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08
408회. 선경(仙境), 신선의 경지
“허허, 그럴 리가요. 칠파일문의 약속을 무당파가 일방적으로 깨는 일은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강호행 중인 제자들을 불러들이지도 않았겠지요.”
무당파 장문인 영결 상인의 설명에 독심귀랑 양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 해 본 말이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애초에 ‘삼년지약’은 한두 개 문파가 즉흥적으로 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깨지는 순간 강호에 다시 피바람이 부니까.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책도 없이 그런 짓을 할 문파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칠파일문이 전쟁을 준비하면 유명교도 알게 된다.
정말 ‘삼년지약’을 깨는 상황이라 판단했다면 이런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자아, 그럼 건국사의 일은 어떻게 된 걸까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양소란은 영결 상인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영결 상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십언에서 양 현령과 오룡궁 제자의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부터 천호소(千戶所)의 군사가 동원된 일이라 더 그랬다.
물론 내막까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무당파 제자를 건드렸다가 된통 당했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일화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유명교에서 찾아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게 이런 식으로 연결될 거라는 건 짐작도 못했다.
‘쯧! 연남천을 숨길 수는 없겠구나.’
십언에도 유명교 교도가 있으니 이미 정보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섣부른 거짓말로 넘길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건국사의 일에 대해서는 빈도도 모르오. 허나 금의위 인사와 본파의 제자가 연루된 일은 알고 있소. 최근에…….”
영결 상인은 죽산현 현령과 오룡궁 제자가 얽힌 일을 들려주었다.
“……그 사달을 정리해 준 게 금의위였소. 그 뒤 오룡궁 속가제자인 연남천은 사문에 피해를 입혀 송구하다며 자진해서 하산했소. 그게 전부요.”
“그러니까 오룡궁의 속가제자인 연남천이 건국사에서 본 교의 법사를 암습했다는 건가요?”
“귀랑도 알고 있겠지만 본산(本山)에서 속가제자의 행적을 알 수는 없소. 하물며 오룡궁은 온갖 속인(俗人)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오. 그곳에서는 해마다 삼십여 명의 속가제자를 배출하는데, 연남천도 그중에 하나요. 빈도는 물론이거니와 오룡궁 궁주도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을 게요. 빈도는 다만 ‘관부나 금의위와 얽힌 제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린 것뿐이오.”
사실과 모르쇠를 적당히 섞은 것이다.
거짓말을 했다면 모를까?
진실을 기반으로 한 말에 양소란은 아미를 찌푸렸다.
“모른다라. 믿어지지 않는 말이군요. 그 정도 뒷배가 있는 제자라면 속가제자라 해도 본산 제자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 게 정상인데 말이죠.”
“물론 빈도도 뒤늦게 관심을 가졌었소. 허나 그때는 이미 소문이 너무 커져서 그가 하산하겠다고 한 뒤라. 별 소용이 없었소이다. 아시다시피 속가제자들은 본산과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터라, 그가 하산했다는 것도 나중에 전해 들었소. 오룡궁 궁주도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더이다. 그런 인재가 갑자기 하산해 빈도는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소.”
양소란이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영결 상인의 마음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오룡궁의 속가제자 연남천일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거군요?”
“그렇소.”
“물론 속가제자가 제멋대로 벌인 일이니 ‘삼년지약’과도 무관한 것일 테고.”
“정확하오.”
“좋아요. 그게 무당파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건 충분히 알겠어요. 본 교에서는 그가 현장법사의 암살 미수범이라 확신하고 있어요. 무당파 속가제자라니 ‘삼년지약’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은 져 주셔야 되겠어요.”
“최소한의 책임을 어떻게 지라는 말씀이오?”
“그의 용모파기(容貌苑記)를 내어 주세요. 오룡궁을 통하든 뭐든 알아서 하시고.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핑계를 대면, 지금까지 장문인의 모든 말을 거짓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거짓의 대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용모파기에 장난을 쳐도 마찬가지고요.”
양소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벼운 미소 속에 묘하게 뒤틀린 살의가 담겨 있었다.
영결 상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연남천의 외모는 너무나 눈에 띄어 거짓으로 꾸밀 수도 없었다.
“알겠소. 오룡궁에 사람을 보내 그의 용모파기를 구해 오라 하리다.”
영결 상인은 오룡궁으로 천성도사를 보냈다.
그런 후에 유명교 고수들을 손수 지객당으로 안내했다.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천성도사가 화선지 한 장을 들고 지객당으로 들어 왔다.
“장문인. 연남천의 용모파기를 받아 왔습니다.”
영결 상인은 화선지를 받자마자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양소란에게 넘겼다.
화선지를 펼쳐 보던 양소란이 인상을 찡그렸다.
벌에라도 쏘인 듯 퉁퉁 부은 기괴한 얼굴을 보니 보통 불쾌한 게 아니다.
“이게 뭔가요?”
“연남천의 용모파기라고 들었는데, 문제가 있소?”
“사람 얼굴이 이렇게 생겼다고요?”
“아, 빈도도 얼핏 전해 들었소만. 얼굴에 부스럼이 가득해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하더이다. 설마하니 곧 드러날 거짓 그림을 그려 보냈겠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그렇게 못 미더우면 오룡궁에 가서 확인하셔도 좋소. 오룡궁 수련자들은 그와 함께 지냈으니 용모파기의 진위 여부를 금방 가릴 수 있을 게요.”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어요?”
