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30
430회. 이 좋은 날 피를 보겠다는 거지?
소년은 산 위로 부리나케 달려 올라갔다.
나무 그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 하나만 빼고 모든 게 완벽했다.
그는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아무래도 귀에 거슬리는 이 소리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다.
소년은 멈춰 서서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산마루로 다가갔다.
계곡 위로 돌출한 커다란 바위 끝에 한 소녀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달려오게 만든 사람이다.
머리칼을 날리는 세찬 바람에도 소녀의 시선은 발아래 깔린 운무(雲霧)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저, 스승님께서 찾으십니다.”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게 운무인지, 아니면…….
갑자기 울컥하며 가슴이 저렸다.
왜 그런가를 떠올리려는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
“늙은이, 일어나. 하루 종일 잘 거야?”
어딘지 불량스러운 음성에 적월 공취산은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연남천이 발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잡힌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운기를 하려는 순간 기해혈(단전)에서 극통이 느껴졌다.
“윽!”
저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연남천은 이야기 끝에 ‘가야 할 길이 멀다’며 단전부터 부쉈다.
박살 난 단전의 통증이 비참한 현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배를 타고 가니까 좋지? 아주 잠이 솔솔 오나 봐? 늙으면 새벽잠이 없다던데. 해 뜬 지 한참 됐는데도 그냥 자네. 아침 먹으라고 깨웠어.”
말과 함께 연적하가 만두를 내밀었다.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공취산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먹고 싶지 않다.”
“누군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알아? 살려고 먹는 거지. 그 노인네가 살려서 데리고 오랬어. 먹을래? 먹일까?”
강제로라도 먹이겠다는 소리에 공취산은 만두를 받았다.
그래도 백두마군 체면에 더는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배가 구강(九江)을 지나갈 때다.
희미한 물안개를 헤치며 두 척의 배가 빠르게 다가왔다.
노련한 선장, 하대수는 얼른 속도를 늦추고 손님들을 선실에 모았다.
“장강수채의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종종 있는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안전한 선내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협상하는 동안 갑판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상인과 여자 들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자칫 재물은 물론 납치까지 당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놀란 것이다.
배에 타고 있던 무림인들 중에 하나가 물었다.
“도적이 몇 명이나 되오?”
“작은 배 두 척이니 열 명 남짓 될 겁니다.”
“우리는 무한 천풍문의 사람들이오. 상인들의 호위를 합치면 칼 든 자가 열다섯이 넘소. 고작 열 명의 도적이 무서워 꼼짝 말라니? 너무 간이 작은 게 아니오?”
그의 말에 상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수적 우위에 있으면서 도적들 눈치를 본다는 건 웃긴 일이었다.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하대수는 장강의 물길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도적들 숫자가 열 명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냥 평소 배 두 척이면 열 명이 나와서 돈을 걷어 갔기에 한 말이다.
하지만 천풍문 사람들과 상인은 이미 열 명이라는 숫자에 고무된 상태였다.
숨죽이고 있던 선객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도적들이 선실에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요?”
“우리더러 나가지 말라는데, 저들이 와서 해코지하면 어쩌려고요?”
“그러니까 지금, 차려진 밥상처럼 가만히 도적들의 처분만 기다리자는 겁니까?”
선객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대수가 한발 물러섰다.
“지금까지 저들은 통행세만 받고 물러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드린 말씀이었을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자는 대로 하지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천풍문 사람에게로 향했다.
천풍문의 무술 사범 정금산이 한쪽에 모여 있는 상방 무사들에게 물었다.
“그 전에 당신들은 어쩔 생각이오? 우리 천풍문과 함께 도적들과 싸울 의향이 있소?”
상방 무사들은 상인들이 기대 어린 눈으로 보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선장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 하고. 도적들이 더 많은 걸 바라면 우리가 나서서 퇴치하는 것으로. 어떻소?”
나름 합리적인 제안인지라 상방 무사들은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정금산이 선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봤소? 당신 손에서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하시오. 도적들이 욕심을 부리면, 그때 우리가 나서도록 하리다.”
“저어, 대협. 말씀은 알겠으나 본래 통행세는 선객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우리 뜻은 이미 말씀드렸소. 선장이 감당할 수 없을 때 나서겠다고.”
돈을 갹출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속으로 끙끙 앓던 하대수는 결국 빈손으로 선실을 떠나야 했다.
장강수채 부채주 구강혈편 성수용이 배에 오르자 수적 중 하나가 의자를 내왔다.
의자에 척 걸터앉은 성수용이 하대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지난밤에 아랫도리를 좀 심하게 놀렸더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건 그렇고 몇 명이나 태웠느냐?”
“서른다섯입니다.”
“아이고! 이놈 봐라. 아주 꽉꽉 채웠구나. 그렇게 손님을 막 받았다가 일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빨리 뽑아 먹고 뜰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조심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오래오래 보자고. 서른 다섯이면 얼마더라. 칠십 냥은 받아야 하는데, 까짓것 날씨도 좋으니 뚝 잘라 오십 냥만 받으마. 좋으냐?”
“…….”
하대수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은자 오십 냥은 자신이 혼자 낼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금액이었다.
선장이 침묵하자 성수용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아무래도 일이 꼬일 모양이다.
“뭐야, 이 새끼. 스무 냥이나 깎아 줬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네? 이 좋은 날 피를 보겠다는 거지? 배에 칼잡이들 좀 태웠냐?”
“…….”
하대수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분기탱천한 성수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의자가 ‘꽈당!’ 넘어갔다.
그 소란에 십여 명의 도적들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얘들아. 오랜만에 저 덜떨어진 새끼들에게 장강수채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 줘야겠다. 서서 오줌 누는 것들은 싹 다 죽이고, 재물과 계집들만 한곳에 모아라.”
