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2
42회. 그땐 순수했지
시간이 지나자 패산도 황염동의 도는 난폭하게 고학검 등초를 몰아붙였다.
챙챙챙.
숨 돌릴 틈도 없이 휘몰아쳐 가는 도 앞에서 등초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구경꾼들은 ‘황염동의 도법이 굵직하고 등초의 검법이 섬세해서 그렇게 보일 뿐 팽팽한 싸움이다’라고 떠들어 댔다.
연적하는 구경꾼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도와 검에 집중했다. 사람들의 설명과 달리 도가 확실하게 검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패산도라 불리는 남자의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면 그도 아는 것 같다. 고학검이라 불리는 사람이 자신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말이다.
문제는 이미 승패가 뚜렷한데도 패산도의 기세가 점점 더 올라가고 있다는 거다.
설상가상이라고, 한순간 황염동의 도에 파르스름한 도기가 맺혔다.
초식만으로도 이미 우열이 갈린 상황인데, 쥐도 새도 모르게 내력까지 밀어 넣은 것이다.
쩡.
도에 실린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고학검의 검이 뒤로 튕겨 났다.
동시에 패산도가 유령처럼 고학검의 옆을 스쳐 지나며 도를 대각으로 쳐 올렸다.
“헉!”
땅.
가슴을 가르는 도기에 등초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인들의 싸움에 배려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동도들 간에는 목숨까지 노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고학검도 그런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염동의 눈에는 살기가 충만했다.
당연히 등초는 자신의 가슴이 갈라졌다고 생각해 한순간 굳어 버렸다.
그걸 보고 연적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쯧쯧! 존심(存心)이 없어.’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저런 거다. 천지상인은 어떤 경우라도 본심을 잃지 말라고 했다. 그건 상대를 베었을 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비록 칼에 맞았다 해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칼에 한번 맞았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힘을 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고학검은 살았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등초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쪼개졌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멀쩡했다.
그때 황염동이 급히 도를 거두며 소리쳤다.
“어느 고인이십니까?”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황염동은 불안한 눈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도신에 박힌 일 문짜리 동전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벼락처럼 휘두른 도신에 동전을 박아 넣을 정도의 고수라니!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황염동은 사방으로 습하며 말했다.
“싸움이 격해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치명적인 수법을 쓰고 말았습니다. 누구신지 모르나 사고를 미연에 막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구경꾼들은 갑작스러운 황염동의 행동에 웅성거렸다.
그제야 황염동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황염동이 등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등초, 운이 좋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다음부터 함부로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해라.”
“…….”
등초는 맥 빠진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염동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윗줄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염동은 개운치 않은 얼굴로 자리를 떴다.
싸움이 끝나자 구경꾼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관도를 따라 걷던 연적하가 오봉십걸들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칼을 쓸 때 한 번에 다 쏟아 내고 멍하니 있으면 안 돼요. 아까 그 고학검이라는 사람처럼 하면 목숨이 여러 개 있어도 감당을 못 해요.”
하소백이 웃으며 물었다.
“패산도라는 사람의 도신에 동전이 박혀 있던데. 오라버니가 던진 거죠?”
“어. 칼 쓰는 건 정파나 사파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아주 그냥 사생결단을 내 버리려고 하데.”
“싸우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다고 하잖아요.”
사파에서 오랜 세월 굴러먹은 구밀복검 심양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클클, 그건 변명입니다. 패산도라는 놈은 처음부터 죽일 작정으로 손을 쓰는 것 같더군요. 본래 정파의 위선자들은 남들 앞에서 살수를 잘 쓰지 않는데 말이지요.”
“어머, 왜요?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고학검에게 원한이 있든지, 패산도라는 놈이 살짝 미쳤든지, 혹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렵다. 어려워.”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던 하소백이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는 그런 거 알고 도와준 거예요?”
“아니. 그냥 패산도라는 사람이 속 보이게 칼을 쓰길래 물 먹인 거야.”
“그게 전부예요? 다른 뜻은 없어요?”
“어. 나는 속임수 쓰는 걸 싫어하거든. 죽일 작정이면 대놓고 그러든가. 아님 말든가 해야지. 척하는 꼴은 못 봐 주겠더라고.”
“저는 오라버니가 고학검이 불쌍해서 도와준 줄 알았어요.”
“고수 앞에서 먼저 칼 뽑은 사람이 뭐가 불쌍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지. 그렇게 살다가는 으슥한 데서 칼 맞아 죽기 딱 좋아.”
“하긴, 오늘도 오라버니가 안 도와 줬으면 죽었을 텐데. 그런데 오라버니, 싸워 보지 않고 상대가 나보다 고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글쎄. 나는 느낌이 싸한 사람은 좀 피하게 되더라고.”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어, 딱 한 명.”
연적하는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가 떠오르자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와아. 나는 아무 느낌 없이 살았는데.”
한채연이 끼어들었다.
“너 그러다가 훅 갈 수 있다. 아무 앞에서나 칼 뽑지 마. 아까 그 남자 봤지?”
“어머, 나보다는 언니가 더 조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찔리는 듯 한채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하아! 우리는 언제쯤에나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고수는 둘째치고, 저는 칼 뽑으면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거든요?”
연적하가 그런 두 여자를 향해 말했다.
“나도 처음 칼 들고 싸우던 날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소백이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진짜요? 오라버니 같은 고수도 그래요?”
