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7
317회. 창끝 같은가? 대나무 잎 같은가?
신기수사 제갈승운은 독심귀랑 양소란의 엉거주춤한 태도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유명교도 천지맹만큼이나 전쟁의 중단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종전(終戰)이라는 예정된 결말을 두고 양쪽 협상단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양소란은 다시 제갈승운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기만 했다.
제갈승운의 침묵이 길어지자 양소란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려는 사람을 잡고서 말이 없네요?”
“양 노태태도 아시지 않습니까? 칠파일문과 사대세가 분들의 자존심과 고집을요. 유명교와 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 년이라는 제약을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이대로라면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멸문을 면치 못할 거예요. 그들에게 봉문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유명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거부하다니, 전쟁을 계속하자는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강호에서는 종종 골육 간에도 싸움을 합니다. 그걸 단칼에 하라 하지 마라 정할 수는 없지요. 그것도 백 년간이나. 반대로 유명교에서도 백 년간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를 적대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갈승운의 역제안에 양소란이 냉소를 날렸다.
“흥! 본교는 정파든 사파든 먼저 건드린 역사가 없어요. 잊었나요?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정의맹이 먼저 건드렸다는 것을.”
“…….”
제갈승운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차원에서 말을 했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한 느낌이다.
양소란이 차갑게 말했다.
“백 년에서 단 하루도 뺄 수 없어요. 결정하세요.”
“당장 하루 앞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거늘 어찌 백 년을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제갈승운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유명교도 종전을 원하는 상황에서 굳이 그럴 이유가 없어서다.
“전쟁을 계속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어요?”
양소란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상대의 대답에 따라 피를 볼 수도 있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순간 그녀의 좌우에 있던 다섯 명의 십두마병들도 살기를 쏟아 냈다.
‘헉!’
벽검문 문주 소상검 한백상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만약 협상이 틀어진다면 협상단은 몰살을 당할 터였다.
옆에 공손가와 팽가의 가주가 있지만 상대는 십두마병들이었다.
‘괜히 따라왔구나. 협상단에 참가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은 얼씨구나 하고 총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후회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위험한 자리인 줄 알았으면 거부했을 것이다.
그는 승천문 문주 일검진천 마곤을 힐끔 보았다.
마곤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하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남직례성의 이권에 눈이 멀어 죽을 자리로 찾아오다니!
한백상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한편 제갈승운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진심일까? 아니면 허장성세일까?’
저 살기가 진심이라면 협상단은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허장성세라면 말이 달라진다.
저걸 넘어가기만 하면 협상단은 최고의 전공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제갈승운은 양소란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고뇌했다.
유명교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슬쩍 좌우의 공손일랑 공손기와 벽력도 팽만호를 보니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십두마병들이 쏟아 내는 살기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어쩐다.’
협상이 가시밭길일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백 년간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유명교에 굴종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이 아니던가.
유명교의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를 놓치기 싫을 것이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제갈승운은 적당한 타협점을 궁리했다.
제갈가는 변두리의 작은 병가에 불과해 칠파일문이나 사대세가보다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단 하루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종전 협상으로 유명교의 조건을 없애 주기를 바랐다.
그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 총사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할 것이다.
콕 찍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그랬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제갈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제갈승운의 침묵이 길어졌지만 양소란은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제갈승운의 입이 열렸다.
“천지맹은 전쟁을 바라지 않습니다.”
양소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결국 무산낭랑 이매화가 바라는 대로 될 모양이다.
“하지만 백 년간 유명교를 대적하지 말라는 조건도 들어주기 어렵습니다.”
“뭐예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게 아니라면 전쟁뿐이라니까!”
노기를 참지못한 양소란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양소란이 펄펄 뛸수록 제갈승운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허장성세였구나!’
양소란은 칼이 아니라 말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살기는 여전했지만 제갈승운은 그것을 살의가 아닌 겁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실컷 떠들어라. 본래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니까.’
제갈승운은 양소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나저나 유명교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거지?’
그것만 알면 돌파구가 보일 것도 같았다.
폭풍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던 양소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기도 지겹군요. 가서 분명히 전해요. 칠파일문과 사대세가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전쟁은 계속될 거라고.”
그 말을 끝으로 양소란과 십두마병들은 풍월루를 떠났다.
엉거주춤 일어났던 한백상과 마곤이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들의 옷은 흠벅 젖어 있었다.
뒤이어 제갈승운과 공손기, 팽만호가 조용히 착석했다.
공손기가 운을 떼었다.
“허어, 이상한 일이로세. 금방이라도 살겁을 저지를 줄 알았는데 저리도 얌전히 돌아가다니.”
제갈승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저들도 그걸 바라고 있음입니다.”
“다 이긴 싸움을 왜 그만두려는 걸까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게 된다면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겠지요.”
팽만호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두 분의 눈에 정말 그렇게 보이오?”
공손가는 병가로 유명한 제갈가만큼이나 지략에 밝았다.
