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18
318회. 꽃이 소똥에 꽂혀 있군요
십전무후 남궁연은 무덤덤한 얼굴로 일어섰다.
대나무 얘기를 꺼낼 때부터 기대하는 마음을 접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이후로 자신이 무극상인을 위해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썩은 뿌리에 얽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녀는 끝내 말없이 떠나갔다.
쓸쓸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천지맹 맹주 무극상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저런 패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켜야 할 것과 이루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무극상인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아서 그렇게 높을 수 있고, 대하는 작은 시냇물이라도 가리지 않아서 그렇게 깊을 수 있는 법[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사마천의 사기 중 ‘이사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젊은이의 의기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총사에 대해서만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천지맹에는 총사의 지략과 연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훗날 정파 연합에도 마찬가지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봉함에서 내용물을 꺼내 살폈다.
대부분 아는 내용이지만 몰랐던 것도 있었다.
“대단하군.”
자신은 정의맹 시절부터 운영하던 추밀각의 힘을 이용해 알았다.
그런데 그런 도움 없이 총사를 이렇게까지 파헤치다니 놀라울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대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무극상인은 내용물을 다시 봉서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일은 뒤로 미룰수록 오해가 깊어지니 빨리 수습하는 게 낫다.
맹주의 집무실에서 나온 그는 천추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왕 남궁벽을 만나기 위해서다.
***
“하하, 웬일로 나를 다 찾아오셨나?”
남궁벽이 웃으며 무극상인을 보았다.
화산파 장문인과는 정의맹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난 뒤로 조금 소원해졌지만 말이다.
“선배님께 자문을 구할 일이 있어서 찾아봤습니다.”
“큰 보탬은 안 되겠지만 말씀해 보시오.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우리다.”
“실은 영애가 저를 찾아와 총사의 비위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혹 영애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신 바가 있으십니까?”
“아!”
남궁벽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토록 만류했건만 끝내 총사에 대해 맹주에게 말을 했던 모양이다.
‘이런, 이번에는 연아가 실수를 했구나.’
사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딸이 왜 반대를 무릅쓰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극상인이 도사이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겠지.’
하지만 그는 화산파 장문인이며, 천지맹의 맹주이다.
그쯤 되면 개인의 신념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게 당연하다.
자신의 뜻보다는 화산파와 천지맹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 화산파와 천지맹 사람들도 무극상인이 그래 주기를 원할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정치에 발을 담근 순간 인간은 올곧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집단의 이익이 곧 정의이며 대의인 까닭이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인 예로 남궁세가를 위해 무극상인을 베어야 한다면 벨 것이다.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에 대한 선배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묻으라고 했었네. 총사의 비위 사실이 약해서가 아닐세. 남궁세가에서 그걸 지적했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일각에서는 복수라고 여기겠지? 그런 모욕을 자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깟 제갈가가 뭐라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빈도도 선배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총사가 그간 남궁세가를 견제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몰락했지요. 지금의 그는 바닥까지 떨어져 악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와 한데 엮여 봤자 이로울 게 없습니다.”
남궁세가는 무림의 명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제갈승운과 싸워 봐야 몸에 흙탕물만 튀지 얻을 게 없다.
무극상인이나 남궁벽의 입장에서는 그런 싸움에 휘말리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허면 지금은 묻어 두었다가 훗날 쓰임이 있을 때 꺼내도 되겠습니까?”
“그건 맹주가 알아서 하시게. 다만 그 출처가 우리 남궁세가라는 것은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하네. 총사의 일에는 눈곱만큼도 엮이고 싶지 않거든.”
차라리 은밀하게 죽여 버릴지언정, 제갈승운을 고발했다는 소리만은 사양이었다.
무극상인도 화산파의 장문인인지라 남궁벽의 심정에 공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이 자료는 추밀각이 알아낸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양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건 그렇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네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말씀해 주십시오.”
“협상단에 남직례성의 방파가 포함되었더군. ‘무극문과 모용세가의 구역 재분배를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무극상인은 부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로 검왕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다.
“역시 총사가 밀어붙인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후후, 그게 책상머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한계지. 잘 알겠네.”
무극상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나 검왕은 총사의 계획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남궁세가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리라.
“선배님,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만은 말아 주십시오.”
“하하, 당분간은 그럴 여력도 없다네.”
‘당분간’이라는 말에 무극상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벌써부터 전운(戰雲)이 느껴진다. 벽검문과 승천문이 남궁세가의 손에서 그들이 할당받은 구역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남궁세가를 향한 총사의 증오심에 애꿎게 벽검문과 승천문이 휘말렸을 뿐이다.
검왕은 그걸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다.
어쩌면 이런 게 무림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자신만 해도 총사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벽검문과 승천문과의 싸움이 더 명예롭다고 느끼니 말이다.
하지만 검왕과 무극상인은 몰랐다.
세간의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총사를 건드릴 사람도 있다는 것을.