“내가 진짜 딱 십 년 동안 이상한 데 짱박혀서 무공을 익혔거든. 그때는 진짜 평상심, 존심, 다 지킬 수 있었어. 그런데 막상 진짜 칼부림을 하려고 하니까 귀에서 처음 듣는 소리까지 들리더라.”
“누가 말을 걸어와요?
“아니, 그냥 ‘삐-’ 소리가 나더라고.”
“와아~, 오라버니 진짜 착하게 살았나 보다. 나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땐 순수했지.”
진지한 연적하의 말에 심양각이 고개를 힐끔거렸다.
이제 고작 열일곱, 열여덟 살짜리 들이 세상 다 산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손주들 재롱 같아 입이 근질거렸지만 끼어들 수가 없다. 무공이 뭔지, 사람을 참 비루하게 만드는 것 같다.
***
합비.
남궁세가 객청.
점심 무렵, 승천문의 문주 일검진천 마곤이 검왕 남궁벽을 찾아왔다.
남궁벽이 의아한 얼굴로 마곤을 바라보았다. 같은 지역임에도 평소 왕래가 거의 없던 마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길이 없어서다.
마음이 급했던지 마곤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남궁 대협, 도움을 좀 주십시오.”
“하하. 숨도 돌리기 전에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봅니다?”
“실은 며칠 전에 본문의 제자 하나가 실종됐습니다.”
“그런데요?”
남궁벽은 마곤이 그 일을 왜 남궁세가에 와서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호의 분쟁은 남경에 있는 정의맹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정의맹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남궁세가에서 도와 드릴 일이 있겠소이까?”
“그게, 영애(令愛)의 조언을 좀 받았으면 합니다.”
“흠!”
남궁벽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마곤은 ‘화용독심’이라는 별호가 붙은 딸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나 남궁벽은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사안인지 듣고 딸을 부를지 말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무슨 일인지 먼저 들어 보고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아, 예,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흘 전에 승천문으로 간다며 집을 나간 제자가 사라졌습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정의맹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면 되는데……. 최근 조금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이라 하심은?”
“최근 하남의 비룡문에서 저희 문파를 찾아오고 있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저희 문파를 도와주러 온다는데, 저는 비룡문을 모릅니다. 그러던 차에 제자가 실종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 싶어서요.”
“그러니까 문주께서 비룡문을 모르는데, 그곳에서 승천문을 도우러 간다는 소문이 있다?”
“예. 그건 우리 승천문에 변고가 생길 거라는 뜻이 아닙니까? 갑자기 제자가 실종된 게 그것과 관계된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그것 참 기이하구려.”
“저도 답답해서 영애의 의견을 구해 보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정의맹에서는 비룡문에 대해 뭐라고 하더이까?”
정의맹은 정파 연합이라 하남의 무관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비룡문이라는 문파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곳이거나, 거짓으로 꾸민 이름이면 그럴 수 있다고…….”
“허! 거참. 애매하군.”
“정의맹은 모르겠다고 기다려 보자고만 하니……. 답답해서.”
“알겠소이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남궁벽은 시종 하나를 보내 남궁연을 대청으로 불러냈다.
그런데 누구에게 들었는지 장자인 남궁천까지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저 녀석은 부르지도 않았는 데 왜 왔지? 그 나이 되도록 낄 데 안 낄 데 다 끼다니. 쯧쯧!’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팔불출 같은 느낌이다. 속으로 혀를 차던 남궁벽이 마곤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마 대협, 나의 아들과 딸이오. 너희도 인사드리거라. 승천문의 문주이신 마곤 대협이시다.”
“남궁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문주님의 아낌없는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
사근사근 인사하는 오빠와 달리 남궁연은 짧게 눈인사를 하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
두 남녀가 맞은편에 앉자 마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궁연을 살폈다. 보통 때라면 소가주인 남궁천에게 관심을 기울였겠지만 오늘은 예외다.
화용독심.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별호처럼 열아홉의 남궁연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독심(讀心)을 어떤 이들은 독심(獨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뚝 떨어져 살아가는 까닭이다.
지금도 남궁연은 함께 앉아 있지만 ‘같은 장소에 있다’는 느낌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독심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는 것이리라.
“연아, 너의 조언을 듣고자 찾아오셨다는구나. 마 대협, 편하게 말씀하시구려.”
그제야 남궁연이 마곤과 눈을 맞췄다.
마치 인형처럼 무표정한 그녀 앞에서 마곤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색해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마곤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저, 듣던 대로 꽃처럼 아름답구려. 나는 승천문의 문주인 마곤이라 하오. 번거롭겠지만 이번 한 번 도와준다면 그 은혜 잊지 않겠소.”
“…….”
남궁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듣기만 했다.
상대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마곤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의맹에도 비룡문과 제자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했소. 정의맹에서는 비룡문이 신생 문파이거나 거짓 이름일 수도 있다고 하더이다. 노부는 이 일이 비룡문의 소행인지, 아니면 정말 비룡문이 승천문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알고 싶소. 그리고 본문의 제자가 어떻게 됐는지도…….”
마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남직례성에서 화용독심의 명성은 남궁세가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녀가 나서서 풀리지 않은 일이 없다던가.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을 결코 잊지 않는 뛰어난 오성(性)에 모르는 게 없다고 해서 요즘은 무불통지(無不通知)라고까지 불리는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