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36
336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허창.
영하강 변.
무곡산장.
안채에 두 노인이 마주 앉았다.
무곡산장의 주인 적염신장 수금서와 금일표국의 국주 왕인국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술병 하나와 간단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따라만 두고 마시지는 않았는지 술잔에 술이 그득했다.
수금서가 확인하듯 물었다.
“소지웅이 오늘 오지 못하는 게 확실하오?”
수금서는 조양전장(朝陽錢莊, 돈 빌려주는 곳)의 주인으로 허창 최고의 재력가였다.
“해사방과 하오문에 의뢰를 했소. 건원표국의 호위들이 그들을 당해 낼 거라 믿지 않소.”
“청주삼협의 무위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염려하지 마시오. 취일배 금불위와 일심화취 단수문으로 충분하니까.”
“왕 국주만 믿으리다.”
수금서가 은근한 눈으로 왕인국을 보았다.
그가 금일표국과 손을 잡은 이유는 건원표국이 꼭 전장을 끼고 다녀서다. 건원표국의 국주는 전장 사업에 관심이 많아 늘 끝에 가면 전장을 세웠다.
그게 수금서가 금일표국의 왕인국과 손을 잡은 이유다.
건원표국이 허창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처음부터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쯤 소식이 올 때가 되지 않았소?”
막 수금서의 말이 끝났을 때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문밖에서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났다.
곧이어 해사방 방주 금불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왕인국과 수금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금 방주, 어찌 되었소?”
왕인국은 금불위가 채 인사를 하기도 전에 결과부터 물었다.
금불위가 씁쓰름한 얼굴로 답했다.
“실패했습니다.”
“실패라고요?”
“허어!”
왕인국의 반문과 수금서의 탄식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왕인국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건원표국에서 호위무사를 더 늘리지도 않았는데 왜 실패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청주삼협의 무위가 그리도 뛰어나더이까?”
왕인국의 연이은 물음에 금불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소지웅이 연적하라는 최상급 낭인을 고용했습니다. 단수문은 그의 일장에 목이 부러져 실려 나갔습니다.”
“헛! 연적하? 설마 녹림의 그 연적하는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녹림의 연적하라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겠습니까? 자기 말로는 정주 출신이라고 하는데, 단수문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수금서가 한마디 거들었다.
“요즘은 개나 소나 연적하라는 이름을 사용하니 그중에 하나일 게요. 전장(錢莊)에 열 놈이 오면 그중 셋은 연적하라고 합디다.”
“최상급 낭인도 남의 이름을 사칭한단 말이오?”
금불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칭이 아니면 동명이인이겠지요. 여하튼 그자가 있는 한 소지웅은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런 제길! 소지웅은 어디서 그런 놈을 물어 온 거지?”
왕인국이 금불위를 빤히 보았다.
아는 게 있느냐는 뜻이다.
별수 없이 금불위는 연적하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소지웅이 계약금 백 냥에 일당 은자 열 냥으로 그와 재계약을 맺었습니다.”
“허면 금 방주는 계약금 이백 냥에 일당으로 은자 스무 냥을 걸지 그러셨소?”
왕인국의 말에 금불위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에게는 그런 돈이 없습니다.”
“일단 약조하시고 나중에 나에게 청구해도 됐잖습니까.”
“왕 국주님의 허가 없이 그런 거금을 약속했다가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요?”
금불위가 왕인국과 수금서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이야 소지웅을 막지 못했으니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지웅을 없앴다면?
그때도 왕인국이 연적하를 사칭한 낭인에게 거금을 내주겠다고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분명히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었다.
금불위의 마음을 짐작한 왕인국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작은 믿음으로 어찌 거사를 도모한다고……. 소지웅이 허창에 눌러앉으면 우리가 수천 냥의 손해를 볼 터인데, 그깟 일이백 냥으로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다니.”
“…….”
금불위는 왕인국의 말에 동의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뒷간에 갈 때 마음과 볼일을 보고 난 뒤의 마음은 절대로 같지 않다.
특히나 상인들은 더더욱 믿을 수가 없다.
당장 소지웅만 하더라도 연적하의 일당을 오십 문에 후려치지 않았던가.
왕인국과 수금서가 뒷수습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다.
마당에서 인기척 소리가 나더니 청지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으리, 건원표국의 소지웅 행수께서 오셨습니다. 어찌할까요?”
멈칫하던 수금서가 힘주어 말했다.
“손님들이 계신 수심각으로 모시고 먼저 가거라. 나는 곧 뒤따라간다 이르고.”
“예.”
청지기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수금서가 왕인국과 금불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아, 이제 어찌하시겠소? 건원표국이 허창에 좌판 까는 걸 보고만 있을 게요?”
금불위는 어차피 자신의 영역이 아닌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자신은 부잡스러운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지 장사꾼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자 돌연 왕인국이 금불위에게 물었다.
“금 방주, 솔직히 물읍시다. 그 연적하라는 낭인 말이오.”
“예.”
“우리 쪽으로 회유가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슬쩍 알아보니 청주삼협이 불러들인 사람이라 하더군요. 청주삼협과 친분이 있다면 돈에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허면 그자를 상대할 만한 낭인이 허창에 있소?”
“제가 아는 한 최상급 낭인은 허창에 없습니다. 정주나 개봉이라면 모를까.”
“낭인 말고 다른 무림의 고수라도 괜찮소.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소?”
잠시 생각하던 금불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라면 당가 출신의 고수가 허창에 있습니다.”
“당가라면 혹, 독을 사용하는 사람이오?”
“예, 본래 그런 곳이 아닙니까. 과거 당가의 외각(外閣)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외각?”
왕인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이름에서 비주류의 냄새가 나서다.