“크크! 알겠습니다!”
“씨벌! 가자!”
“다 죽었어!”
도적들이 선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이 문을 열기 직전, 밖을 살피고 있던 무림인들이 먼저 치고 나왔다.
콰앙-.
도적 하나가 떨어져 나온 문짝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천풍문의 무술 사범 정금산을 필두로 열다섯 명의 무인이 갑판 한쪽에 줄지어 섰다.
“나는 무한 천풍문의 정금산이다! 살계(殺戒)를 범하고 싶지 않으니 지금이라도 물러가라!”
구강혈편 성수용이 채찍을 질질 끌며 휘적휘적 걸어갔다.
“나무아미씨불. 살계 운운하는 걸 보니 너도 절밥 좀 먹은 모양인데. 그래도 소용없어 이 새끼야. 부처님 앞으로 가거든 구강혈편이 보냈다고 해라!”
성수용이 호랑이처럼 천풍문도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구강혈편’이라는 말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천풍문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떤 이는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성수용에게 찍힌 정금산만 달아나지도 못하고 박도로 채찍을 막아 댈 뿐이었다.
그건 상방 무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구강혈편 성수용은 군소방파 출신의 무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성수용이 정금산을 가지고 노는 동안 성질 급한 도적 하나가 선실로 뛰어들었다.
“이 쌍놈의 새끼들! 감히 장강수채 앞에서 칼을 뽑다니! 모두 뒈져라!”
그가 막 가까이 있는 상인에게 달려갈 때다.
“지금 나한테 욕했냐?”
도적, 양세웅이 몸을 돌렸다.
새파랗게 어린놈 하나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자신을 꼬나보고 있었다.
저승사자를 만난 줄도 모르고 유세 떠는 놈을 보고 있으려니 애잔하다.
“어이! 거기 너! 이 씨벌 새끼! 지금 뭐라고 했냐?”
양세웅이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누가 봐도 오금이 저릴 만한 분위기이건만 상대는 한술 더 떴다.
“와아! 저 새끼! 말하는 거 좀 봐! 야아! 아무리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어도 그렇지. 어디 존장 앞에서! 망할 징조네. 망할 징조야.”
연적하는 탈혼마검 노도경이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도의는 호천맹 같은 병신들에게 가서 찾고, 너는 좀 뒈져야겠다!”
청년 앞에 도달한 양세웅은 기세등 등하게 박도를 휘둘렀다.
부웅-.
턱.
연적하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박도의 날을 잡고 도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너 장강수채에서 왔냐?”
“그, 그렇다!”
“그렇다? 하아! 혈죽어옹이나 구강혈편 있으면 오라고 해. 너도 꼭 다시 와. 달아나면 죽는다.”
연적하가 갑자기 손을 떼자 양세웅은 박도와 함께 뒤로 나뒹굴었다.
후다닥 일어난 양세웅이 선실 밖으로 달아났다.
잠시 후 양세웅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성수용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히 구강에서 장강수채의 구강혈편 님을 오라 가라 하는 놈이 누구냐! 당장 기어나와라! 그러지 않으면 배와 함께 불태워 버리겠다!”
배를 불태운다는 말에 선객들이 술렁거렸다.
그래도 그 일로 감히 연적하를 힐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적하가 비스듬히 옆으로 팔을 괴고 누우며 화답했다.
“구강혈편! 감히 내가 탄 배에 또 불을 지르겠다고? 아주 죽여 달라고 곡을 해라.”
성수용의 곁에 있던 양세웅이 펄쩍 뛰었다.
“아니 저런 개후레자식을 보았나! 감히 부채주님에게 그 따위 개소리를…….”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성수용은 그런 참담한 말을 듣고도 잠잠했다.
‘어라? 귀에 익은 음성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성수용은 ‘또 불을 지르겠다고?’라는 말에 집중했다.
근래에 배에 불을 지른 적은 없다.
천지맹이 해체된 뒤로 알아서들 머리를 숙이는데 무슨 불이란 말인가.
‘맹세코 최근 몇 년 내에 그런 일은 없……. 아, 딱 한 번 있었구나!’
십두마병이던 전임 채주가 녹림 총순찰 연적하의 뒤통수를 치던 날 그랬다.
어쩐지 저 음성은 연적하를 닮은 것도 같았다.
긴가민가하는데 때마침 선실 안에서 가공할 협박 소리가 들려왔다.
“구강혈편, 안 튀어 오지? 셋 셀 동안 안 오면 뒷구멍에다가 혈편을 박아 넣는다. 하나, 둘…….”
순간 분위기 파악 못 한 양세웅이 부채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끼어 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할 말 있으면 네놈이 튀어나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누구더러 오라 가라 지랄이야! 지랄이!”
“미친!”
돌연 성수용이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양세웅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쿠당탕!
양세웅이 갑판 위로 나뒹굴 때 성수용은 바람처럼 선실 안으로 뛰어 들었다.
“태상호법니임!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속하 구강혈편 성수용 밤낮으로 태상호법님의 무사 안녕만을…….”
“응, 너 때문에 안녕하지 못해. 방금 나한테 욕한 놈 데리고 와.”
“조, 존명!”
갑판으로 튀어 나간 성수용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양세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이, 개새……. 태상호법님도 몰라보고 입방아를 찧다니. 내 반드시 네놈의 살을 곱게 저며 물고기 밑밥으로 장강에 뿌려 주마. 행여라도 살아남을 생각은 하지 마라.”
놀라 벌렁거리던 양세웅의 콧구멍에서 한 줄기 핏물이 서럽게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