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37
337회. 바람에 밀려간 구름이 태양을 가리다.
무곡산장은 허창 제일의 재력가인 적염신장 수금서의 장원이다.
장원에 있는 수십 채의 전각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전각이 수심각.
그 수심각에 삼십여 명의 손님들이 편하게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두 허창에서 내로라하는 상인들이다. 그들은 태연한 얼굴로 웃고 떠들면서도 연신 한 사람을 힐끔거렸다.
상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은 건원표국의 소지웅 행수였다.
주류를 생산하는 영하대곡(板河大曲)의 주인 공조생이 소지웅에게 말을 걸었다.
“소 행수님,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공조생은 이 자리가 소지웅에게 편한 자리가 아니라 생각해서 그런 인사를 건넸다.
순간 소지웅은 야릇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뭘 알고 그러는지 예의상 하는 말인지 표정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예, 확실히 오는 길이 쉽지 않더군요.”
해사방에 하오문까지 칼을 들이댔으니 정말 어려웠다.
공조생이 후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하대곡은 건원표국을 종종 이용하는지라 지점이 생기면 오히려 좋았다.
“그래도 잘 오셨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약간의 텃세는 있기 마련 아닙니까?”
텃세라는 말에 소지웅은 피식 웃었다.
금일표국의 왕인국은 텃세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갔다.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텃세가 아니라 전쟁이다.
때마침 무곡산장의 주인 적염신장 수금서와 금일표국 국주 왕인국이 들어왔다.
술을 마시던 상인들이 부랴부랴 일어나 수금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으며 상석으로 걸어가던 수금서와 왕인국이 소지웅 앞에서 잠시 멈췄다.
수금서가 호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소 행수님, 잘 오셨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편하게 즐기다가 가십시오.”
소지웅의 눈꼬리가 실룩거렸다.
왠지 그 말이 ‘남직례성으로 돌아가라’는 소리로 들려서다.
소지웅은 애써 담담하게 받아쳤다.
“이제 같은 지역에서 살게 되었으니 종종 뵙겠습니다.”
그러자 왕인국이 슬쩍 끼어들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같은 지역에서 사실지, 돌아가실지. 아무튼 잘 오셨소. 오늘은 허창에서 나는 영하대곡으로 취하도록 마셔 봅시다.”
“글쎄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취하도록 마실 자신이 없군요. 오다가 해사방과 하오문을 만나 죽다가 살아났거든요.”
소지웅이 왕인국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인국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어이쿠! 허창에 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러십니까. 금 방주나 단 문주가 쉽게 싸움을 할 사람들은 아닌데. 그래도 잘 해결된 모양입니다?”
“최근 운 좋게 최상급 낭인을 한 분 모셔서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참석지도 못했을 겁니다. 금 방주나 단 문주는…….”
“오오! 최상급 낭인이라니! 허창에 최상급 낭인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소. 안목을 넓히게 소개를 시켜 주실 수 있겠소?”
이번에는 수금서가 소지웅의 말을 끊고 나섰다.
최상급 낭인이라는 말에 상인들이 한차례 술렁거렸다.
그들도 낭인을 고용하고 있지만 최상급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다.
허창과 같은 소도시에 최상급 낭인이 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왕인국에게 따질 기회를 잃은 소지웅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정주 출신의 연적하 소협입니다.”
‘연적하’라는 말에 수금서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지금 연적하라고 하셨소? 녹림 총순찰 연적하?”
“아닙니다. 그냥 동명이인입니다. 표국에서 녹림의 총순찰을 호위로 쓰겠습니까?”
“아! 그렇구려. 한번 얼굴이라도 보았으면 하는데…….”
수금서가 수심각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눈치가 연적하를 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청주삼협과 함께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각 안으로는 호위를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해서요.”
“아! 그럼 노부는 이만.”
연적하가 마당에 있다고 하자 수금서는 미련 없이 소지웅을 지나쳐 갔다.
어느새 왕인국도 근처의 빈자리에 착석했다.
갑자기 대화 상대를 잃은 소지웅은 멍하니 서 있다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옆자리에서 영하대곡의 주인 공조생이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소지웅은 건성으로 답하며 수금서와 왕인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의 관계가 의심스러웠다.
왕인국 혼자서 벌인 일이라면 더 이상의 전개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수금서까지 관계되었다면?
갑자기 오싹하고 전율이 일어났다.
허창 제일의 재력가마저 가세했다면 해사방과 하오문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어! 분점 하나 내기가 이리도 어려워서야.’
소도시라 저항도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허창 상계의 반발이 상상 이상이다.
만찬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치 해사방과 하오문이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처럼 더 이상 눈을 마주치는 사람도 없었다.
소지웅은 천지장원에 돌아가자마자 연적하에게 은자 백삼십 냥을 지급했다.
이전에 주었던 백오십 문은 거론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미미한 금액이기도 했지만 부끄러워 입에 올리지 못한 것이다.
***
다음 날.
위기를 느낀 소지웅 행수는 하루 종일 천지장원을 떠나지 않았다.
왕인국과 수금서가 손을 잡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다.
천하에 최상급 낭인이 연적하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최상급 낭인을 고용하고, 다시 한두 개 방파를 동원하면 자신은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덕분에 연적하와 청주삼협은 천지 장원에서 빈둥거려야 했다.
집무실이 바라보이는 전각 처마 밑 그늘에 앉아서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야아, 이렇게 놀고 하루에 은자 열 냥이라니 왠지 미안한데요?”
그러자 일수한이 정색을 했다.
