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3
393회. 나도 이제 마음 편히 살아야지
연적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소청단이라고 하는 단약이에요. 네 개를 담았으니 양 부인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소청단이라는 말에 양이화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무림인치고 소청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복용하면 무려 십 년의 공력을 얻게 해 준다는 무가지보(無價之寶).
남천의 능력을 볼 때 소청단은 진품일 게 분명하다.
“이 귀한 걸 왜…….”
“사과의 뜻으로 드리는 거예요. 그럼 이만.”
연적하는 양이화에게 읍을 한 후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사라져 버렸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양이화는 미처 그에게 묻지도 못했다.
사과의 뜻이라니? 무슨?
황당한 얼굴로 서 있는 양이화에게 와룡검객 연무백이 다가갔다.
“방금 남천 소협이 등짐을 지고 서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오?”
“가셨어요.”
“아니 이 밤중에 왜?”
“바쁜 일이 있다고 했어요. 그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이 있소?”
그녀가 들고 있던 기름종이를 보여 주었다.
“저에게 이걸 주고 가셨어요.”
“그게 뭐요?”
“그분 말로는 소청단이래요.”
“소청단? 정말 남천 소협이 소청단을 주고 갔다는 거요? 무당파의 그 소청단을?”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연무백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찜찜했다.
소청단과 같은 보물을 왜 자신의 처에게 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다.
“왜 소청단을 주는지 혹 물어보았소?”
“사과의 뜻이라고 했어요.”
“허! 사과의 뜻이라. 이거야 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있나…….”
연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분에 넘치도록 은혜를 베푼 남자가 사과의 뜻이라며 소청단을 주고 갔다?
십전무후 남궁연이 근처에 있다면 달려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양이화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사과는 뭐며, 소청단은 또 뭔지.”
연무백은 기름종이 뭉치와 처를 번갈아 보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적하가 보낸 사람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처에게 미안한 일을 한 사람은 연적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억측이다.
삼장을 향한 적하의 복수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건 백가장과 양가장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고말고.’
게다가 적하의 지인 중에 남천과 같은 술사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설사 그가 적하의 지인이라 해도 소청단은 과하다.
무당파에서 연적하를 위해 그런 보물을 내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왜요?”
“아니,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봤소.”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양이화가 소청단이 든 종이 꾸러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 몇 개나 되오?”
“네 개라고 했어요.”
“거참, 의미심장한 숫자로군.”
“왜요?”
“당신과 나, 그리고 승백이와 설주를 염두에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홋! 그러고 보니 그가 ‘굉장한 가족’이라는 말을 한 게 기억나네요. 확실히 소청단이라면 설주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도 화해를 할 수 있겠죠?”
“그건 장담하기 어렵지만 설주를 승백이 앞에 불러들일 수는 있을 게요.”
두 사람이 소청단의 활용을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갈 때다.
연승백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양이화는 얼른 기름종이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연승백 역시 연설주 못지않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형수님.”
“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양이화는 연승백이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세요?”
“아,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왜 부르셨어요?”
“혹시 남천 소협을 보셨나 해서요.”
그러자 연무백이 처를 대신해 답했다.
“그는 조금 전에 떠났다.”
“떠났다고? 이 밤중에?”
“바쁜 일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를 왜 찾는 거냐?”
“부적 때문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형수님. 남천 소협이 부적을 쓸 때 옆에 계셨죠?”
“네.”
“혹시 그가 다른 주문을 외우지는 않던가요?”
“주문요?”
“네, 천지맹 술사들이 부적을 쓸 때 주문도 외웠던 것 같아서요. 남천 소협도 그랬다면 벽력부와 관계된 주문을 알아 둬야 하잖아요.”
“아! 남천 소협도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어요.”
“그래요? 역시 그랬네요. 이거 어쩐다.”
“주문을 꼭 알아야 하나요?”
“술법마다 조금씩 다른데요, 그의 부적은 아무래도 그래야 하는 것 같아서요.”
듣고 있던 연무백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왜? 형, 뭐 감 잡히는 거라도 있어?”
“남천 소협은 무당파의 제자다. 그런 그가 사파인 철혈방에 무시무시한 부적을 넘겨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분명 그 부적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문이 필요할 게다. 그걸 모른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지도.”
“듣고 보니 그렇네. 젠장.”
형의 예리한 지적에 연승백은 기막힌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동생과 그토록 험하게 싸웠다니 어이가 없었다.
곰곰 생각하던 양이화가 한마디 했다.
“도련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남천 소협이 무당파 출신이잖아요. 무당파 술사를 찾아서 주문을 알아내면 되지 않을까요?”
“오!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형수님.”
똥 씹은 얼굴로 서 있던 연승백이 환하게 웃었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왜 한 가지에만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한편 연무백은 희희낙락한 동생에게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남천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부적보다는 소청단의 처리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남천이 왜 자신의 가족사에 이토록 관심을 쏟는지도.
***
고성촌.
만월객잔.
자고 있던 구천노도 심통은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누구…….”
“나야, 계속 자.”
