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84
384회. 아직 한 분이 남았어요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와룡검객 연무백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호응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함께 온 일행들과 속닥거렸다.
“지금 연가무관의 관주가 철혈방과 싸우겠다고 한 건가? 제자도 없이?”
“낭인으로 대체할 모양입니다. 그런데 연가무관에 올 사람이 있으려나.”
“쯧쯧!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자존심 상하더라도 지금은 나 죽었소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텐데.”
“그러게요.”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연무백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뜻은 가상한데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고성촌의 무관이 다 덤벼도 안 될 일을.”
“쩝, 누군 의기가 없어서 숨 죽이고 지내나? 능력이 안 되니까 참고 견디는 거지.”
“젊은 혈기가 그래서 무서운 거야.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니까.”
군웅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연무백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안면 있는 상방과 정의맹과 천지맹 시절 알게 된 군소 방파를 초대했건만 누구 하나 격려하는 사람이 없다.
연무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연설주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객청에서 회의를 할 때만 해도 희망적이었다.
어쩌면 철혈방도들을 물리친 직후라 더 자신감에 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군웅들의 냉정한 반응을 보니 뜨겁던 열기가 확 사그라들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철혈방은 방도가 백여 명이나 되는 거대 방파로 낙양의 암흑가를 잡고 있다.
그에 반해 연가무관은 이제 막 개관해 제자도 하나 없는 시골 무관.
‘너무 흥분했구나.’
고작 철혈방의 외당 당주 하나를 물리치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끓어올랐던 피가 식으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망 이철원의 말대로 고성촌을 떠나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싸워야 하나?
객청에서와 달리 연설주가 진퇴 여부를 두고 다시 고민할 때다.
연무백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중과부적이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줘야지요. 누가 압니까? 지렁이인 줄 알고 밟았는데 이무기였을 줄.”
의미심장한 연무백의 고백에 군웅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절절한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아서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연가무관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연씨들의 과거사를 아는 상방 사람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연무백을 보았다.
연가무관의 전신인 ‘와룡장’은 나약함과 굴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참월검객 연무룡이 칩거한 ‘언사의 와룡장’은 월하선자에게 짓밟혔고, ‘궁장의 와룡장’은 녹림의 연적하가 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연씨들은 목숨 걸고 싸우기보다는 회피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지금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철혈방에 맞서겠단다.
저 연씨들의 마음에 변화가 온 것이다.
“연가무관과 함께하실 분들은 연회가 파한 뒤에 남아 주십시오.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빈객(賓客)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들께서는 이런 저의 뜻을 널리 알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연무백은 연승백과 연설주를 이끌고 안채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연무백의 무모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
충격에 휩싸인 양이화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떻게든 철혈방과 타협할 줄 알았는데 싸우겠다니?
이 년 전 궁장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그녀는 눈앞이 캄캄했다.
연회가 파한 뒤에 남아 달라는 말 때문인지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행여나 빈객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일찌감치 떠나는 분위기다.
사람으로 가득 찼던 연회장은 금방 한산해졌다.
‘이게 세상 인심이지.’
양이화가 씁쓸한 눈으로 빈자리가 더 많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몇 사람이나 남아 주려나?’
그래도 정의맹과 천지맹 시절에 알게 된 군소 방파를 불렀다니 열 명은 남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 손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양이화의 귀에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남아 있으면 빈객이 되는 거예요?”
***
객청.
“손님들 중에 몇이나 남을 것 같은가?”
정가장 장주 산해검 정격천의 물음에 연무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들 철혈방에 맞서기를 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낙양의 밤을 지배하는 자들이니.”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외당 당주 하나를 제압했다고 낙관적으로만 봤던 것 같습니다.”
연무백의 자조 어린 말에 정격천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삼십여 명의 철혈방도가 맥도 못 추고 당하는 걸 보고 가슴이 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혹시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손님들 앞에서 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연씨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닫게 해 줄 생각입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우리 정가장은 자네를 돕겠네. 돈은 급한 대로 은자 오백 냥을 먼저 보내 주도록 하지. 얼마가 들든 신경 쓰지 말고 낭인들을 모으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녹림 쪽은 괜찮겠나? 궁장에 와룡장을 세웠을 때 그들의 방해로 결국 봉문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철혈방과 달리 대적불가의 존재들이라…….”
“괜찮을 겁니다.”
“연 공자와 교감이 있었는가?”
“그런 아닙니다만, 와룡장만 아니면 괜찮을 겁니다.”
연무백은 연적하가 연씨들의 ‘와룡장’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반대할 마음이었다면 심법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연적하는 원한을 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호천맹에 투신하는 대신 연가무관을 세운 것도 그래서다.
