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399
399회. 대붕(大鵬)과 들쥐
손가인은 차마 백설연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지방의 군소 문파들에 현령은 칠파일문보다 더 조심스러운 상대다.
칠파일문은 협의(俠義)를 따르기에 괜한 괴롭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현령은 달랐다.
그들은 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가졌지만 의롭지 않았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말도 있지 않던가.
현령에게 찍힌 군소 문파의 말로는 비슷했다.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기는 건 괜찮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은 그럴 겨를도 없이 문을 닫았다.
백설연이 고개 숙인 손가인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무당파 속가제자도 무당파야. 십언에서 무당파 제자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건 현령도 마찬가지일 거야.”
물론 막연한 추측이다.
그래서 백설연도 단언하지는 못했다.
무당파가 속가제자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속가제자의 위치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어느 문파도 속가제자를 적극적으로 지켜 주지 않는다. 그런 만큼 속가제자들도 본산으로부터 자유롭다. 얼핏 공평한 것 같지만 사실 방임에 가깝다.
손가인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도 무림의 생리를 아는지라 가슴이 답답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백설연이 운을 뗐다.
“참, 연 사제 말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동빈’ 속가제자들의 우의도 제법 단단해졌다. 그래서 백설연은 연남천과 손가인의 불화가 잘 해결되기를 바랐다.
“네…….”
손가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동안 그를 비난해 왔기에 백설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동생이 ‘여동빈’에 오게 된다면 그의 사매가 되는 건데. 요즘 ‘여동빈’의 속가제자들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백설연은 대놓고 사과하라고 하지 않았다.
손가인의 얼굴을 보니 굳이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과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그는 정말 훌륭한 남자야. 그와 함께 지내다 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느끼게 돼. 동생도 알게 될 거야.”
“그분이 저를 용서해 주실까요?”
손가인이 자신 없는 얼굴로 백설연을 보았다.
지금까지 백설연에게는 딱히 잘못한 일이 없다. 그저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고 거리를 둔 게 전부다.
하지만 연남천은 다르다.
자신은 만황주, 천상동과 함께 연남천을 비방하고 다녔다.
그 두 사람이 오룡궁을 떠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에 받쳐 더 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연남천은 오룡궁 최고의 술사로 떠올랐고, 수련자들은 자신을 멀리했다.
그러다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연 사제는 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녔는지 알지도 못할 거야. 설사 그가 알고 있다 해도 걱정하지 마. 만약 그의 기분이 상했다면 벌써 동생과 만났을 테니까. 은근 그런 부분에 민감하거든. 하지만 안 만났잖아? 그건 모르고 있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 말 믿어. 문답식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싶으면 마음의 짐을 털어 내.”
“네.”
손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답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용서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오전 강론에 참석했다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연적하를 누군가 불렀다.
“연 소협.”
연적하가 돌아섰다.
‘하선고’의 여자 수련자였다.
가끔 식당에서 마주쳤지만 말 한번 나눠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저요?”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뭔데요?”
연적하가 빤히 바라보자 손가인이 한적한 정원을 가리켰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그렇고, 잠시 저쪽으로 가도 될까요?”
“그러죠.”
연적하가 성큼성큼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
그늘에 도착한 연적하는 여자 수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선각의 수련자들은 이백여 명에 육박한다.
그중에 그가 아는 이름은 몇 안 된다.
아니, ‘여동빈’의 속가제자를 제외하고 그가 아는 이름은 만황주와 천상동이 전부였다.
비록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다가오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 수련자는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익숙한 일이라 연적하는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잠시 머뭇거리던 손가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간의 일을 사죄드리고 싶어서 찾아봤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말해서는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는데요? 소저는 누구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게 설명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제야 손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너무 당황해 중요한 게 전부 생략된 것도 몰랐다.
“저는 십언 청산문의 제자 손가인이라고 해요. 처음 제가 오룡궁에 왔을 때…….”
그녀는 그간 자신이 연남천의 비방에 앞장서 왔음을 고백했다.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만황주와 천상동이 안 보인다 했더니 결국 떠난 모양이다.
이상하게 험담보다 그 두 사람의 근황이 더 궁금했다.
어쩌면 오룡궁에 와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격지심과 질시에 눈이 멀어 그런 말을 하고 다녔어요. 용서해 주세요.”
손가인이 머리를 수그렸다.
황토색 땅바닥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의 처지가 너무 부끄러웠다.
이러려고 오룡궁에 온 것이 아니었는데.
청산문에 두고 온 가족과 동문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네?”
뜻밖의 말에 손가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 두 사람이 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라고요. 오룡궁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 나에게 그 두 사람이 다가와서 이것저것 알려 줬죠. 그중에는 문답식에 대한 것도 있었어요. 난 도교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돈을 주고 문답식 정보를 샀어요.”