“허허, 그 용모파기가 거짓이라면 내 백 년간의 면벽 수련을 하리다.”
영결 상인이 당당하게 나왔음에도 양소란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뒤쪽에 시립하고 있던 역신마창 구진서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혹시 모르니 용모파기를 가지고 가서 오룡궁의 수련자들을 만나 보거라. 정말 연남천이라는 자가 이렇게 생겼는지 궁금하구나.”
“예.”
구진서가 화선지를 조심스럽게 말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양소란이 웃으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아무쪼록 이해해 주세요.”
“허허. 큰일을 함에 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웃으시네요. 속가 제자라고 해도 무당파 제자의 안위가 걸린 일인데.”
양소란의 지적에 영결 상인은 뜨끔했다.
연남천의 무위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 편히 있었는데 그걸 간파하다니.
“오룡궁 제자는 죄다 술사라 건국사 일과 무관하다는 생각에……. 술사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귀랑께서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양소란은 속이라도 뚫어 보려는 듯 영결 상인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나 영결 상인 역시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한창 심리전을 벌일 때, 구진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뭐라고 하더냐?”
“열이면 열, 모두가 연남천이 맞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름을 말해 주지 않고 용모파기만 보여 주었는데도 답은 같았습니다. 연남천의 용모파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 그림을 유명교와 관계된 곳에 뿌려라. 포상금도 적당히 걸고.”
“알겠습니다.”
구진서가 화선지를 들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양소란과 혈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객당 밖으로 나가려던 양소란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뭘 믿고 태연한지 모르겠지만 건국사에 무당파가 관여되지 않았기를 바라요. 만에 하나 무당파가 ‘삼년지약’을 어긴 게 드러나면…….”
양소란은 스산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결 상인도 그때만큼은 받아치지 못했다.
그녀의 미소 속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귀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십두마병의 본질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이다.
‘실로 사람의 눈빛이 아니로구나.’
영결 상인은 우두커니 서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유명교 고수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진무궁 궁주 천지 상인의 물음에 영결 상인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연남천은 괜찮겠지요?”
도리어 그는 연남천을 걱정했다.
양소란을 가까이서 보니 연남천이 염려스러웠다.
그러자 천지 상인이 피식 웃었다.
“이미 칼 한 자루로 십두마병들을 척살하고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오룡궁의 술법까지 익혔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역시 그렇겠지요? 저는 지금도 그가 펼친 술법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의 스승인 청불노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천지 상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다면 오룡궁이 천지맹에서 이름을 날렸겠지요. 연남천이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습니다. 왜 그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래전에 그가 한 말이 떠오르는군요.”
“뭐라고 했기에요?”
“그는 어릴 때 구천현녀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구천현녀요? 혹시 제가 알고 있는 도문의 그 구천현녀가 맞습니까?”
“예, 그 구천현녀가 직, 접, 가르쳐 줬다고 했습니다.”
천지 상인은 ‘직접’이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직접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처음에는 저도 어린 마음에 그런 상상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다른 생각도 들더군요.”
“다른 생각이라 하심은?”
“장문인께서는 연남천이 구천현녀의 이름으로 벽력부를 쓴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도 듣기는 했습니다만 술법에 조예가 깊지 못해서. 그게 문제가 됩니까?”
“본래 벽력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술사들은 모두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게 빌고 있지요.”
“허! 그런데 연남천은 구천현녀에게 빈다는 겁니까?”
영결 상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도 도사인지라 기본적으로 신격(神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다.
신들마다 서열이 있고, 관장하는 영역이 다르다.
만약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 벽력을 관장한다면 그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구천현녀의 힘을 빌려 벽력부를 사용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오룡궁의 도사들도 그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구천현녀에게 의지해 벽력부를 만들어 본 적도 있답니다.”
“모두 실패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오직 연남천만 가능했다고 합니다.”
“허어.”
영결 상인이 기막힌 눈으로 천지상인을 보았다.
연남천에게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를 가르친 오룡궁의 도사들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장문인께서도 화경(化境)에 대해 아시겠지요?”
“알다마다요.”
‘화경’은 ‘조화경’, 혹은 ‘신화경’으로 불리는 무학에의 최고 경지를 뜻한다.
인간의 몸으로 더 오를 수 없는 궁극의 경지.
그다음은 그저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만약 장문인과 제가 여동빈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여동빈의 경지를 뭐라 말하겠습니까?”
“…….”
영결 상인은 답하지 못했다.
‘화경’을 떠올려 보았지만 검선 여동빈에게는 부족한 표현이었다.
천지 상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 검선(劍仙)은 검술뿐 아니라 술법에서도 가히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지요.”
‘검술’과 ‘술법’이라는 말에 영결 상인의 눈이 번득였다.
그러고 보니 여동빈도 연남천과 비슷했다.
“여동빈도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종리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동빈이나 연남천은 검술과 술법의 경계가 없지요.”
“구천현녀가 직접 가르쳤다는 말을 믿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의 경지를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그의 경지라…….”
“저는 그것을 ‘선경(仙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선경은 즉, 신선의 경지다.
사실 ‘검술’과 ‘술법’으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만든 표현이었다.
영결 상인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 검선은 ‘선경’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연남천은 아직 미흡하지만…….”
선경.
여동빈에 비교할 수 없지만 연남천에게 어울리는 표현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