***
“그러니까 맹주가 뭐래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평소처럼 산책을 하던 도중 연적하가 물었다.
남궁연이 조금은 실망한 얼굴로 답했다.
“아버지와 상의해 보겠대.”
“예? 맹주는 자기면서 왜 백부님과 상의를 한대요?”
“그러게. 스스로 결정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와 상의하겠다고 하는데, 정작 상의가 필요한 사람은 나 몰라라 하고. 인생 참 그렇네.”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래서 백부님은 뭐라고 하실 것 같아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작살 내라고 하시겠죠?”
“그러지 않으실 거야.”
“예? 진짜요?”
연적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동안 총사가 남궁세가를 집요하게 괴롭혔는데 그걸 그냥 둔다고?
아무리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인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까?
“아버지 지적도 맞아. 내가 총사의 문제를 지적하면, 사람들은 그걸 정치적인 싸움으로 해석할 거야. 남궁세가를 재건하다 보면 많은 적이 생기겠지? 그들에 의해서 총사가 희생양으로 둔갑할 수도 있어. 아버지는 나와 남궁세가의 이름에 오물이 묻지 않기를 바라실 거야.”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둔다고요? 천하에 나쁜 놈을?”
“지킬 게 많은 쪽이 신중해져야지. 총사는 달랑 몸뚱이 하나 남았잖아. 그래서 더 극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그렇게라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애쓰는 거지. 목숨 걸고 협상단에 임하는 걸 봐. 남궁세가를 그렇게 물고 늘어지면, 승리하더라도 오명이 따라다닐 거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조용히 떠나갈 사람이 아니니까.”
“허어, 진짜 똥 같은 놈이네요.”
건드리는 사람에게 오물을 묻히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후후,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는 정말 변과 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알면서도 그런 사람을 중히 쓰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개똥 같은 세상?”
“맞아. 능력이 있고, 필요하면, 다 용서해야 하나?”
연적하가 남궁연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아요. 천지맹만 해도 정파와 녹림이 힘을 합친 거잖아요. 곧 절단 날 모양이지만.”
“그러네. 나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하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세상이었어.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그래서 연륜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건가?”
남궁연의 자조적인 말에 연적하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누님! 그건 세상이 잘못된 거지 누님이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 건 연륜이 아니에요. 똥밭을 구르다 보니 온몸에 똥이 묻은 거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저는 올곧은 누님이 좋아요. 누님 옆에 있으면 나도 착해지는 느낌이 든다니까요?”
“너는 원래 착했어.”
“에이, 아무도 안 믿어요. 다들 나를 ‘소악마’라고 부르는데요?”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헤헤, 반점 구석에서 등 돌리고 식사를 하면 금방 들을 수 있어요.”
사실이었다.
그는 구천노도 심통과 시간이 엇갈리면 혼자 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그런 날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구석에 등 돌리고 앉아 먹는다.
그때마다 듣는 소리가 ‘소악마’다.
물론 녹림도와 사파의 고수들이 그랬다는 거다.
그들에게는 파천마군이 ‘대악마’고, 자신은 ‘소악마’였다.
“아니, 왜?”
남궁연은 사람들이 연적하를 나쁘게 말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강호에 나와서 벌인 일들은 녹림도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협객행에 가까웠다.
일반 백성이나, 정파의 협객들에게 못된 짓을 한 적도 없다.
기껏해야 총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전부다.
그런 그를 왜 소악마라고 부른단 말인가?
“자기 집안을 멸문시키고, 얼마 전에는 학산 산채 채주(시산마도 혁무춘)를 억지로 끌고 가 죽게 만들었잖아요. 귀영자군이 한 팔만 잃은 것도 운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 눈 밖에 나면 패가망신은 기본이고, 죽거나 병신이 된다나 뭐라나.”
“…….”
남궁연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확실히 연적하는 싫다는 귀영자군과 시산마도를 강제로 끌고 갔었다. 그중 하나는 이매망량에 잡아 먹혔고, 하나는 외팔이가 됐다.
남궁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연적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괜찮아요. 개똥 같은 세상에서 소악마 소리를 듣는 건데 뭐 어때요? 누님만 날 좋게 보면 돼요.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 눈에 너는 대협객이고, 세상에서 가장 착한 도둑이야.”
“헤헤.”
기분이 좋아진 연적하게 헤실헤실 웃었다.
다정하게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칫했다.
멀리 협상단의 행렬이 보였다.
천지맹 호위무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가던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꽃나무를 보던 제갈승운이 턱 밑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게 말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소똥에 꽂혀 있군요.”
그와 함께 걷던 공손일랑 공손기와 벽력도 팽만호는 무슨 말인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한순간 약속이나 한 듯 피식 웃었다.
거리가 소똥으로 가득한데, 그중 몇에는 꽃가지가 박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총사의 말은 비유였다.
사람들 속에 정파의 꽃인 십전무후가 녹림 총순찰과 함께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거리가 있는 데다가 비유이니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