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22
322회. 주적(主敵)은 바뀔 겁니다
귀영자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서열을 두고 겨루는 녹림대회에서 살아남은 전대 총채주만 태상호법이 된다.
그러니 비록 실권은 없다 하나 녹림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총채주도 태상호법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언젠가 자신도 태상호법이 될 것이기에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 자리이니 당연히 수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태상호법으로 명한다 하셨습니다.”
귀영자군은 다시 한번 말하며 흑철패를 공손히 내밀었다.
이전과 달리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비록 유명교를 이용해서 제거한다는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결말이었다.
앞으로 총채주 자리를 두고 그와 경쟁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안 한다고.”
“예?”
귀영자군이 놀란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살아서 오를 수 있는 녹림 최고의 자리인 태상호법을 거절하다니?
“귀 막혔어? 안 한다고. 또 뭘 시켜 먹으려고. 이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연 공자님, 태상호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어딨어?”
“태상호법이 그런 자리입니다.”
“거짓말.”
연적하는 귀영자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좋은 자리치고 공짜는 없었다.
“구천노도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태상호법이 어떤 자리인지를요.”
연적하의 시선이 심통을 향했다.
“심 노인.”
“예.”
“귀영자군 눈치 보지 말고 사실을 말해 봐.”
“태상호법에 대해서요?”
“어.”
“꿀이지요.”
“꿀이라고?”
“황실로 치면 태상황 같은 자립니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습니다. 살아서 은퇴한 총채주님들을 위한 자리이니 그럴 수밖에요.”
“그럼, 총채주님이 막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킬 수 없는 자리야?”
“그냥 녹림의 어른으로 존중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파천마군 님도 언젠가 태상호법이 되실 테니 절대 건드리지 않으실 겁니다. 총채주님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자리이지요.”
“정말? 그럼 좋은 자리네?”
“예, 녹림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한량이지요. 공자님의 위치가 애매해서 총채주님께서 고육지책으로 임명하신 것 같습니다.”
“애매하다고? 내가?”
“이번에 큰 사고를 치셨잖습니까? 총순찰에서 끌어내리자니 공이 많고, 그냥 두자니 주변에서 말이 많고. 그러니 명예직으로 앉히신 거겠지요.”
“그래서 심 노인 생각으로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받아들이십쇼. 공자님도 일선에 나서는 걸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태상은 어느 문파나 이선으로 물러난 고인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받아들이시면 더 이상 녹림의 일로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겁니다.”
“확실한 거지?”
“그럼요. 생각해 보십쇼. 파천마군 님이 은퇴를 했는데, 신임 총채주가 부른다고 가실 것 같습니까?”
그러자 귀영자군이 얼른 한마디 보탰다.
“신임 총재주도 눈치가 보여서 부르지 않을 겁니다. 태상호법이란 그런 자리입니다.”
귀영자군은 연적하를 부추겼다.
그가 일선에 나서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든 태상호법으로 앉혀야 했다.
귀영자군과 심통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연적하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런 거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지.”
연적하가 흑철패를 받자 귀영자군이 허리를 조아렸다.
“경하드립니다. 태상호법님.”
“경하는 무슨. 앞으로 나를 찾지나 말아. 나를 찾아와서 어쩌고저쩌고 하면 흑철패로 맞을 줄 알아.”
“예, 예, 아무쪼록 만수무강하시고, 소원성취 하십시오. 속하는 이만 물러갑니다.”
귀영자군은 마치 다시 안 볼 사람처럼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연적하가 흑철패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이젠 은거한 사람 대하듯 하네?”
“태상호법은 더 이상 십이마군의 경쟁자가 아니니까요.”
“내가 언제 십이마군과 경쟁을 했다고?”
“공자님은 아니라 해도 십이마군의 입장에서는 신경 쓰였을 겁니다.”
“뭐가?”
“공자님이 파천마군 님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내가? 미쳤어? 난 녹림에 관심 없어.”
“이젠 정말 바라던 대로 되셨습니다. 태상호법은 뒷방 늙은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말만 들어도 개운하네.”
“이제 전쟁이 끝나면 객점으로 돌아가셔야지요?”
“그 전에 외숙에게서 연락이 올지도 몰라. 혼사 이야기가 오가는 것 같더라고.”
“아, 벌써 혼례를 올릴 때가 되었나 보군요. 공자님은 언제쯤 인사를 가실 겁니까?”
“외숙에게서 연락이 와야 가지.”
“그쪽 말고 공자님 본인의 일 말입니다. 남궁가에 가서 정식으로 인사를 하셔야지요?”
“…….”
그제야 연적하는 심통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해야지…….”
“언제요? 전쟁이 끝나면 남궁세가도 남직례성으로 돌아갈 텐데요. 공자님은 객점을 운영하려면 정주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 해야지.”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협상이 끝나면 남궁세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남궁세가를 다시 일으키려면 검왕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겁니다. 분명 십전무후에게 의지를 할 텐데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말해야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던데, 저라도 나서 볼까요?”
“됐어. 심 노인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나선데?”
“망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검왕을 찾아가 공자님과 남궁소저의 관계만 밝히면 끝나는데.”
“하지 마. 밝히긴 뭘 밝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짓을 한 놈 같잖아.”