“…….”
손가인은 기막힌 눈으로 연남천을 보았다.
만황주와 천상동은 연남천이 문답식 정보를 팔다가 걸렸다고 했다.
자기들이 한 짓은 쏙 빼고 연남천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웠다니!
“그것으로 끝났으면 별일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본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그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싼값에 또 팔았죠. 하하.”
연적하는 멋쩍게 웃었다.
그때는 만황주와 천상동이 얄미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별일도 아니다.
손가인은 멍하니 연남천을 응시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기인들은 생각하는 바가 남다르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소름이 돋았다.
나쁜 뜻에서 그런 게 아니라 전율이 느껴져서다.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는 듯했다.
어젯밤 백설연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이 사람의 사매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동빈’에서 그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문득 백설연의 말이 떠올랐다.
-연남천은 대붕(大鵬)이야. 동생이 만났던 남자들은 덤불숲에 살고 있는 들쥐고. 그들은 지면에 어른거리는 대붕의 그림자만 보고 멋대로 이러쿵저러쿵 말한 거야.
맞다.
그들만 들쥐가 아니라 자신도 들쥐였다.
하지만 머리 위에 이런 대붕이 날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변할 것이다.
손가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후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연 소협, 저도 열심히 노력해서 ‘여동빈’으로 올라가겠어요. 꼭 그럴 거예요.”
“그래요. 그럼 ‘여동빈’에서 만납시다.”
연적하가 격려의 말을 남기고 막 떠나려 할 때다.
뒤늦게 생각난 듯 손가인이 급히 불렀다.
“아! 연 소협.”
“네?”
“같은 속가제자라고 해도 기명제자는 좀 다르겠지요?”
“어느 부분에서요?”
“본산과 속가제자의 관계는 좀 애매하잖아요. 기명제자는 조금 더 본산 제자의 대우를 받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왜요?”
연적하가 의아한 눈으로 손가인을 보았다.
속가제자도 아닌 수련자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은…… 저 때문에 난처한 일이 좀 있었어요.”
손가인은 죽도록 부끄러웠지만 지난 밤 외원에서의 다툼을 들려주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연적하가 눈을 찡그렸다.
전통적으로 녹림은 관부를 싫어한다.
녹림 고수들 중에는 현령과 싸우고 산으로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현령의 폭압을 피해 화전민이 되었다가, 산적이 된 사람은 셀 수도 없다.
오봉산채의 산적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연적하에게 현령은 ‘나라에서 임명한 마두’였다.
사람을 대하는 그의 방식은 간단하다.
보응(報應).
즉 인과에 따라 갚아 주는 것이다.
행한 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의(義)이며 협(俠)이었다.
“그러니까 수련자 중에 죽산현 현령의 장자가 있는데. 그가 백 사저를 괴롭힐 거라는 말이에요? 그것도 현령을 내세워서?”
“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라면서.”
“와, 쌍놈의 새끼.”
바로 연적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지만 손가인은 놀라지 않았다.
오룡궁에서 협잡꾼 짓을 했다고 털어놓는 것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언니는 무당파에서 도와줄 거라고 했지만, 본산은 속가제자를 돌보지 않잖아요. 혹시 연 소협이 한마디 해 준다면 무당파도 관심을 보일까 싶어서…….”
“그건 무당파가 나설 일이 아니에요.”
연적하가 선을 긋자 손가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심 그의 도움을 기대했는데 칼같이 자르니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사저의 일은 곧 내 일이에요. 무당파가 나서기도 전에 끝내 줄게요.”
“아!”
손가인이 달뜬 얼굴로 연남천을 보았다.
역시나!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사저의 일이 곧 내 일이라니!
‘여동빈’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가 또 생겼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상대가 죽산현의 현령인데.”
비록 연남천이 오룡궁 제일의 술사라고 해도 그 한계는 뚜렷하다.
현령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면 술사보다 무당파의 이름이 더 먹히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이 세상에 술사가 하지 못할 일은 없어요. 백운 도사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했어요. 나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믿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 말을 끝으로 연적하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손가인은 멀어져 가는 연적하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나 잔잔한 박력이라니!
벅찬 감동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세라 나직이 속삭였다.
“연 사형. ‘여동빈’에서 봬요.”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남몰래 ‘사형’이라 불러 본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윽고 손가인은 고개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설연의 말대로 짐을 벗으니 홀가분하다 못해 날아갈 지경이다.
그녀가 감격에 겨워하고 있을 때다.
“손 매. 여기 있었어?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들떠 있던 손가인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