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5
35회. 적은 가까이 두라고 하지 않던가
제법 높게 솟은 산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풍연초가 물었다.
“심 노제, 적사채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소?”
“잘은 모르지만 채주인 통천혈부 혁련후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헐! 도끼를 꽤나 잘 다루나 보군. 하늘에 닿았다고 하는 걸 보니.”
풍연초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뒤 편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우마차에 꽂혀 있는 깃발을 보니 표국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용맹하게 생긴 사십 대 후반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봉황표국의 총표두 이문엽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강호의 친구들은 저를 유운별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문엽은 오봉십걸들의 면면을 가볍게 살폈다.
표행 중 십여 명의 낯선 무사들과 만나니-그것도 팔공산 앞에서-덜컥 겁이 났다. 먼저 나서서 인사를 건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십여 명의 눈에 정광이 번득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저들이 정파의 무인이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마침 그와 가까이 있던 넷째 허임달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답했다.
“그러시군요. 저희는 비룡문의 문도들입니다. 남직례성에 있는 승천문을 찾아가던 중입니다.”
“승천문요?”
이문엽이 조금 놀란 눈으로 오봉십걸들을 바라보았다.
허임달은 상대가 반색을 해서 은근 불안했지만 내친걸음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자 이문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승천문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그게…….”
기세 좋게 나가던 허임달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 없어서다.
머뭇거리고 있는 허임달을 대신해 탁고명이 나섰다.
“그건 본문의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소.”
그러자 이문엽은 자신의 실례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 죄송합니다. 제 처가 쪽에 승천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승천문은 사파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사파였다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탁고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랬군요. 그쪽에서 도움을 요청해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본문과 승천문은 한 가족과도 같은지라.”
‘한 가족과도 같다’는 말에 이문엽의 얼굴이 펴졌다.
“그러셨군요. 혹시 여러분들도 오늘 저 팔공산을 넘으십니까?”
“그럴 예정입니다만?”
“아! 그러시다면 저희와 함께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즘 팔공산의 산적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해서요. 저희가 준비는 단단히 하고 왔지만 그래도 일행이 많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대형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 예, 아무쪼록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탁고명은 기어코 묵례까지 하는 이문엽을 남겨 두고 풍연초에게 갔다.
“형님, 들으셨죠? 봉황표국의 총표두가 함께 산을 넘자는데 어떻게 할까요?”
풍연초의 시선이 구밀복검 심양각을 향했다. 경험 많은 그의 조언을 참고하기 위해서다.
뼛속까지 도적인 심양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셈입니다. 적사채가 나타나면 상황을 봐서 뒤를 덮치고, 별일 없으면 그냥 조용히 산을 넘어가시지요?”
그러자 잔머리가 뛰어난 허임달이 반대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에 대별산채에서 온 분들이 ‘다른 산채의 구역에서 산행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곳이 적사채의 구역이라면, 괜히 좋은 일 하고 욕만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풍연초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좋은 일’이란 적사채를 도와 표국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적사채가 재물을 나누기 싫어서 뻔뻔하게 나오면, 정말 욕만 먹고 끝날 수도 있었다.
고민이 길어지자 셋째 마형도가 한 마디 했다.
“형님, 표국의 무사가 스물이 넘지 않습니까? 우리까지 합하면 서른이 넘는데 적사채가 얼굴을 내밀겠습니까? 굳이 적사채를 만날 게 아니라면 건량도 다 떨어져 가는데 묻어서 가는 것도…….”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오봉십걸들이 한마디씩 했다.
“표국과 함께 가면 좀 나눠 주겠지?”
“쟤들은 먹는 건 잘 먹는다던데.”
“잘 먹긴요. 그래 봐야 숙수가 요리를 하기 전에는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아냐, 종류가 다양하잖아. 쟤들은 돌아다니는 게 일인데.”
“곡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매일 육포나 뜯어 먹는 우리보다는 나을 거예요.”
재물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자 화제는 먹거리로 옮아갔다. 오봉십걸들은 대체로 ‘표국의 음식이 괜찮을 것 같다’로 기울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풍연초는 슬쩍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연적하도 웃으며 먹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걸 보니 동행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적사채를 방문할 게 아니라면 표국과 함께 산을 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마형도의 말대로 건량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둘째야. 가서 동행하는 동안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 봐라. 음식을 준다면 함께 가고, 아니면 그냥 먼저 가라고 해.”
“알겠습니다.”
탁고명은 서둘러 이문엽에게로 돌아갔다.
잠시 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문엽에게 탁고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건량이 좀 간당간당해서요. 표국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겠다면 함께 가고, 그게 아니라면 가까운 마을부터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이문엽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러시다면 저희가 산을 넘는 동안 음식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문엽은 ‘산을 넘는 동안’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자신도 열한 명이나 되는 사람의 식사를 계속해서 책임질 자신은 없었다.
총표두 이문엽은 즉시 봉황표국으로 돌아가 비룡문의 합류를 알렸다.
표두 중 하나가 반신반의한 눈으로 오봉십걸들을 훔쳐보며 말했다.
“총표두님, 오가다 만난 사람들인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곽 표두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아네. 하지만 생각해 보게. 저들이 수상하다고 뒤에 달고 가면, 그게 더 불안하지 않겠나? 다른 건 다 속여도 눈빛은 속일 수가 없네. 자네도 저들의 눈빛을 보면 동행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걸세.”
“예…….”
