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46
446회. 고마워. 배신해 줘서
적월 공취산은 웃었다.
사저에 대한 순정이 부정당해 괴로워했는데 그 모두가 계획된 것이라니.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듯하던 사저의 처연한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저가 태일관의 모두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
자신이 마지막 생존자이니 결국 그녀의 뜻대로 된 셈이다.
하지만 사저는 모를 것이다.
귀도(鬼道)라고까지 불리던 태일관의 정수는 이미 연적하에게 전해졌다.
유명교의 천적과도 같은 천외천의 고수 연적하에게 말이다.
‘크크크!’
아혈이 제압당한 공취산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사저가 왜 태일관의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독식하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코 그 뜻을 이루지 못하리라.
지금 당장 자신이 죽는다 해도.
양여령은 공취산의 일그러진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자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후회하고 원망하거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
공취산의 움직임이 더욱 격해지자 양여령은 그의 마혈을 점혈했다.
“오늘 너는 ‘왕들의 하늘’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너의 순수함과 사악함이라면, 이번에는 정말로 왕이 강림할지도 모르겠구나.”
말과 함께 양여령이 공취산의 허옇게 센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매만졌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의 뜻대로 살아오는 동안 공취산은 큰 위로가 됐다.
그가 먼저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를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양여령이 공취산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배신해 줘서.”
***
붉은 부적을 덕지덕지 바른 장대를 지나자마자, 앞만 보고 걸어가던 태백 선인이 우뚝 멈춰 섰다.
“귀하가 십두마병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 없소. 그러나 귀하가 교주님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것은 그냥 넘기지 못하겠소.”
“그래서요?”
가뜩이나 공취산을 넘긴 일로 마음이 불편하던 연적하는 비딱하게 받아쳤다.
“귀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봐야겠소.”
“어떻게 하시게?”
“문답무용(問答無用).”
말과 함께 태백 선인은 천천히 허리에 차고 있던 고색창연한 검을 뽑았다.
상대가 그렇게 나오자 연적하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즉시 품에서 청사를 꺼낸 후 구천기를 밀어 넣었다.
우우웅-.
유형의 검기는 삼 척(약 90센티)쯤 나오자 더 뻗지 않고 두껍게 검신을 형성했다.
그 모습을 본 태백 선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단검 끝에 맺힌 두툼한 검기를 보니 싸움을 건 게 살짝 후회가 됐다.
그의 단검에서 뻗어 나온 기운은 검기보다 검강에 가까워 보였다.
‘벌써 저런 경지라니…….’
십두마병을 척살하고 다녔다기에 쓸 만한 법보를 가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검공의 경지가 상당하다.
교주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납득이 갔다.
태백 선인은 즉시 자신의 성명 절기인 태백검법을 펼쳤다.
벽산토월(碧山吐月)!
그가 검을 위에서 아래로 긋자 태산 같은 검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의형검기(意形劍氣)’로 펼친 ‘벽산’이다.
그에 대응해 연적하는 청사로 벼락처럼 건곤감리의 방위를 찍었다.
구천세법 삼 식 운룡풍호(雲龍風虎)다.
사방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용권풍(회오리바람)으로 변했다.
콰콰콰콰.
용권풍을 타고 한 마리 청룡이 지상에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용권풍에 ‘벽산’이 조금씩 바스러지자 태백 선인은 즉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태산 같은 검기에서 돌연 눈부신 광구(光球)가 쏘아져 나왔다.
‘토월’, 즉 달을 토해 낸 것이다.
광구가 용권풍을 뚫고 연적하를 향해 내리꽂히려는 순간, 청룡이 광구를 덥석 물었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이다.
그상태에서 청룡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가 태백 선인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대경실색한 태백 선인은 공력을 회수하고 검 뒤에 숨어들었다.
태백 선인의 검 위로 청룡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꽈광!
귀청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태백 선인의 주위에서 흙먼지가 풀썩 올라왔다.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태백 선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먼지를 걷어 냈다.
“쿨럭!”
답답한 기침과 함께 태백 선인은 한 모금 피를 토해 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과 핏기 없는 얼굴, 누가 봐도 그의 완패였다.
“더 하시게?”
연적하의 물음에 태백 선인이 힘겹게 답했다.
“귀하와 내가 생사대적이 아닌데 더 해서 무엇하겠소. 귀하에게 자격이 있음을 알았소. 여기까지만 하리다.”
“그러시든지.”
연적하는 상대가 물러날 뜻을 보이자 단검을 품에 도로 넣었다.
“귀하가 펼친 검공의 이름이 어찌 되오?”
“구천……검.”
‘구천세법’이라고 하려다가 와룡장 시절부터 귀에 익은 이름을 알려 주었다.
“구천검……. 실로 대단한 검법이오. 하지만 우리 교주님의 검공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소. 귀하를 위해 하는 말인데 교주님에게 각을 세우지 마시오.”
각을 세우지 말라는 건, 적이 되지 말라는 소리다.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 유명교주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각은 무슨.
***
해거름 무렵.
풍지산.
팔황들은 계곡 주변에 십두마병을 촘촘히 세워 교도들조차 보지 못하게 막았다.
백두마군인 공취산이 자결할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한 것이다.
잠시 후 환영신마 웅재귀가 계곡에 들어섰다.
그의 어깨 위에 축 늘어진 공취산이 올려져 있었다.
그가 비록 배교자라 해도 같은 백두마군인지라 직접 나선 것이다.
