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85
385회. 나도 똑같은 놈이야.
정의맹 시절의 무인들은 대체로 술법에 무지했다.
유명교만 아니었다면 술법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명교 십두마병과 풍지산에 펼쳐진 팔상팔문진으로 술법과 술사는 무림방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로 자리 잡았다.
천지맹에서는 술사를 본격적으로 모집했고, 그것은 호천맹까지 이어졌다.
정의맹과 천지맹에서 활동한 와룡검객 연무백과 연승백은 단번에 남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룡궁 출신이라면 술사다.
연무백과 연승백이 애매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호천맹이나 거대 방파라면 모를까?
연가무관처럼 작은 시골 무관에 술사는 계륵이나 마찬가지였다.
철혈방과의 싸움에서 쓸 일이 없는 까닭이다.
상방에서 활동해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연설주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룡궁요? 무당파에 오룡궁이 있나 봐요?”
연적하가 답하기 전에 연무백이 먼저 나섰다.
“너는 모르겠지만 강호에서 오룡궁의 술사들은 유명하다. 남 소협,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무백은 정중하게 읍을 해 보였다.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무당파 속가 제자가 빈객으로 온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철혈방을 압박하는 것은 물론, 낭인의 모집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아, 예.”
연적하가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연무백과 연승백, 연설주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심통도 못 알아봤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무당파 속가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극진하게 대접하니 기분이 묘했다.
모두가 무당파라는 이름이 만들어 낸 마법이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씁쓰름한 느낌이다.
녹림에 있을 때는 받아 보지 못한 대접이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때 양이화가 설명하듯 말했다.
“참, 남 소협의 얼굴은 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된 거래요. 마마처럼 전염되는 병이 아니니까 편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런. 그랬군요. 불편하실 텐데, 차도는 있는 겁니까?”
연무백이 조심스럽게 연적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의 부스럼이 찜찜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이야.
“좋아지고 있어요. 늦어도 여름에는 완치가 될 거예요.”
“다행이군요. 남 소협의 진면목을 꼭 보고 싶습니다. 다 나으면 나중에라도 한번 들러 주십시오.”
“…….”
연무백의 덕담에 연적하는 화답하지 않았다.
언법(言法)을 익힌 뒤로 지키지 못할 약속은 가급적 피하는 중이었다.
그의 침묵에 연설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술사 나부랭이가 무당파를 믿고 연무백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다.
시누이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 양이화가 급히 나섰다.
“아, 참. 남 소협. 약속 없으시면 오늘 저녁은 연가무관에서 함께 드시는 게 어떨까요? 빈객이 되셨으니 서로 인사도 나눌 겸 해서.”
연적하는 구천노도 심통을 생각해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추한 몰골의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죠.”
연설주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큰 오라버니 질문은 씹으면서 양이화에게 따박따박 답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노련한 연무백이 자연스럽게 한걸음 내디뎌 연설주의 시야를 차단했다.
“남 소협, 묵으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너희는 정가장 분들을 대접하고 있거라.”
연무백의 말에 연승백과 연설주는 홱 하고 돌아서 가 버렸다.
“제 동생들입니다. 아직 철이 덜 들었지만, 심성은 착한 아이들입니다.”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훨씬 어린 상도(남연객점의 점소이)도 저러지 않는데 철은 무슨.
“‘철들자 망령(妄靈)이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풋!”
농담인 듯 진담 같은 연적하의 말에 양이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연적하는 자신의 가벼운 대거리에 양이화가 반응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남수경을 닮은 것 같았다.
자신과 대화도 잘 통하고, 이런 얼굴임에도 꺼려 하지 않고 친절하다.
다른 건 몰라도 연무백이 혼인은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객청.
손님 배웅을 나갔던 연승백과 연설주가 돌아오자 정가장 장주 산해검 정격전이 물었다.
“남아서 돕겠다는 사람은 있던가?”
연승백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사람이 남기는 남았습니다.”
“오! 잘됐군. 잘됐어. 그 하나가 열이 되고, 스물이 될 수도 있음이야. 어디의 누구라고 하던가? 낭인인가?”
“무당파 속가제자라고 합니다. 형님이 숙소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오오! 하늘이 도왔군. 하늘이 도왔어.”
정격천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무당파 속가제자라면 싸움의 판도를 바꿀 수 있으니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술사라고 하네요.”
“…….”
정격천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잠시 들떠 있던 정가장 무인들도 금방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던 정격천이 되물었다.
“술사라고?”
“예, 오룡궁의 속가제자라고 합니다.”
“허! 아쉽게 됐군. 뭐, 그래도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이 없네. 분명 낭인들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될 걸세. 철혈방에서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테고.”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별일 아닙니다.”
“뭔데 그러는지 말해 보게.”
연승백이 머뭇거리자 연설주가 대신 나섰다.
“술사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더라고요. 여색은 어찌나 밝히는지, 큰 오라버니 질문에는 대꾸도 안 하면서 언니랑만 말을 하고. 정말 무당파 제자만 아니었으면 면상을 그냥……. 아니, 얼굴을 때리면 안 되겠구나. 더러운 게 묻으니까.”