총표두의 말에 곽원의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이왕 동행하기로 한 마당이라 이제는 총표두의 경험과 안목을 믿어야 했다. 게다가 총표두 말대로 저런 무인들을 뒤에 달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도 꺼림칙했다.
“본래 적은 가까이 두라고 하지 않던가. 가까이에서 저들을 지켜보는 게 더 낫지.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말이야.”
“총표두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로소 곽원의의 표정이 풀어졌다.
***
팔공산 적사채.
도적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채주 통천혈부 혁련후의 움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헉! 헉! 채주님, 산 아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봉황표국이 오고 있답니다.”
“흐흐, 그래? 그럼 준비를 해야지.”
혁련후가 거구를 일으키자 도적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어, 그런데 무장한 인원이 좀 많다고 합니다.”
“몇이나 되는데?”
“서른이 넘습니다.”
혁련후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탕 제대로 뛰고 녹림대회에 참가하려고 했는데 호위가 그렇게 많다니 기분이 잡친다.
부채주 사형도살 노양진이 한마디 툭 던졌다.
“표사 숫자가 그 정도면 표물이 제법 값나갈 것 같은데. 한번 찔러나 볼까요?”
“그렇지? 표사가 그렇게 많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네.”
혁련후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냥 보내면 우리를 우습게 볼지도 모릅니다. 대가리 수는 우리가 훨씬 많습니다.”
노양진이 살살 꼬드기자 혁련후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씨펄! 적사채를 누가 비웃는단 말이냐! 사람들을 죄다 불러 모아라!”
“예!”
밖으로 나간 산적이 움막에 걸려 있는 동종을 가볍게 두드렸다.
뎅뎅뎅.
작지도 크지도 않은 종소리가 산채 주변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혁련후의 움막 앞으로 산적들이 몰려들었다. 그 숫자는 무려 육십에 달했다.
여느 때처럼 노양진이 먼저 바람을 잡았다.
“봉황표국이 팔공산을 지난다고 한다. 표사가 서른 명쯤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우리가 눈뜬장님들도 아니고. 내 말이 틀렸느냐?”
“맞습니다!”
수하들이 화답하자 노양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팔공산의 주인이 누구냐?”
“적사채입니다!”
“그래, 오늘 그 후레자식들에게 팔공산의 주인이 누군지 똑똑히 가르쳐 주자!”
“와아아!”
노양진의 선동에 산적들이 병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분위기가 적당히 달아오르자 노양진이 슬며시 물러났다.
이윽고 혁련후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앞장서자 육십여 명의 도적들이 그 뒤를 따랐다.
팔공산으로 봉황표국의 우마차 한 대가 들어섰다.
그 앞뒤로 도검으로 무장한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대오를 갖춰 걷고 있다.
오봉십걸들은 어쩌다 보니 총표두와 함께 선두에서 걷고 있었다. 총표두 이문엽이 오봉십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경험 많은 이문엽의 의도에 따른 것이지만 오봉십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심양각이 가소롭다는 눈으로 이문엽을 힐끔거렸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표국을 털 계획이 없는 터라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이다.
팔공산에 들어선 지 한 시진(2시간)쯤 지났을까?
쿠르르르.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 위로 통나무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곧이어 보란 듯이 목창 하나가 날아와 길 위에 박혔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잔뜩 빛바랜 연두색 헝겊이 창대에 매달려 흐느적거렸다.
저건 누가 봐도 녹림의 표식이다. 그것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녹림의.
총표두 이문엽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풍연초가 곤란하게 됐다는 눈으로 오봉십걸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른 녹림 구역에 진입한 것으로도 부족해, 표국과 동행까지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스스슥.
사방에서 흉악한 얼굴의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표두 이문엽이 도적들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저는 봉황표국의 총표두 이문엽이라 합니다. 강호에서는 유운별검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지요. 팔공산의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산을 지나기 전에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무쪼록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적들 속에 있던 채주 혁련후가 팔자걸음으로 나왔다.
“흐흐, 이문엽. 간덩이가 부었구나. 대가리 숫자를 늘리면 조용해 보내 줄 줄 알았느냐?”
“그럴 리가요. 혁 대협께 드릴 선물은 따로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이문엽이 품 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얼마냐?”
“은자 백 냥입니다.”
혁련후가 주머니와 이문엽을 번갈아 보았는데 표정이 애매했다. 물론 표국 하나의 통행세로 치면 후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녹림대회에서 쓸 돈을 생각하면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부채주 노양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녹림에 큰 행사가 있어서 돈이 더 필요하게 됐다. 그러니 백 냥을 더 내놓든지, 마차를 두고 돌아가거라!”
백 냥이나 더 내놓으라는 말에 이문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백 냥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게다가 요구대로 백 냥을 더 내놓는다고 물러난다는 보장도 없다. 녹림의 도적들은 제 기분에 따라 돈을 올리고 내리고 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호락호락 당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 줘야 협상이 잘 풀릴 것 같다. 그러려면 비룡문의 협조가 필수다.
고민하던 이문엽은 옆에 있는 풍연초의 생각을 떠보기로 했다.
“풍 대협, 저들이 백 냥을 더 내놓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번 얕보이면 껍데기까지 홀랑 벗겨 먹으려고 들 텐데…….”
그러자 풍연초가 난감한 얼굴로 수염을 잡아 뜯었다.
눈치를 보니 이문엽은 백 냥을 순순히 내줄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남의 구역에서 이런 흥정에 끼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