“공 형의 노욕(老慾)이 과했어.”
아혈이 점혈당한 공취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웅재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귓구멍은 막혀 있지 않을 테니 내 말이 잘 들리겠지? 공 형은 제물로 바쳐질 거야.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건 없어. 우리처럼 머리를 바치는 그런 제물은 아니니까. 왕들의 하늘에 바치는 제물은 살아 있어야 하는 것 같더라고. 왜 그런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웅재귀는 말을 멈추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 어디에도 교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동안 제사를 몇 번 드렸는데 계속 실패했네. 그러다 최근에 성공했지. 믿어지나? 제물이 사라진 자리에 ‘삼두견’ 한 마리가 떡하니 서 있었다고 하더군.”
“…….”
“다들 쉬쉬하지만 삼두견이 ‘왕들의 하늘’에서 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네. 정인문의 문주 우인몽과 삼두견을 맞바꾼 셈이지. 이 삼두견이 십두마병을 잡아먹었네. ‘지옥에서 온 마신’조차도 한입거리에 불과했지.”
“…….”
갑자기 웅재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명계’에서 온 마신보다 ‘왕들의 하늘’에서 온 삼두견이 더 강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교주님에게 십두마병이나 백두마군보다 더 강한 수하가 생겼다네.”
거기까지 말한 웅재귀는 답답한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아! 외람된 말이지만 ‘명계’보다 ‘왕들의 하늘’이 더 뛰어난 것 같네. 어쩌면 ‘염마왕’보다 상위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백두마군들도 있다네.”
백두마군들은 ‘명계’의 왕인 ‘염마왕’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던 그들에게 ‘왕들의 하늘’에서 온 ‘삼두견’은 충격이었다.
“솔직히 나는 오늘의 제사가 실패로 끝나기를 바라네. 왜냐고? 자네가 성공하면 그다음으로 명왕교의 백두마군들이 바쳐질 걸세. 그리고 그다음에는…….”
웅재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교주가 천하는 물론 유명교에도 집착하지 않음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왕들의 하늘’에서 백두마군보다 뛰어난 수하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끝이 어떨지 뻔하지 않은가.
그때 계곡 입구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마침내 교주가 온 것이다.
웅재귀는 공취산을 한쪽에 내려놓고 공손한 자세로 섰다.
계곡 주위를 둘러보던 팔황신모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물과 환경 모두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단숨에 검은 염소의 목을 자르고, 솟구쳐 오르는 피로 역오망성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공취산에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 둥둥 떠오른 공취산이 그녀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팔황신모는 직접 공취산을 들고 역오망성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역오망성의 중앙에 그를 내려놓은 뒤에야 마혈과 아혈을 풀어 주었다.
이미 단전이 파괴된 공취산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저항해 봐야 수치만 당할 뿐이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당장 죽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제물을 왕들의 하늘로 바친다고?’
웅재귀는 실패하기를 바랐지만 자신은 다르다.
이곳에서 교주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왕들의 하늘’에라도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그게 얼마나 허황된 바람인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생각에 잠긴 그의 귓가로 양여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도 백두마군이라고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니 다행이구나.”
“인과응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사저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게요.”
“후후. 그래야지. 그토록 노력했는데 대가를 얻지 못하면 되나. 오늘의 제물이 너의 인과응보라면, 나는 불로불사를 얻게 될 게다.”
“저승에서 봅시다.”
“저승은 너처럼 실패한 도사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나는 갈 곳이 따로 있느니라.”
느긋하게 역오망성 밖으로 빠져나온 팔황신모는 소환 주문을 읊조렸다.
“레나 티아그 아이에 야하 자두 삼라트.”
팔황신모는 주문 한마디 한마디에 정성을 기울였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취산은 그녀의 과거와 맞닿아 있었기에 이전의 제물들과는 마음 자세가 달랐다.
주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고, 그래서인지 역오망성의 반응도 뜨거웠다.
역오망성이 그려진 바닥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화르륵-.
불꽃에 피가 타들어 가면서 역오망성 주위는 시커먼 연기에 뒤덮였다.
예의 그 악의(惡意)로 가득한 연기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광경에 공취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정말 ‘왕들의 하늘’로 가게 되는 것일까?
자욱이 일어난 시커먼 연기가 한곳에 뭉치면서 뱀의 형상처럼 똬리를 틀었다.
역삼각형의 머리 부위에서 번쩍이는 두 개의 빛은 흡사 뱀 눈알 같았다.
촤라라라-.
파리가 일시에 풀어지더니 검은 뱀이 공취산을 칭칭 감았다.
“이건 대체!”
공취산은 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뱀의 옥죄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가공할 힘이 조여 오자 가뜩이나 약해진 공취산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때가 되자 검은 뱀이 공취산의 머리 위에서 입을 쩍 벌어졌다. 공포에 질린 공취산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쩍 벌어진 뱀의 입속에는 뜻밖에도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별들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단숨에 공취산을 삼킨 입은 거대한 뭔가를 토해 냈다.
휘이이잉-.
골짜기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제단에 남아 있던 연기를 밀어냈다.
한순간 팔황신모와 몰래 훔쳐보던 백두마군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 왔다.
칠흑처럼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흑마 위에 오연(傲然)하게 앉아 있었다.
검은 투구 상단부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서는 연신 불길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팔황신모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천자마(天子魔)의 가르침에 따라 그대를 불렀습니다. 그대는 ‘왕들의 하늘’에서 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