“당가의 직계들은 내각(內閣)에서 지내고, 방계는 외각에서 지낸다 하더군요.”
“그럼 방계라는 말씀이오?”
“방계라고 해도 그는 삼보절명이라 불릴 정도로 독의 기재였습니다. 물론 허창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요. 저만 해도 우연히 그와 교분을 나누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허창의 하오문도 삼보절명이 허창에 있는지 모를 겁니다.”
“은거라도 했다는 소리요?”
“비슷합니다. 당가의 가주에게 견제를 당해 스스로 떠났다고 하니까요.”
“호오! 당가 가주가 견제할 정도의 인물이란 말씀이오?”
“지금이야 아는 이가 없지만, 삼보절명 당운망은 당가 외각의 최고수였다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에게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금불위는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만들어 두었다.
자신의 재간으로는 삼보절명 당운망이 정말 그 정도 고수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마음이 급해진 수금서가 끼어들었다.
“금 방주, 그 사람을 쓸 수가 있겠소? 은거를 했다면서.”
“정식으로 은거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당가의 눈을 피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당가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일에 나서 주겠소?”
“당가는 사천성에 있습니다. 더구나 유명교와의 싸움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요. 외각 출신의 제자가 어디서 무엇을 하건 신경 쓸 처지가 아닙니다.”
그건 얼마 전 당운망과 술을 마실 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날 당운망은 지나가는 말투로 ‘슬슬 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했었다.
최상급 낭인을 구하지 못한 지금 그가 떠오른 것도 그래서였다.
“흐음! 독이라.”
한참 이것저것 묻던 수금서가 움츠러들었다.
다 좋은데 독이라니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언제 그 독에 내가 당할지 알 수 없어서다.
더구나 상대는 당가의 사람.
비록 방계인 ‘외각’ 출신이라 해도 사대세가의 권위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허창의 작은 분쟁에 사대세가를 끌어들였다가 무슨 파란이 일지 모른다.
건원표국에서 당가와 원한이 있는 다른 방파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엉망이 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인국도 같은 염려를 했다.
‘쯧! 이 일은 사대세가가 아니라 군소 방파들 간의 이권 다툼으로 끝나는 게 좋은데…….’
그래야 나중에라도 수습이 가능하다.
하지만 건원표국의 개점까지 고작 사흘이 남았을 뿐이다.
사흘 안에 소지웅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죽이지 않으면 허창 상계에 지각변동이 온다.
‘벌써 신시(오후 3시-5시)니 이제 이틀인가.’
그 안에 최상급 낭인을 격퇴하지 못하면 건원표국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최악의 경우 먹지 못하게 되더라도 일단 찔러는 봐야 미련이 남지 않는다.
왕인국은 수금서와 눈을 맞추었다.
“장주, 삼보절명을 부릅시다.”
“꿀꺽, 그는 방계라 해도 사대세가의 사람이오. 괜찮겠소?”
“그러지 않으면 눈 뜨고 빼앗길 참인데 어쩝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니.”
“헐! 그 말씀은 설마…….”
“그 낭인과 소지웅, 청주삼협을 묻어 버리라고 합시다. 삼보절명에게도 그편이 나을 겁니다. 그렇지 않소?”
왕인국이 금불위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불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겁니다. 그도 소문이 나는 건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금불위가 슬쩍 말끝을 흐렸다.
“다만 뭐요?”
“늘어난 숫자만큼 보수도 생각해 주셔야 할 겁니다.”
“보통 사대세가의 사람을 쓰는 데 얼마 정도나 드오?”
“떳떳한 일을 하는 협객들이야 정해진 금액이 있겠지만……. 암살은 부르는 게 값이라 알고 있습니다.”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보시오. 얼마면 되겠소?”
허창은 소도시라 살수 문파가 없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해사방이 뒷일을 처리해 주고 있다.
그러니 금불위가 부르는 대로 된다고 봐야 했다.
“두당 오백씩이면 삼보절명도 군말 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나름 속으로 견적을 뽑고 있던 수금서가 기막힌 얼굴로 중얼 거렸다.
“설마하니 오백 문은 아닐 테고.”
“예, 은자로 오백 냥입니다.”
수금서가 황망한 얼굴로 왕인국을 보았다.
묻어야 할 자가 다섯이니 이천오백 냥을 내라는 소리다.
백 냥 이백 냥에도 벌벌 떨던 놈이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납득은 간다.
그것은 최상급 낭인과 소지웅, 그리고 청주삼협의 목숨값이니까.
그때 왕인국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장주, 이천오백 냥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반씩 짐을 나누면 별것 아니외다.”
“그렇기는 하오만.”
수금서가 머뭇거렸다.
돈보다도 사대세가인 당가를 끌어들이는 게 마음에 걸려서다.
“소지웅이 오늘 일을 묵과할 리 없소이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 끝을 보십시다. 우리가 그를 죽이든, 그가 우리를 죽이든 해야 끝날 일이니. 그렇지 않소? 금 방주?”
금불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지웅도 그렇지만 건원표국에서 그냥 덮지 않을 겁니다. 건원표국이 허창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려면 모두 묻어야 합니다.”
왕인국과 금불위를 번갈아 보던 수금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절반은 우리 조양전장에서 부담하리다. 그 대신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하오. 누구도 알지 못하게. 금 방주, 아시겠소?”
“그거야말로 저와 삼보절명이 원하는 바입니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 저나 삼보절명이 힘들어지니까요.”
살인 청부 건이 대충 마무리되자 수금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수심각으로 가 보십시다.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담담하다 못해 당당했다.
조금 전까지 망설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허창 거상들의 우두머리다운 품격이 줄줄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