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79
379회.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
북진의 실패가 믿어지지 않는 건 소기 진우생만은 아니었다.
남진무사 동유수와 함께 좌측 종루(鐘樓) 위에서 지켜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전에 북진이 실패했다고 했었죠?”
“그렇소.”
“왜 실패한 건가요?”
“그건 모르오. 그 임무에 투입된 북진의 고수들은 모두 죽었소.”
“…….”
눈을 끔뻑이던 연적하가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장 법사와 열 명의 호위, 그리고 깃발을 들고 따라다니는 네 명의 기수(旗手)가 전부다.
기수가 든 형형색색의 깃발에 각각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유명교 내에서 현장 법사의 위치가 격하되지 않았다면 호위는 전과 같을 것이다.
‘저들로 북진의 고수들을 몰살시켰다고?’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변복을 한 금의위와 호위들이 격돌했다.
금의위는 무력을 기반으로 한 기관이다.
그러다 보니 현장 실무자의 경우 위로 올라갈수록 강하다.
예컨대 금의위 위사보다는 ‘소기’, 소기 보다는 ‘총기’, 총기 보다는 ‘백호’, 백호보다는 ‘천호’, 천호보다는 ‘남진무사’가 고수인 식이다.
천호 능가경은 칠파일문의 고수와 견줄 만한 고수였다.
그런 능가경과 호위대장 천지림이 가장 먼저 맞부닥쳤다.
능가경의 수춘도가 포악하게 천지림을 몰아붙였지만 천지림도 만만치 않았다.
차차차창-.
두 사람 사이에서 쉬지 않고 불꽃이 튀었다.
수춘도와 장검의 날이 움푹움푹 파이는 격전이라 자칫 한눈을 팔면 팔다리 하나쯤은 뭉텅 잘릴 판이다.
뒤이어 총기 종사명이 열 명의 소기와 함께 나머지 호위를 덮쳤다.
평범한 호위들은 종사명을 당해 내지 못했다.
종사명의 수춘도가 종횡으로 움직일 때마다 호위들 몸에서 피가 튀었다.
소기들도 호랑이처럼 날뛰는 종사명 못지않았다.
호위라고 해 봐야 낭인 수준.
그에 반해 소기들은 단지 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전으로 다져져 마침내 금의위 하급 지휘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소기의 칼에 호위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폭풍처럼 현장 법사의 호위를 처리한 소기들이 잠시 멈칫했다.
아직 지휘관인 천호 능가경의 싸움이 끝나지 않아서다.
순간 총기 종사명의 칼끝이 현장 법사를 향했다.
“머뭇대지 말고 쳐라!”
말과 함께 종사명이 현장 법사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 그의 눈에는 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현장 법사의 사람이라고 해 봐야 깃발을 든 네 명의 기수가 전부.
종사명은 단숨에 현장 법사의 목을 베고 자리에서 이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호위가 모두 쓰러졌음에도 현장 법사는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표정도 담담했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염불이 흘러나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유명대교주 무량수여래불…….”
그의 염불과 동시에 ‘천상천하’의 기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가 달려오는 종사명에게 깃발을 휘둘렀다.
화르륵-.
시뻘건 화염이 종사명을 덮쳤다.
종사명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종사명은 눈 깜빡할 사이에 머리를 움켜쥔 모습으로 굳었다.
시커멓게 탄 그의 몸에서 하얀 연기가 폴폴 올라왔다.
뜻밖의 상황에 소기들은 크게 놀랐지만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런 때일수록 빠르게 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다.
소기들이 벌 떼처럼 ‘천상천하’의 기수를 향해 달려갔다.
기수가 불을 내뿜자 전진파 도사 백우선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기수가 내뿜은 불을 술법이라 생각해 대응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천상천하’의 기수가 이번에는 수평으로 길게 깃발을 휘둘렀다.
차라라락-.
소기들이 황급히 수춘도로 다가오는 깃발을 막았다.
그러나 깃발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깃발에 맞은 수춘도가 뒤로 튕겼다.
퍼퍼퍽-.
기발에 담긴 공력이 소기들을 압도한 것이다.
소기들은 강력한 깃발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깃발은 끈질기게 소기들을 물고 늘어졌다.
한편 백우선은 기수가 다시 깃발을 휘두르자 다급히 항마진언으로 맞섰다.
그러나 깃발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술법이 아니라 강력한 경력이었다.
소기들의 수춘도를 튕겨 낸 경력이 백우선을 후려쳤다.
“컥!”
술사인 백우선은 맥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곧이어 힘겹게 일어난 그는 ‘웩웩’거리며 검붉은 피를 게워 냈다.
단 한 수에 깊은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그사이 두 명의 소기가 깃발에 맞고 쓰러졌다.
“윽!”
“큭!”
큰 충격을 받은 듯 두 명의 소기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지면에서 꿈틀거렸다.
그러자 허공으로 훌쩍 뛰어오른 기수가 깃대로 소기들의 머리를 찍었다.
다른 소기들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머리가 박살 났다.
압도적인 기수의 무력 앞에 소기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안 되겠군. 먼저 가겠소.”
남진무사 동유수가 종탑 아래로 몸을 날렸다.
동유수의 신형이 깃발을 휘두르는 기수를 향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당을 내려다보던 구천노도 심통이 말했다.
“북진이 왜 몰살당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저놈들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시체.”
짧게 답한 연적하가 품에서 청사(靑蛇)를 꺼내 들었다.
‘천상천하’의 기수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종탑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도를 치켜든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때 한쪽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큭!”
‘천상천하’의 기수가 돌아보니 호위대장 천지림이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결국 암습자의 승리로 끝난 모양이다.
