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21
421회. 나도 황실에 아는 사람 있다니까요.
무한에서 구강으로 가는 배는 많았다.
장거리를 가야 하는 연적하와 탈혼마검 노도경은 그중 큰 배를 골라 승선했다.
빠르고 편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배는 덜컹거리는 마차와 달리 장강의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선수(船首)에서 강바람을 맞던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눈에 익은 풍광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십두마병을 잡으러 다닐 때 지났던 뱃길이었다.
“이런! 까맣게 잊고 있었네.”
“마차에 뭐 두고 온 게 있었나? 뭔지 모르지만 잊어버리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마차를 찾지 못할 테니까.”
언제 나왔는지 선실에서 쉬고 있던 노도경이 다가오며 말을 받았다.
“그게 아니라 풍광이 눈에 익어 가만히 보니 전에 지났던 뱃길이네요. 내가 이렇게 강호 경험이 많다니까.”
“경험은 많은데 머리는 별로인가? 배 타고 갈 생각을 못 한 걸 보면.”
그에게 강호초출 취급당한 노도경의 소심한 복수였다.
하지만 연적하는 부인하지 않았다.
십전무후 남궁연에 비교하면 자신의 머리는 그저 장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이 무공에 머리까지 좋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어요? 하늘이 공평한 거지. 아저씨도 무공 빼면 별로잖아요. 인생이 원래 그런 거예요.”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노도경은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되뇌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두 사람은 선수에서 멍하니 강바람을 쐤다.
그때 선원 중 하나가 바구니를 가져다 놓고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바구니 안에는 사과 두 개와 만두, 그리고 물병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노도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촐한 점심이구먼.”
“그래도 사과를 다 주네요? 난 기대도 안 했는데.”
두 사람은 장강 위를 떠다니는 배들을 보며 느긋하게 음식을 먹었다.
만두는 금방 떨어졌다.
연적하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과를 한입 베어 물 때다.
선실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들어 보니 남자들이 여자에게 껄떡거리다가 시비가 난 모양이다.
노도경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요? 죽이고 싶어요?”
“악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자들은 죽이지 않는다네. 들풀이 많다 하여 보는 족족 뽑을 수야 없지 않은가.”
“아하! 들풀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둬도 절로 사그라질 것들이니 그게 편하지. 애써 뽑는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고.”
“악인과 선인도 죽인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덩치가 큰 흉물이네. 흉물은 치우고 살아야지.”
“야아, 이 아저씨 참 말 잘한다.”
그때 ‘쿠당탕!’ 소리와 함께 선실에서 사람 하나가 튕겨져 나왔다.
이십 대 남자였다.
뒤이어 여섯 명의 사내가 갑판으로 나왔다.
그중 하나가 쓰러진 남자를 발로 밟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야이! 개새끼야! 얘기 좀 한다고 몸이 닳아 없어져? 능력이 없으면 찌그러져 있어야지 왜 나대! 뒈질라고! 주제를 모르는 새끼는 맞아야 돼!”
퍽! 퍽! 퍽!
“윽! 윽! 윽!”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싸움 상대가 안 되니 그냥 맞아 주고 끝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섯 사내의 흉흉한 얼굴을 보면 금방 끝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돌아가며 쉬지 않고 발길질을 해 댔다.
끝내 남자는 기절을 했는지 축 늘어졌다.
그럼에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선실에서 여자가 뛰쳐나와 소리쳤다.
“그만해요! 그러다가 사람 죽겠어요! 이 가가(哥哥)! 이 가가!”
선원은 물론 선실의 사람들도 구경만 할 뿐 감히 제지하지 못했다.
사내 중 하나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여자가 딸려 오자 사내는 한쪽 팔로 여자 목을 휘감아 꼼짝 못 하게 했다.
그리고 남은 팔을 여자의 앞섶으로 밀어 넣었다.
“이년아. 그러니까 말로 할 때 순순히 응하지 그랬어. 내가 누군지 알아?”
“컥…….”
여자는 숨이 막히는지 목에 감긴 사내의 팔뚝을 미친 듯 두드렸다.
대답은 엉뚱한 데서 나왔다.
“누군데?”
쓰러진 남자를 발로 밟던 사내들이 동작을 멈췄다.
한쪽 팔로 여자의 가슴을 헤집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분명 그가 한 말이리라.
사내, 장거문은 여자에게서 손을 떼고 천천히 돌아섰다.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여자는 이내 쓰러진 남자에게 달려갔다.
장거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청년의 뒤로 향했다.
등에 검을 매고 있는 흑포의 중년인이 사과를 먹으며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표정만 봐서는 일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일행이라 해도 자신의 호위가 다섯이나 되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나의 부친이 호광성 안찰사시다. 알았으면 조용히 물러나라.”
“싫은데?”
연적하가 상대를 빤히 보았다.
어딜 가나 꼭 이런 놈들이 한둘은 있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노도경의 기준으로 볼 때 이놈은 잡초일까? 흉물일까?
긍금한 건 바로 풀어야 한다.
연적하는 고개 돌려 노도경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런 놈은 잡초야? 흉물이야?”
노도경이 다 먹은 사과를 강물에 툭 던지며 답했다.
“내 눈앞에서 알짱대면 잡초고, 걸리적거리면 흉물이다.”
“그렇구나.”
순간 장거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구라도 자신을 ‘잡초’와 ‘흉물’에 비교하면 눈이 돌아갈 게다.
장거문은 그 와중에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황실의 먼 외적인 장거문에게 싸움이란 배경과 배경의 대결이었다.
그러니 싸우기에 앞서 상대의 배경을 확인해야 했다.
“나? 연남천.”