제갈승운이 공손기를 협상단에 포함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공손기가 먼저 답했다.
“십두마병들의 손속이 잔인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요. 전쟁에 뜻이 있었다면 총사께서 거절한 순간 사달이 났을 겁니다. 그런데 언성을 높이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더군요. 전쟁을 중단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합니다.”
“공손가주께서 바로 보셨습니다. 독심귀랑은 우리가 그걸 눈치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다음 협상에서는 다른 조건을 들고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조건을 들고 나올 거라 했소?”
팽만호가 눈을 찌푸렸다.
백 년도 들어줄 수 없는데 또 다른 조건이라니 기가 막혔다.
“천지맹에서 저들의 조건을 거부했으니 다른 적당한 걸 들고 나올 테지요. 그들로서도 삼십 년 만의 승리 아닙니까? 그저 놓아주기는 싫을 겁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할 것 같소?”
“글쎄요. 그건 돌아가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갈승운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명교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물밑에서 조율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패한 싸움이니 저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그 조건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끼워 맞추어야 한다.’
물밑 작업의 장점은 거기에 있다.
어차피 뭔가를 내줘야 한다면, 자신이 버리고 싶은 패를 주는 게 낫다.
그게 무엇이든지 말이다.
***
일차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협상단은 유명교도들과의 만남을 가감없이 보고했다.
다른 한편으로 호위무사들의 입을 통해 협상의 과정이 알려졌다.
그제야 군웅들은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심지어 협상단이 목숨 걸고 그 일을 하고 있음도.
비록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협상단의 위치는 말할 수 없이 공고해졌다.
그런 때에 남궁연은 천지맹 맹주 무극상인을 찾아갔다.
이차 협상을 하루 앞둔, 어느 햇살 좋은 날 오후였다.
“요즘 빈도(貧道)가 즐겨 마시고 있는 군산은침(君山銀針)이라네.”
무극상인이 남궁연의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위로 떠올랐던 찻잎은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가라앉았다.
“차 모양이 창 같기도 하고, 대나무 잎 같기도 하지. 소저가 보기에는 어떤가? 이것은 창끝 같은가? 아니면 대나무 잎 같은가?”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보던 남궁연이 고개를 들었다.
무극상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맹주의 시선을 본 순간 남궁연은 알아차렸다.
‘총사가 한 짓을 알고 있었어?’
하기야 천지맹의 모든 것이 맹주 손에 있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다.
총사가 은밀하게 열 명을 부린다면, 맹주는 백 명을 부리니까.
찻잎이 가라앉자 남궁연은 천천히 찻잔을 집어 들었다.
향기는 맑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저에게 군산은침을 주신 이유가 따로 있었군요?”
“역시 십전무후답군. 소저와 같은 후배가 있으니 강호의 미래는 밝을 게야.”
“말씀해 주시지요.”
“찻잎을 보게. 창끝 같기도 하고, 대나무 잎 같기도 하지. 나도 창끝처럼 날카로운 사람이었네. 내 뜻과 다른 것은 무엇이든 부숴 버렸지.”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남궁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의로운 사람이 창끝처럼 날카롭게 살았던 것을 과거의 일로 말하고 있었다.
“그보다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걸세.”
“인내하며 기다린다고요?”
“자네라면 대나무에 대해 잘 알겠지?”
남궁연은 답하지 않았다.
대나무 씨앗을 땅에 심으면 삼 년이 지나야 싹이 난다.
그러고도 다시 이 년간은 땅밑으로 뿌리를 뻗느라 땅 위로는 잘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오 년이 되면 하루에 이 척(약 60센티)씩 무섭게 뻗어 올라간다.
무극상인은 자신의 인내를 대나무에 비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천지맹이 세워진 지 일 년도 안 됐네. 그런데 뿌리를 뻗기도 전에 잘릴 위기야.”
“맹주님은 강호에 어떤 뿌리를 내리고 싶으신가요?”
남궁연은 말과 함께 제갈승운과 관계된 자료를 탁자 위에 올렸다.
무극상인의 눈이 봉서(封書)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한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과거가 세월에 무뎌진 양심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협상단에는 천지맹뿐아니라 장차 세워질 정파 연합의 운명까지도 달려 있다.
총사는 협상단의 핵심.
어지간한 비위(非違)가 아니고서는 그를 끌어내릴 수 없다.
아니, 설사 그런 비위 사실이 있다 해도 지금은 안고 가야 했다.
더구나 정사파가 한 울타리에 있을 때 총사의 치부를 드러내다니, 말도 안 될 일이다.
‘고작 여래신주 하나와 도적 둘의 목숨으로 총사를 내칠 수는 없지.’
녹림은 물론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대표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검왕 남궁벽도 달가워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십전무후가 제기한 사안을 그냥 묻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
고민 끝에 무극상인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검왕 가주님과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하지. 이만하면 답이 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