“공자님과 남궁 소저가 한방을 쓰신 걸 알면 검왕도…….”
“닥치라고. 제발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예. 아무튼 빨리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문이 먼저 돌면 모양새가 이상해질 테니까요.”
“무슨 소문?”
“보란 듯 한방을 쓰시고 소문이 안 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무슨 헛소리야? 심 노인이 그러라고 해 놓고서.”
“어이쿠! 누가 들으면 큰 오해를 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강호행이 대체로 그런 거라고 말씀드렸던 것뿐입니다. 저와 곤륜삼선은 입이 무겁지만, 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디 그렇습니까?”
“하아! 그러니까 소문이 나기 전에 말씀을 드려라?”
“그래야 남궁세가에서 대처를 잘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공자님과 달리 남궁세가는 정파의 핵심 아닙니까? 명예롭지 못한 소문이 돌면 안 되지요.”
심통의 사려 깊은 말에 연적하는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남궁세가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녹림이야 추문이 별것 아니지만 남궁세가에는 불쾌할 것이다.
***
종전 협상 하루 전.
공손일랑 공손기가 총사 신기수사 제갈승운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앉으시지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갈승운은 공손기의 방문 목적을 아는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제 맹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시더군요. 제갈 총사께서 은퇴를 말씀하셨다고요?”
공손기의 찻잔에 뜨거운 찻물을 따르던 제갈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몰골로 군웅들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요. 양해해 주십시오.”
공손기가 제갈승운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바둑판 모양으로 딱지가 앉은 얼굴을 보니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정녕 그게 전부입니까?”
병가(兵家)나 법가(法家)나 강호에 발을 디딘 이상 절반은 무인.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고 칼을 놓는 무인은 없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오히려 복수를 다짐하는 게 정상이었다.
‘자존심 강한 제갈승운이 칼에 맞았다고 은거를 해?’
진심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같은 학자 출신으로 제갈승운을 주저앉힌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제갈승운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공손 형. 강호에 오래 몸담다 보면 가끔 원치 않지만 칼을 놓는 무사를 보게 됩니다. 그들이 왜 칼을 내려놓는지 아십니까?”
공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혼이 꺾인 무사들은 다시 검을 잡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무사들이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칼을 놓더이다.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요?”
“내 몸을 볼 때마다 연적하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릅니다. 그를 찢어 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두렵습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실제로 아물던 살이 다시 벌어지고 피가 나옵니다. 꿈속에서 그를 보면 침상이 피에 흠뻑 젖을 정도입니다.”
“…….”
공손기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칼질이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원한에 사무쳐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런 비참함을 더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설마…….”
“예, 혼이 베였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저 혈과 육만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질 한 번에 혼이 베였다는 말씀을 믿으라는 겁니까? 제갈가가 강호에 나온 지 수백 년인데. 한 번의 칼질에 혼이 죽었다고요?”
“저도 지금까지 죽음의 위기를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지옥도와 같은 전장을 떠돌아다니며 완성되는 게 병법이니까요.”
“그런 분이 왜?”
“저를 벤 것은 아마도 심검(心劍)이었을 겁니다.”
순간 공손기의 얼굴이 굳었다.
심검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마음의 검’이라는 그 추상적인 표현만큼이나 실체도 모호한 게 심검이다.
“천하십대고수들도 심검에 이르지 못했는데, 연적하가 심검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심검이 아니라면, 전장에서 갈고 닦인 제 혼이 단번에 베어졌겠습니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만으로도 내 혼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습니다.”
어느새 제갈승운의 딱지가 앉았던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제갈승운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보십시오. 이 손이 또 피로 물들었습니다. 가슴과 등이 따가운 걸 보니 상처가 갈라지는 모양입니다. 내가 강호에 있는 한, 이 상처는 영원히 치료되지 않을 겁니다.”
공손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피를 줄줄 흘리는 제갈승운을 보니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한 모양입니다. 제갈 형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더 이상 그 이야기로 제갈 형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겠습니다.”
“이번 협상을 끝으로 강호를 떠날 생각입니다. 공손 형께서 정파 연합의 총사를 맡아 주십시오. 맹주님께도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하아! 총사. 지금은 협상을 마무리 짓는 일에 집중하십시다. 아직은 정파 연합을 거론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양측이 종전을 바라니 전쟁은 끝날 겁니다. 천지맹의 해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요. 당분간 정파 연합의 주적(主敵)은 유명교에서 사파로 바뀔 겁니다. 제가 강호를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아!”
공손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갈승운은 정파 연합에서 마주치게 될 연적하가 두려워 은거를 결심한 것이었다.
“당분간이라면, 설마 유명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선회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정파 연합의 힘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하기 어려워서 드린 말씀입니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힘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최고의 상태에서도 당해 내지 못했으니 이후로는 더더욱 어려울 테지요.”
“그러니 차악(次惡)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유명교는 천하 제패와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 왔습니다. 조용히 세력을 넓혀 가는 종양과 같지요. 준비를 철저히 한 후, 단숨에 도려내야 할 겁니다.”
주제가 유명교로 바뀌자 제갈승운의 음성에 생기가 돌았다.
그런 제갈승운을 보는 공손기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