머리맡에 두고 잔 지 오래외다.”
“빨리 정의맹과 같은 단체를 만들어야지 불안해서 어디 살겠나?”
“도적들만 살판난 세상이라니까.”
유명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녹림으로 전이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 사람들은 묵묵히 지켜만 봤다.
어차피 천지맹이 깨지면 녹림과 싸워야 하니 녹림을 변호할 이유가 없었다.
맹주인 무극상인이 제갈승운에게 슬쩍 말했다.
“총사, 종전 협상과 별개로 정파 연합체를 구상해 보십시오. 군웅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을 때 만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지요. 육파 일문과 사대세가 가주님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선우세가의 가주 환우검 선우담이 끼어들었다.
“종전의 선포와 맞물리게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겁니다. 그런데 무극문과 모용세가의 빈자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사마외도의 손에 떨어질 텐데.”
무극상인이 선우담을 힐끔 보았다.
무극문과 모용세가는 공교롭게도 모두 남직례성에 있다.
선우세가 역시 남직례성에 뿌리를 둔 터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좋은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직례성에서 두 개의 문파가 봉문을 했군요. 무극문과 모용세가의 관할 구역을 어찌해야 할지도 생각해 주십시오. 정파의 구역을 사마외도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요.”
맹주의 말에 제갈승운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직례성의 이권 재배분은 그야말로 바라던 바다.
‘남궁벽, 안됐지만 당신은 딸을 잘못 둔 죄로 손가락만 빨아야 할 게요.’
제갈승운은 남궁세가에게는 동전 한 문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
연적하는 녹림도들과 함께 움직였다.
의사청 분위기가 묘해서 도저히 정파 고수들 틈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천지맹의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연적하가 혀를 내둘렀다.
“와아! 유명교 놈들 머리가 비상하네.”
“왜요?”
흑수선이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걷던 그가 갑자기 유명교를 칭찬하니 무슨 일인지 싶다.
“정파만 꽉 밟고 있잖아. 천지맹에 정파만 있는 게 아닌데. 그 바람에 우리만 이상한 사람들이 됐다고. 아까 회의실 분위기 못 봤어?”
“천지맹이 이상했던 거예요. 녹림과 정파는 옛날부터 원래 그랬어요.”
“아, 그래?”
그러자 구천노도 심통이 한마디 했다.
“그건 석 소저 말이 맞습니다. 천지맹이 깨지면 당분간 녹림이 힘들어질 겁니다. 칠파일문이나 사대세가에서 강호행을 하니, 상방을 보호하니 하면서 날뛸 테니까요.”
“그래도 아직은 한배를 탔는데 면전에서 대놓고 그러면 안 되지.”
“그렇긴 합니다. 총사 놈이 수수방관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그건 그래요. 총사가 한마디만 해 줬어도 조금 달라졌을 텐데. 오라버니가 그를 너무 괴롭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서생들이 원래 속 좁기로 유명하잖아요.”
흑수선의 말에 연적하가 펄쩍 뛰었다.
“내가 언제 그를 괴롭혔다고 그래? 그리고 총사놈이 무슨 서생이야? 그놈 은근 고수야. 모르긴 몰라도 녹림 채주급은 될걸?”
“어머, 정말요? 그저 호신을 할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냐. 내가 슬쩍 내기를 밀어 넣어 봤는데 반탄력이 보통 아니더라고.”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나저나 총사 놈이 종전 협상에 누굴 데리고 가려나?”
“왜요? 아! 남궁 소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구나?”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 내가 언제고 아주 찍소리도 못 하게 밟아 놔야지.”
“천지맹이 깨지면 그때 마음대로 하세요. 지금 밟으면 오라버니도 다칠 수 있어요.”
“그렇지?”
연적하는 흑수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천지맹 총사를 건드리는 건 아무리 자신이 녹림 총순찰이라 해도 부담스러웠다.
녹림도들과 함께 연적하가 막 천지맹 정문을 나설 때다.
뜻밖의 사람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화려한 비단옷으로 변복을 한 금의위 남진무사 동유수였다.
“연 공자! 아주 신수가 훤해지셨소이다.”
단번에 그를 알아본 심통이 인상을 찌푸렸다.
관인, 그것도 금의위와 어울려서 좋게 끝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다.
녹림도와 관은 멀고도 가까운 관계다.
둘은 피차 필요로 할 때 가깝게 지내다가도 용도가 끝나면 폐기 처분하곤 했다.
육마군과 채주들이 궁금한 얼굴로 힐끔거렸다.
당금 무림에서 연적하를 ‘연 공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흔치 않은 까닭이다.
연적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금의위와 만난다는 게 알려지면 뒤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다.
“여기는 어쩐 일이래요?”
“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이라도 한잔합시다.”
“뭐 그러든가요.”
연적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술이나 마시자고 찾아왔을 리 없으니 응한 것이다.
동유수는 연적하를 칠리하촌의 외곽의 허름한 가옥으로 안내했다.
텅 빈 방에는 단촐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동유수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연 공자가 소흥주를 즐겨 마신다고 해서 준비해 봤소. ‘회계운로(会稽雲露)’라 불리는 명주외다.”
주향이 진하게 퍼졌다.
연적하는 회계운로를 한 모금 마시고 상 위에 슬쩍 내려놓았다.
절반은 떨어져 나간 작은 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쯤되면 확실히 폐가(廢家)다.
“분위기가 정말 좋네요. 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