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40
440회. 나 소학(小學)까지 뗀 사람이야
녹수방과 청로방은 신성현 남부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방파다.
대부분의 지역 방파들이 그러하듯 두 방파 모두 오랜 세월 정사지간에 속해 있었다.
고요하던 신성현에 파문을 일으킨 건 청로방이다.
녹수방과 각을 세우던 청로방 방주가 갑자기 호천맹에 가입한 것이다. 전대 방주가 소림사 속가제자 출신이라 그랬다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녹수방은 그런 청로방을 견제하기 위해 유명교에 의탁했다.
하지만 동기야 어떻든 막상 유명교의 일원이 되자 대우가 달라졌다.
산서성의 패주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명교.
칠파일문과 사대세가를 힘으로 찍어 누른 유명교니 산서성에서 그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유명무실한 호천맹과 달리 유명교는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었다.
산서성의 중대형 문파들이 녹수방을 찾아 인사를 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녹수방의 간덩이가 슬슬 커졌다.
유명교에 가입했다고 해서 금방 녹수방의 힘이 커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욕심은 부려 볼 수 있다.
상대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나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기도 하고.
그때부터 녹수방은 조금씩 청로방의 구역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청로방도 가만히 있지 않고 거세게 반발했지만, 이전처럼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명교가 부담스러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녹수방은 청로방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그들이 관리하는 점포를 계속 찔러 댔다.
여월(如月) 다관도 그중에 하나였다.
녹수당의 외당 당주 좌사는 전부터 여월 다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찻값이 비싸다 보니 보호비가 제법 쏠쏠해서다.
그래서 우격다짐으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는데 어떤 놈이 오지랖을 부렸다.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좌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너, 뭐 하는 놈이냐?”
“그러는 너는 뭐 하는 놈이신데요?”
연적하가 태연히 되묻자 좌사는 버럭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침착해졌다.
‘뭔가 있는 놈이로구나.’
보통 사람이라면 녹수방도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저러지 못한다.
그는 암암리에 청년과 노인을 살폈다.
지극히 평범해 보여서 오히려 신경이 곤두섰다.
자신의 앞에서 깐죽거리는 청년보다 조용한 노인이 마음에 걸렸다.
‘반박귀진인가.’
내외공이 극에 이르면 도리어 평범해 보인다고 했다.
청년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노인이 반박귀진의 고수 같았다.
‘이런 소란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다.’
좌사는 급히 안색을 바꾸고 정중하게 나갔다.
“험, 감정이 앞서는 바람에 말실수를 했구려. 나는 녹수당의 외당 당주 좌사라고 하오. 소협은 누구요?”
연적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제법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 연적하.”
연적하는 산서성에 들어오면서 본래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 유명교주에게 자신이 무당파에서 술법을 배웠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다.
“아, 연 소협이었구려. 동행이신 노야는…….”
말하다 말고 좌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적하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서다.
‘가만, 녹림 태상호법의 이름도 연적하라고 한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좌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연적하를 평가했다.
솔직히 군소 방파의 무인들은 평생 천하십대고수를 만날 일이 없다.
녹림 태상호법 연적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연적하가 동행한 노고수를 믿고 깝친다고만 생각했다.
“공취산이라고 하는데, 신경 쓸 거 없어. 이빨 빠진 호랑이니까.”
연적하는 여전히 반말을 썼다.
평소라면 상대의 태도에 맞췄을 테지만 상대가 유명교라서 그냥 하대한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유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공취산…….”
좌사가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공취산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십두마병이라면 모를까?
고작 유명교에 한 다리를 걸친 군소 방파에서 백두마군의 이름을 아는 건 무리였다.
‘이빨이 빠지기 전에는 호랑이였다는 말인데…….’
그냥 털어 버리려고 했는데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공 대협께서는 어느 문파의 고인이신지요?”
공취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궁금한 것도 많은 놈이군. 푼돈이라도 뜯으면서 오래 살고 싶으면 그냥 꺼져라.”
“…….”
당황한 좌사는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의 말에 따르기도 그렇고, 남아 있자니 공취산이 부담스러웠다.
“쯧쯧! 오늘내일하는 늙은이가 입이 너무 거칠어.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좀 유해지는 맛도 있어야지.”
거침없는 연적하의 말에 좌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반박귀진의 고수에게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공취산이라는 반박귀진에 이른 노고수의 반응이 이상했다.
바로 코앞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다?
좌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살폈다.
이빨 빠진 호랑이와 그에게 막말을 하는 연적하. 거기까지 생각하자 설마가 다시 머리를 쳐든다.
“혹시 연 소협께서는 녹림의 그…….”
“어, 나야.”
“헉! 정말 녹림 태상호법이십니까?”
“그렇다니까. 영패 보여 줘?”
연적하가 품 안에서 영패를 꺼내 좌사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순간 좌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부러져라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다.
“태상호법님! 몰라뵙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녹수방은 유명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정사지간이었다.
당연히 사파에도 한 발 걸쳤기에 녹림을 상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던 과거의 습관으로 자신이 유명교도임을 망각하고 예를 올린 것이다.