“어이쿠! 연 소협, 그런 소리 말게. 아무 일이 없는 게 낫지, 지난번처럼 또 칼부림 나면 곤란해. 소협을 노리고 오는 사람은 정말 보통이 아닐 거야. 나는 생각만 해도 무서워. 그건 정말 끔찍할 거라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연적하는 반박하지 않았다.
여기서 ‘천하십대고수만 아니면 돼요.’라고 말하면 자신만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 게다.
백옥조도 거들었다.
“그건 둘째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소 행수님 곁에 연 소협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올 때는 그에 대한 대비를 했을 거예요. 그런 일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
남직례성에서 협객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들도 싸움은 두려워했다.
연적하는 생각 없이 말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미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문득 자신의 오만함이 보였다.
상대가 천하십대고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다니.
아무래도 녹림의 물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모양이다.
녹림을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녹림도처럼 살고 있으니 이런 위선도 없다.
‘쯧쯧!’
연적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머리통을 ‘툭툭’ 두드렸다.
하루 열 냥이 아니라 백 냥을 받는다 해도 평화로운 게 최선이었다.
새삼 청주삼협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악인들을 처치하며 유명해졌지만 싸움 그 자체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막상 해사방과 싸울 때 저들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하오문이 달려들 때도 당당했다.
돌이켜 보면 남궁천, 남궁연 남매는 물론 설차수, 유근식, 진설하도 그랬다.
그들 모두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싸워야 할 때는 물러서지 않았다.
정파를 위선자라고 배웠지만 모두가 위선자는 아니다.
마치 사파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악인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연적하는 전각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웠다.
저 멀리 새파란 하늘 위로 솜뭉치 같은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좋구나!’
이런 기분 그대로 이틀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 바람에 밀려간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
류왕채촌.
사장촌에서 반 시진(1시간) 거리의 작은 마을에 사십 대 중년인이 나타났다.
해사방 방주 취일배 금불위다.
마을을 지나 강가로 나아간 그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 앞에서 멈춰 섰다.
“계십니까?”
정중한 그의 부름에 낡은 문짝이 ‘덜커덩’ 소리와 함께 열렸다.
“금 방주?”
초로(初老)의 사내가 얼굴을 삐쭉 내밀고 알은체를 했다.
삼보절명 당운망이었다.
“예, 선배님. 그동안 별일 없으셨는지요?”
부스스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 나온 당운망이 슬며시 물었다.
“바쁘신 금 방주께서 이 퇴물을 왜 찾아오셨나?”
“하하! 퇴물이라니요. 이제 슬슬 선배님도 세상으로 나오셔야지요?”
“그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그래도 일은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아무렴. 일도 못 하면 땅 파고 들어가 누워야지. 어떤 일인가?”
금불위가 주변을 살핀 후 나직이 말했다.
“이천오백 냥짜리 일입니다.”
“헐!”
당운망이 놀란 눈으로 금불위를 보았다.
그건 한창 당가의 외각에서 일할 때도 받아 보지 못한 거금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복잡한 일은 아닙니다. 건원표국이 허창에 분점을 내려고 하는 걸 막아 주시면 됩니다.”
“그 일의 책임자가 사라지면 되나?”
“그가 고용한 낭인들이 넷 있습니다. 책임자와 그들을 포함한 다섯이지요.”
“낭인이라고? 왜 해사방에서 처리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치고는 품삯이 높구먼. 어떤 낭인이기에 목숨 값이 그리 비싼가?”
“청주삼협과 연적하라는 낭인입니다.”
“연적하? 설마 녹림의 연적하를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녹림과 관계없는 동명이인입니다. 분위기가 이름을 사칭하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그 이름을 끌어다 쓰는 놈들이 좀 많습니다.”
“아쉽군. 녹림의 연적하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일수에 일심화취의 목을 꺾은 최상급 낭인입니다. 검 쓰는 것을 보았는데 무시무시하더군요. 일검을 버티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호. 그 정도는 돼야지. 청주삼협은 어떤 자들인가?”
“남직례성 청주부에서 협명을 얻은 자들인데 이류급이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류급이라면 칠파일문이나 사대세가와는 무관한 자들인가 보군.”
당운망이 확인하듯 금불위를 빤히 보았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는 일류 수준이 아니면 문외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신 사문을 묻는 것이다.
물론 칠파일문이나 사대세가의 제자와 은원을 맺고 싶지 않아서다.
그들을 건드리면 평생 숨어 살아야 하니까.
“아닙니다. 시정잡배와 좀도둑을 때려잡아 유명해진 자들입니다. 칠파일문과 사대세가의 강호행과는 격이 다르지요.”
“연적하는?”
“그자도 가전 무공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제야 당운망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뒷배가 없는 자들은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맡도록 하지. 언제까지 해결하면 되겠는가?”
“늦어도 내일까지는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촉박하군.”
“건원표국의 지점을 여는 날이 모레라서요. 일단 지점이 열리면 문을 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전이라면 단번에 없던 일이 되지만요.”
“알겠네. 자네에게 수수료는 얼마를 떼 줘야 하는가?”
“오백 냥만 주십시오.”
“좋군. 가서 전하게. 건원표국이 지점 낼 일은 없을 테니 발 뻗고 주무시라고.”
“예.”
“돈은 일을 끝낸 후에 받는 것으로 하지. 늦어도 모레에는 내 손에 쥐여 줬으면 하는데.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돈을 쌓아 놓고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본래 이런 일은 선금을 받아야 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니 일부터 처리해 주지. 자네와 그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걸세.”
말과 함께 당운망이 강가에 있는 거목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멀쩡하던 나무가 무성한 잎을 떨구더니 이내 말라비틀어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무는 상단부터 촛농처럼 스르륵 녹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보았나? 독공이란 이런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