연적하의 음성이었다. 심통은 경계를 풀고 흘러내린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렸다.
“아이고, 그냥 연가무관에서 주무시지 오밤중에 여긴 왜 오셨습니까?”
연적하가 비어 있는 침상에 몸을 던지며 답했다.
“어이쿠! 좋다. 조금 전에 철혈방이 왔다가 갔잖아. 아침에 인사받을 게 부담돼서 그냥 나왔어.”
“인사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맞아. 은근 부담돼.”
“그래도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매번 피할 수만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몰라.”
“다른 놈들요? 인사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랄을 하지요. 심지어 쥐꼬리만큼 도와주고 공치사를 남발하는 놈들이 더 많습니다.”
“심 노인은 세상을 너무 삐뚤게 보는 것 같아.”
“이런 걸 인생의 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연 누님 같은 분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심 노인은 그냥 속이 꼬인 거야.”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귀찮다는 듯 심통은 눈을 감았다.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나직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일각(15분)이나 지났을까?
밀려오는 수마(睡魔)에 심통의 정신이 가물가물할 때다.
연적하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말야.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나를 괴롭히는 줄 알았어. 어릴 때는 그것밖에 안 보였거든.”
“웅 …….”
비몽사몽 간에 심통은 ‘네’와 ‘예’가 적당히 뒤섞인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그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아.”
“으음…….”
“자기들끼리도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더라. 둘째 형이 누이에게 이년 저년 해 대고, 정말 장난 아니었어. 눈 뜨고 코 베이는 분위기야.”
“…….”
마침내 심통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형님들과 누이가 불쌍해 보이더라고. 알아, 배부른 소리라는 거. 하지만 내가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 안 들어?”
잠자리가 불편한지 심통이 몸을 뒤척였다.
“이젠 더 이상 그들을 봐도 밉지가 않아. 심 노인 말대로 무당파가 나를 버려 놨나 봐. 그래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전에는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올라서 무얼 해도 개운하지 않았거든.”
드르렁-.
심통의 코 고는 소리에 연적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양 부인에게 소청단을 줬어.”
순간 잠들어 있던 심통이 번쩍 눈을 떴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야? 자던 거 아냐? 코까지 골더니만.”
“본래 무림인은 한쪽 귀만 닫고 자는 법입니다. 소청단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양 부인에게 소청단을 줬다고.”
심통이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그 귀한 걸 왜 양 부인에게 줍니까! 고작 음식 한번 대접받은 거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뭘 그렇게 흥분해? 내 소청단 내가 줬다는데.”
“물론 공자님의 소청단이죠. 하지만 소청단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줘도 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심통은 마치 제 물건을 연적하가 마음대로 처분한 것처럼 발끈했다.
“양 부인이 왜 아무나야? 형수님인데.”
“공자님과 연씨들이 그렇게 챙겨 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공자님께 한 짓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때리고, 짓밟고, 창고에 가둬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느라고 연적하의 말을 듣지 못한 심통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다 잊었다니까.”
“그런 원한을 왜 잊어요? 잊지 마십쇼. 죽을 때까지 잊으면 안 됩니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걸 평생 되새기며 살아?”
“그래야 복수를 할 것 아닙니까!”
“복수는 큰어머니에게 넘치도록 했으니까 됐어. 나도 이제 마음 편히 살아야지.”
어딘지 허허로운 연적하의 말에 심통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하기야 원한은 일종의 독이다.
누군가에 대한 원한이 깊은 만큼 자신의 마음도 썩어 문드러진다.
“솔직히 말해 봐. 배 아파서 그러지?”
“……그런 것도 있고요.”
심통은 부인하지 않았다.
연적하와 그의 사이에 숨길 것은 없었다.
“몇 개나 필요한데?”
“개요.”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십 년 공력은 심통에게 큰 의미가 없다.
말년에 거둔 자신의 두 제자에게 소청단을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오늘내일하는 늙은이가 욕심도 많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알았어. 아침에 줄게.”
“흐흐,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심통은 금방 실실 웃었다.
소청단을 먹고 좋아할 금아와 월아를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렇게 좋아?”
“궁금하면 공자님도 제자를 한번 키워 보십쇼.”
“이 나이에 벌써?”
“공자님 형제들도 제자를 키우지 않습니까? 가르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능력만 있으면 되지요.”
“귀찮아서 안 해.”
“하기야 귀찮아서 잘 씻지도 않는 공자님에겐 무리지요.”
“나보다 더 더러운 심 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월아와 금아가 씻고 다니라고 안 해?”
“안 하긴요. 아침마다 물 떠다 놓고 사정사정합니다.”
“그래? 제자 둘 만하네. 나도 생각 해 봐야겠다.”
“어이쿠! 공자님, 꼼지락거리기 싫으면 그냥 상도에게 물 떠오라고 시키십쇼.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공자님에게 제자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런 제길. 제자를 두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연적하는 지쳐서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심통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양 부인에 대한 죄책감과 연씨들에 대한 연민이 희미해질 무렵,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