“집안이나 사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집안은 쫄딱 망해서 없고, 사문은 무당파야. 왜? 쫄려?”
순간 장거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친이 한마디만 하면 무당파 장문인도 달려와 빌 판에 쫄릴 리가 있나.
“무당파의 알량한 힘을 믿고 제멋대로 굴었다니! 하룻강아지 같은 놈. 내 한마디면…….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장거문의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갔다.
연적하가 손바닥을 탈탈 털며 물었다.
“한마디면 뭐?”
뒤늦게 장거문의 호위들이 우르르 달려와 연적하를 덮쳤다.
연적하는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호위들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싸움은 다섯 번의 주먹질로 끝났다.
갑판 위에 다섯 명의 호위가 널브러졌다.
연적하는 돌아다니며 호위들의 기해혈을 검지 손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어쩌다 과하게 찔렀는지 그의 손끝이 피로 물들었다.
연적하가 장거문의 옷에 손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
“왜 말이 없어? 한마디면 어떻게 되는데?”
장거문은 비로소 상대가 무림의 고수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도 황실의 외척이다.
그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똑똑히 들어라! 내 사촌이 황상의 총애를 받고 있는 미인(美人, 황제의 후궁 중 말석)이시다.”
“그래서?”
“내 말 한마디면 너희 집안은…….”
“이미 망했다니까.”
“네 사문인 무당파도 무사하지……. 억!”
장거문이 두 손으로 입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살면서 입을 주먹으로 맞기는 처음이다.
입을 막은 양 손바닥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연적하가 피 묻은 주먹을 장거문의 옷에 닦으며 물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뭐라고? 잘 안 들려.”
부러진 이빨들이 양 손바닥에 잡히자 장거문은 악에 받쳐 버럭 소리질렀다.
“다 부숴 버리겠다! 무당파도! 네놈도! 네놈과 관계된…….”
순간 연적하의 주먹이 다시 장거문의 안면에 꽂혔다.
“악!”
장거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연적하는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퍽.퍽.퍽.퍽-.
떡메로 찰떡 치는 소리가 갑판을 울렸다.
기력이 다 빠진 장거문은 비명도 내지 못하고-돌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갑판을 돌아다니며 맞았다.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어디며,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냥 바닥에 눕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쪽으로 쓰러지려 할 때마다 주먹이 반대편을 때려 세운 까닭이다.
정신줄을 놓고 맞던 장거문은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 죽는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무자비한 상대에게 애원했다.
“제발……. 윽! 살려…… 억! 주십쇼. 컥!”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주먹질이 멈췄다.
하체에 힘이 풀린 장거문은 스르륵 주저앉았다.
항문이 열리고, 그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잡초면 살려 두지만, 흉물이면 죽인다는 사람이 있어. 너는 잡초야? 흉물이야?”
“잡처임미다.”
앞니가 다 빠진 장거문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잡초라고?”
“예, 예.”
“부친이 누구라고?”
“호광…… 잡처임미다.”
“사촌은?”
“잡처임미다.”
“똑똑하네.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야. 흉물인 너를 잡초로 만들어 줬잖아. 안그래?”
“그러슴미다.”
“그럼 감사해야지. 성의를 보여 봐. 나는 작은 거에도 감동받으니까, 주저하지 않아도 돼.”
장거문은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눈을 끔뻑였다.
지금과 같은 일은 태어나 처음이라 일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손바닥이 불쑥 나타났다.
그제야 장거문은 연남천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당파가 아니라 날강도였구나.’
자신이 어리석었다.
무당파 제자가 미쳤다고 자신을 두드려 팬단 말인가.
사람을 때린 것으로 부족해 돈까지 요구하는 건 강도밖에 없다.
운이 없어 마두를 만났던 모양이다.
그는 모든 걸 자신의 운수 탓으로 돌리며 돈주머니를 꺼내 공손히 바쳤다.
“이걸 다 주는 거야? 잘 쓸게.”
연적하는 냉큼 돈주머니를 챙겼다.
사실 노도경의 손에서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됐다.
“가 봐. 다음에는 좀 더 좋은 곳에서 만나자고.”
“예, 예…….”
힘겹게 일어난 장거문은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객실로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와 그를 돌보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연적하가 계면쩍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감사는 제가 해야죠. 두 분 덕분에 좋은 일하고 돈까지 벌었으니까요.”
물론 적선 수행을 의미한다.
두 사람을 돕고, 흉물의 목숨도 구하고, 돈까지 벌었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였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남녀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선원들이 와서 갑판의 오물을 닦았다.
연적하는 다시 선수로 돌아갔다.
옆자리의 노도경이 시선을 멀리 두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자네 말이야.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로 심성이 약한 것 같아.”
“무슨 소리예요?”
뜬금없는 소리에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섯 명의 기해혈을 부수고, 뒷배 타령하던 놈은 곤죽을 냈는데 심성이 약하다니?
“아무리 무림 고수라 해도 황실과 척을 지어서는 정상적으로 살기 어렵네. 황실과 관계된 놈이라면 물고기 밥으로 주는 게 나은데, 왜 살려 두었나?”
“괜찮아요. 나도 황실에 연줄 있어요.”
“흐음. 그런가? 하지만 ‘미인’은 후궁 중에 말석이지만 무시 못 할 힘을 가지고 있네. 지금이라도 물고기 밥으로 던져 주는 게 어떤가? 내가 할까?”
그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나도 황실에 아는 사람 있다니까요.”
“그가 미인보다 윗줄인가?”
“당연하죠.”
연적하가 어깨에 힘을 빡 주었다.
자신은 ‘황상의 숨겨진 검’이라 불리는 사람인데 ‘미인’의 사촌을 겁내서야 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