연설주의 말에 정격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보니 술사라는 사람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화가 나더라도 참게. 그런 사람이라도 있어야 철혈방에 대적할 수 있다네.”
“알아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잘했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걸세.”
“맞아요. 인격은 얼굴에 나타난다고 하잖아요? 그 인간은 정말…….”
연설주는 무당파 속가제자 남천이 얼마나 고약한 인간인지 늘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하자 속이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처음 만나는 인간인데 왜 이렇게 하는 짓마다 언짢은지 모르겠다.
***
연무백이 연무장 옆의 전각을 가리켜 보였다.
“저곳이 빈객들의 숙소로 사용될 곳입니다. 다섯 개의 방이 있으니 그중 하나를 쓰시면 됩니다.”
“예.”
연적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때다.
아까부터 대나무 등짐을 힐끔거리던 양이화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참, 적선 수행 중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무당파는 속가제자도 그런 일을 하나요? 도사들만 하는 것으로 들어서요.”
제법 예리한 지적에 연적하는 머뭇거렸다.
‘기명제자라는 걸 밝혀도 되려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가 청불노 노사님의 기명제자라서요. ‘남천’은 제가 받은 도호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남 소협이라고 했네요.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죠?”
“그냥 ‘남천’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그럼 앞으로는 ‘남천 소협’이라고 부를게요.”
양이화는 굳이 성씨를 묻지 않고 넘어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무백도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사실 남천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니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궁금했다.
“남천 소협은 도사가 되실 겁니까?”
“아니요.”
연적하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도사처럼 재미없고 따분한 인생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하하, 그러시군요. 그럼 따로 계획하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돈을 모아서 객점 주인이 되어 볼까 해요.”
“그것도 좋지요. 나중에 객점을 차리시면 꼭 한번 연락 주십시오.”
난감한 요청에 연적하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관주님은 왜 무관을 세운 거예요?”
“본래 제 꿈은 선친의 뒤를 이어 장원을 꾸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더군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을 말아먹었습니다.”
“말아먹었다고요?”
“예, 선친이 세운 장원은 유명교에 빼앗겼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세운 장원은 은원에 휘말려 망했고요. 또 다시 은원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팔자가 사나운지 조용히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하.”
어딘지 허탈한 연무백의 웃음에 연적하는 입맛이 썼다.
그가 두 번째로 세운 와룡장을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까 보니 동생분 한쪽 팔이 보이지 않던데…….”
“천지맹에서 유명교와 싸울 때 잃었습니다. 두 번째 장원을 말아먹고 갈 곳이 없어 동생과 함께 정의맹에 의탁했었거든요.”
“아…….”
“그 일로 동생들 가슴에 응어리가 좀 있습니다. 성격도 까칠해졌고요.”
연무백의 말에 연적하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상황은 역전되어 있었다.
적선 수행 때문일까?
얄밉고 원망스럽기만 하던 배다른 형제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어이쿠! 초면에 제가 별소리를 다 했네요. 본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해해 주십시오.”
연무백의 말에 양이화가 배시시 웃었다.
“남천 소협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남들 앞에서 집안 얘기를 안 하시던 분이.”
“내가 그랬소?”
“심지어 나에게도 잘 하지 않았다고요.”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랬소.”
그러자 양이화가 연적하를 향해 말했다.
“남천 소협, 보셨죠? 이런 분이시라니까요. 그 안 좋은 이야기를 초면에 잘도 하셨네요.”
“하하…….”
연적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재치 있고 배려심 깊은 양이화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
숙소에 짐을 푼 연적하는 고성촌에서 가장 큰 주루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심통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창가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심통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통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적하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아니, 공자님. 왜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 기다리다가 술에 빠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쯧! 주루 주인이 술에 빠져 죽으면 되나.”
연적하는 혀를 차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즐기는데 화끈한 기운이 목구멍으로 치밀고 올라왔다.
“쿨럭! 쿨럭!”
그 모습을 본 심통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강한 사내들의 술이라는 죽엽청입니다. 공자님도 이제는 향설주에서 벗어나셔야지요. 어떻습니까?”
연적하가 시큰둥한 얼굴로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저 그래. 술이 거기서 거기지.”
“거기서 거기라니요?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다. 마시고 취한다는 점에서야 같겠지만, 술마다 가슴 절절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즐겨 드시는 향설주로 말씀드리자면…….”
신나게 술 얘기를 이어가던 심통이 말끝을 흐렸다.
연적하의 표정이 어두워서다.
“왜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 빌어먹을 연씨들에게 문전박대라도 당하신 겁니까?”
“나도 연씨야.”
“누, 누가 뭐랍니까? 그래도 공자님은 그 후안무치한 연씨들과는 다르십니다.”
“아니야. 나도 똑같은 놈이야. 내가 피해 본 것만 알지 남의 사정에는 관심 없다고. 젠장! 심 노인.”
“예?”
“복수를 할 때 원수의 입장을 고려해 줘야 돼? 그런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십니까? 원수를 처참하게 짓밟으려고 복수하는 건데, 입장을 고려하다니요? 부처님도 그러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