연적하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유명교라면서? 그러지 마. 우리가 그렇게 인사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
뒤늦게 좌사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연적하와 유명교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상 원수였다.
연적하가 유명교 십두마병을 척살하자 유명교에서 그의 머리에 포상금을 건 적도 있다.
지금이야 모두 지난 일이라고 하지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좌사는 뻘쭘한 얼굴로 서서 연적하의 눈치만 살폈다.
비록 모르고 했다고 하나 반말에 욕까지 한 죄가 있어 가겠다는 말도 못 했다.
연적하는 그런 좌사와 녹수방도들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 말이 틀려? 맞아?”
“……맞습니다.”
좌사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자신은 청로방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틈을 타서 계약하려 했다.
만약 청로방에서 뭐라고 하면 계약서를 근거로 큰소리칠 작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청로방이 손을 떼거나, 다관에서 두 방파에 보호비를 바쳐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후자로 끝날 경우가 많았다.
“들었지? 아줌마. 지금 독수방과 계약하면 두 개 방파에 보호비를 내야 된다고. 무서운 얼굴로 몰려와서 윽박지른다고 아무 데나 수결하면 안 돼. 청로방에 따져. 왜 녹수방에서 자꾸 다관을 찾아오게 만드냐고. 지켜 주지 않으면 보호비 못 내겠다고 해.”
“저어, 그래도 청로방이 해결해 주지 못하면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성희가 눈을 반짝이며 연적하를 보았다.
그녀도 좌사와 연적하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이며 얼굴이 고와 서생이려니 생각했는데 녹림의 연적하란다.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무림 고수 말이다!
괜히 가슴이 설렌다.
그가 한마디만 해 줘도 녹수방이든 청로방이든 한칼에 해결될 것 같았다.
“관부를 찾아가 하소연해 봐요. 힘으로 안 되면 법으로 해야지. 도리 있나.”
“예?”
주성희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녹림의 고수가 관부를 찾아가 하소연하라니?
이건 새로운 농담일까?
“누님, 벌써 귀가 먹었어요? 관부에 가서 신고를 하시라고요. 녹수방과 청로방이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요구한다고. 그럼 관원들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예요. 물론 양심적인 관원들이라면 말이죠.”
“아, 네…….”
주성희는 맥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다.
하지만 무림 방파가 보호비를 요구한다고 관부에 신고를 하라니. 장사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주성희가 실망한 얼굴을 하자 공취산이 냉소를 날렸다.
“흥! 무림 방파에 보호를 받지 못하면 관부로 가야지 다른 수가 있느냐?”
“…….”
주성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로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왠지 답답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공취산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행여나 이놈이 도와줄 거라 기대했다면 꿈 깨라. 이놈이 뭐라고 다관 일에 나서겠느냐?”
“네…….”
그제야 주성희는 자신이 헛된 욕심을 품었다는 걸 깨달았다.
노인의 말대로 연적하는 다관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막 마음을 정리할 때다.
“이 늙은이가 사람 무시하네. 내가 다관 일도 하나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아?”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연적하가 발끈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개뿔.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내가 다관 일을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말은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르다.
공취산은 ‘연적하가 다관과 무관하니 나설 의무가 없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그걸 연적하는 ‘해결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구구절절이 변명하기 귀찮아진 공취산은 그냥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칠 일 후면 떠날 세상.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연적하가 다소곳이 서 있는 좌사에게 말했다.
“너, 지금 녹수방 방주와 청로방 방주에게 가서 전해. 각자 가장 뛰어난 고수 한 명을 데리고 다관으로 튀어 오라고. 오늘 해가 질 때까지 뭘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됐다.”
“예? 녹수방 방주와 청로방 방주를요?”
“그래. 반 시진(1시간) 준다. 반 시진 안에 안 오면 다관에서 둘 다 손 떼는 것으로 알겠다. 가 봐.”
“예!”
대답과 동시에 좌사는 다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더 이상 다관의 관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녹림의 연적하가 두 개 방파의 방주를 소집했으니 무조건 응해야 했다.
안 오면 다관에서 손 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녹림 태상호법의 부름을 무시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기라도 하면 후환이 무궁할 것이었다.
유명교에 가입했다고 해서 녹림과 사파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녹수방도들이 물러가자 연적하가 여주인에게 말했다.
“입에 발린 말 다 필요 없어요. 지킬 능력이 있는 방파에 맡기면 돼요. 안 그래요?”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여주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배 꼬일 것 같더니 뜻하지 않게 일이 풀려 버렸다.
천하의 연적하가 직접 중재에 나섰으니 이번 일은 깨끗하게 정리가 될 터였다.
‘휴우! 다행이다. 그가 끝까지 외면했다면 두 방파에 보호비를 바쳐야 했을 텐데.’
창밖을 보고 있던 공취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딱 그 짝이로군. 일을 버는구나 벌어.”
“뭐래? 이 늙은이가. 내가 얼마나 깔끔하게 처리하는지나 지켜보라고. 나를 아주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나 소학(小學)까지 뗀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