애매한 대답에 정격천이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녹림의 사주를 받고 철혈방이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억측인가?”
한순간 객청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과거 연적하의 행보를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소리는 아닌 까닭이다.
연승백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철혈방 뒤에 그놈이 있다면 죽여 버리겠습니다.”
“승백아, 확실하지 않은 일을 두고 함부로 떠들어 대지 마라. 설령 적하가 관여되었다 해도 형제를 향해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다.”
“형제라고요? 그놈과 우리가 왜 형제입니까? 형님은 그놈에게 당한 일을 잊었습니까? 궁장의 와룡장만 망하지 않았으면 나도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형님은 그놈을 감싸시는 겁니까?”
외팔이가 된 연승백이 빈 소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연승백이 울컥한 것도 이유가 있다.
궁장의 와룡장이 망한 뒤에 갈 곳 없던 두 형제는 정의맹에 투신했다.
정의맹이 천지맹으로 확대 개편된 뒤에 연승백은 전투 중 한쪽 팔을 잃었다.
연승백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궁장의 와룡장만 건재했더라면 정의맹에 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가 팔을 잃은 건 안타까운 일이나 모든 걸 적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아니요. 제가 이렇게 된 건 모두 그놈 때문입니다. 그놈은 궁장의 와룡장을 망하게 했고, 저에게 가짜 법보까지 떠넘겼습니다.”
“그에게 검을 달라고 한 건 우리였다. 그는 자신의 검을 법보라고 한 적이 없어.”
연설주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법보가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 모두가 적하 손에 놀아났던 거예요.”
“쯧쯧! 아무리 그가 미워도 말은 바로하자. 그를 몰아붙여 연 숙부의 검을 회수한 건 우리였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연무백의 지적에 연승백과 연설주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억지로 받아 낸 건 사실이었다.
연씨들의 언쟁을 지켜보던 정격천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관주는 이번 일에 연 공자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가?”
“예. 적하는 연씨의 일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큰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미 오래전에 연씨를 잊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네. 사람들을 끌어모으면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을 걸세. 철혈방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수는 아니니까.”
정격천의 말에 연씨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때 문밖에서 일꾼의 음성이 들려왔다.
“관주님, 손님들이 가신다고 합니다.”
그말에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이 초대한 손님들이니 배웅을 해 주기 위해서다.
대청마루 앞은 상방 관계자들과 군소 방파 무림인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지만 남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는 대문 밖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선 연무백의 눈에 한가해진 연회장이 들어왔다.
그래도 아직 서너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루한 행색을 보니 지나가던 길에 들른 뜨내기 낭인들인 모양이다.
지금은 그들이라도 환영할 상황.
객청으로 들어가려던 연무백이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무인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백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더 드십시오. 저는 연가무관의 관주인 연무백이라 합니다.”
“아, 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는 이만.”
“저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행여나 연무백이 잡을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넋을 잃고 서 있는 연무백에게 양이화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처를 힐끔 본 연무백이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다 갔구려.”
“아니요. 아직 한 분이 남았어요.”
“누가 남았다는 거요?”
“빈객요.”
양이화가 연회장 구석을 가리켰다.
의자 옆에 대나무 등짐을 세워 놓고 누군가 열심히 먹고 있었다.
하늘로 뻗친 산발한 머리와 꾀죄죄한 의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등짐만 아니었으면 개방 방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사람이 남겠다고 했소?”
“네. 놀라지 마세요. 무당파 속가제자시래요.”
무당파 속가제자라는 말에 연무백의 눈이 반짝였다.
칠파일문의 제자는 일당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뒤따르던 연승백과 연설주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연가무관의 관주인 연무백이라 합니다.”
연적하가 물고 있던 닭다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어느새 연회장은 텅 비어 있었다.
‘쯧! 사람들하고는.’
약장수 앞에 모인 사람들처럼 구경만 하고 쏙 빠져나간 모양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연적하가 고개를 돌렸다.
“무당파 속가제자 남천입니다.”
“아! 이제 보니 남 소협이셨군요. 내자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 연가무관의 빈객이 되고자 하신다고요?”
순간 연적하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도호(道號)가 ‘남천’인데 이름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자신이 연씨라는 게 알려지면 집안 내력까지 파고들 것 같아서다.
“예.”
“송구스럽지만 스승님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나중에라도 꼭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어서요.”
“오룡궁의 청불도 노사(老師)십니다.”
“오룡궁이라면…….”
연무백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제야 아무렇게나 놓인 대나무 등짐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