하지만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천지림을 벤 천호 능가경은 수춘도를 고쳐 잡고 ‘천상천하’의 기수에게 달려갔다.
“이놈!”
남진무사 동유수와 천호 능가경의 합공에도 기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깃발을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휘이이잉-.
깃발에서 강풍이 일어나 동유수를 덮쳤다.
동유수는 천근추의 신법으로 자세를 유지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강풍에 휘말린 동유수의 신형이 저만치 먼 곳으로 밀려났다.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한 깃발이 능가경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능가경은 수춘도를 들어 올려 깃발을 막아 냈다.
그러자 기수는 깃발을 회수하는가 싶더니 깃대를 지면에 박았다.
쿵-.
곧이어 능가경을 중심으로 사방 오 장(약 15미터)의 땅이 쩍쩍 갈라졌다.
기환술이었다.
“헉!”
능가경은 눈속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한 걸음만 내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였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허공에 내딛는 순간 몸이 앞으로 훅 쏠렸다.
이건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다.
능가경은 눈앞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기수를 보면서도 꼼짝할 수 없었다.
단숨에 두 사람을 떨쳐 낸 ‘천상천하’의 기수가 가까이 있던 소기에게 짓쳐 들어갔다.
진우생은 기수가 다가오자 미친 듯 도를 휘둘렀다.
쉬이익- 쉬익-.
공포에 사로잡힌 진우생의 코앞에서 기수는 돌연 허공으로 훌쩍 몸을 띄웠다.
뒤이어 깃대로 진우생의 양미간을 가볍게 내리찍었다.
진우생은 갑자기 훅 하고 다가오는 깃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깃대가 진우생의 이마를 꿰뚫기 직전, 종탑에서 기수를 향해 파란빛 덩어리가 날아왔다.
쐐애액-.
순간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기수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기어검?’
깃대를 돌려 저 빛을 막거나, 피하지 않으면 자신도 온전치 못할 게 분명하다.
기수는 황망히 한 걸음 물러나며 깃발로 빛을 쳐 냈다.
콰직-.
‘응?’
예상 밖의 소리에 기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깃발로 향했다.
다음 순간 기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뚝 부러진 깃대를 뒤로하고 파란빛이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퍽-.
빛 덩이가 기수의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기수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털썩.
기수가 쓰러지자 현장 법사의 얼굴에 가득하던 여유도 사라졌다.
갈라졌던 땅도 본래대로 돌아갔다.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던 동유수가 빠르게 능가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살아남은 소기들이 동유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하늘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뚝 떨어져 내렸다.
연적하와 심통이다.
강력한 불청객의 등장에 현장 법사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빈승은 황실 법사인 현장이오. 당신들은 누구이기에 역도(逆徒)들을 도우려 하는 것이오?”
그러자 심통이 스산하게 웃으며 답했다.
“흐흐흐, 네놈이 황실 법사면 나는 부처다. 이리 와 대가리를 조아리거라.”
무식하고 저급한 대거리에 현장 법사의 허연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이윽고 화를 삭인 현장 법사가 입을 열었다.
“무도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니 사악한 무리들이로구나. 십팔 층 지옥에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릴 인간들이로다.”
말과 함께 현장 법사는 들고 있던 선장으로 바닥을 ‘쿵’ 하고 찍었다.
그러자 현장 법사 뒤에 묵묵히 서 있던 세 명의 기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유아독존’의 깃발을 든 기수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깃발을 휘두르자 어둠이 내려앉으며, 사방에서 귀곡성이 울렸다.
“흑흑흑-.”
“오호호홋-.”
“꺄아아악-.”
울음소리와 웃음소리, 비명이 점점 커졌다.
겨우 서 있던 백우선은 바닥에 털썩 앉아 항마의 진언을 외웠다.
그러나 귀곡성은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갔다.
귀곡성에 대항하던 백우선은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천지간의 사악한 주술은 사라져라!”
“…….”
한순간 거짓말처럼 귀곡성이 멎었다.
뒤이어 칠흑 같은 어둠이 물러가며 사물도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술법이 깨지자 ‘유아독존’의 기수가 ‘우웩!’ 하고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삼계개고’의 기수가 벼락처럼 달려 나가 깃발을 휘둘렀다.
콰콰콰콰-.
흡사 칼날 같은 경력이 연적하와 심통을 향해 돌풍처럼 몰아쳐 갔다.
“갈(喝)!”
유엽도를 뽑아 든 심통이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돌풍을 베었다.
구천세법 이 식 용무천상(龍武天祥)이다.
유엽도에서 쏟아져 나온 강력한 도기에 돌풍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당황한 기수가 급히 깃발을 회수할 때다.
심통의 도 끝에서 뻗어 나간 도기(刀氣)가 기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화끈한 통증에 ‘삼계개고’의 기수는 황급히 제 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머리는 몸통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잇달은 동료의 죽음에 대경실색한 ‘아당안지’의 기수가 지면에 깃대를 깊이 박았다.
쿵.
깃발을 중심으로 하얀 안개가 쑥쑥 차올랐다.
안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장 법사와 기수를 집어삼켰다.
“공자님!”
심통의 다급한 외침에 연적하가 다시 한번 언령을 펼쳤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남천의 이름으로 명한다! 안개여 사라져라!”
스스스-.
희미한 소리와 함께 안개가 흩어졌다.
“헉!”
유엽도를 말아 쥐고 앞으로 뛰쳐나가려던 심통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당안지’의 기수는 물론 현장 법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온 심통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상에! 흔적도 없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 겁니까?”
기가 막히기는 연적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기감으로도 기수와 현장 법사가 달아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까닭이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연적하가 씁쓰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아당안지(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라는 글대로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