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5
45회. 큰 창고에 갇힌 기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에 하소백이 기대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요?”
“나?”
“네, 오라버니는 뭐가 하고 싶으세요?”
만사평에서 연적하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했다. 하소백은 지금도 그런지 알고 싶었다. 솔직히 연적하가 평생 도적질을 하고 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봉십걸들도 궁금하다는 눈으로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무공이 뭔지 모르고 살 때야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연적하에게 산채가 얼마나 좁은 곳인지를 말이다. 그는 창공을 훨훨 날아다녀야 할 신룡이다.
연적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말했다.
“딱히.”
“없다고요?”
“응.”
연적하는 지금의 삶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쉴 수 있는 집과 음식은 물론 의형제들까지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꿈도 희망도 없이 갇혀 지내던 창고와 비교하면 지금은 극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철산이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형님, 강호의 영웅이 되어서 천하를 호령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미녀들도 막 꼬일 텐데.”
“귀찮아. 이번에 녹림대회를 참가하면서 확실히 깨달았어. 난 돌아다니는 체질이 아니야.”
“와아! 제가 형님이라면……. 진짜, 막……. 아휴!”
이철산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지 부르르 떨었다.
“그런 게 좋으면 열심히 무공 익혀서 네가 해. 십 년만 수련하면 하고도 남겠네.”
“정말요? 제가 십 년 정도 수련하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까요?”
“호령까지는 몰라도 목에 힘주고 다닐 정도는 될걸?”
“우오오!”
이철산이 양팔을 치켜들고 포효를 터뜨렸다.
먹고살기 힘들어 산적이 됐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용기가 났던 것이다.
한채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요? 미녀를 생각하니 힘이 솟아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목에 힘주고 다녀도 된다고 하니까…….”
“어머, 왜 내 눈치를 보고 그러실까?”
석 달간의 여행으로 친해졌는지 한채연은 이철산에게 바가지를 긁어 댔다.
연적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채연과 이철산의 관계가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한채연이 귀찮게 굴지 않아 시원하면서도 조금 섭섭했다.
슬쩍 하소백을 보니 쓸쓸한 얼굴이다.
그제야 연적하는 느껴지는 바가 있어 오봉십걸들을 하나씩 살폈다. 의형제들의 분위기는 천생 도적인 심양각과 조금 달랐다.
의형제들 중 산에 오르기 전부터 도둑질을 한 사람은 마형도와 허임달뿐이다. 나머지는 먹고살기 힘들어 도적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면 산채를 떠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개봉이나 정주로 가서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하소백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철산이 정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상한 건가?’
하지만 아무리 다른 걸 생각하려고 해도 마지막은 언제나 같다.
창고와 큰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과 원로들이…… 싫다.
그 외에 다른 건 딱히 의미가 없다. 만사가 귀찮을 뿐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싫은 기억’뿐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걸 떨쳐 낼 수 있을까?
***
하남성.
평정산.
백세상방의 긴 대열이 꼬리를 물고 산으로 들어갔다.
상방 무사만 스물다섯이나 되는 대규모 상행이다.
첫 상행이었지만 선두에 선 청룡대 대주 연무도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사실 와룡장의 순혈인 그는 녹림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 전 그의 사촌동생 참월검객 연무룡이 구천검으로 강호에서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와룡장의 연씨들은 그들이 익힌 구천검이 무림세가 못지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녹림의 도적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멈춰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장한 삼십여 명의 도적들이 상방의 앞길을 막았다.
연무도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누가 봐도 자신감에 찬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다.
“본인은 백세상방의 호위를 맡고 있는, 청룡대주 연무도요. 평정산에 있는 호걸들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산을 넘고 싶은데, 가르침을 내려 주시오.”
적풍채 채주 염라도부 장한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전의 백세상방 무사들과 사뭇 달라진 태도에 속이 뒤틀린 것이다. 하지만 홧김에 들이박기에는 상대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한번 붙어 보잔데…….’
연무도라는 이름은 처음이지만 제법 고강해 보인다.
‘직접 나서자니 모양새가 빠지고, 대신 내세울 만한 놈이 있으려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적당한 놈이 보이지 않았다.
적풍채에는 왜 오봉십걸 같은 놈들이 없는지 아쉬울 뿐이다.
결국 장한위는 곁에 있던 부채주 살인대도 요범을 툭 건드렸다.
요범이 그의 뜻을 알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본좌는 살인대도 요범이다. 나와 겨뤄 볼 담력이 없다면 은자 백 냥을 내고…….”
요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무도는 검을 뽑았다.
“좋소. 해 봅시다.”
말과 함께 연무도가 검 끝을 지면으로 늘어트렸다.
사십 년 가까이 구천세법을 익히다가 도달한 나름의 자연체다. 연무도에게서 절정고수의 기백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싸우기 전부터 상대에게 압도당한 요범은 부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칼도 안 뽑았다가는 수하들 앞에서 면이 서질 않는다.
‘개놈의 자식. 시비를 걸다니! 그냥 얼마나 내면 되느냐고 묻지…….’
요범은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말이 칼이지 거의 창에 가까운 대도다.
병기의 이점이 먼 거리에 있는지라 요범은 대도를 뽑자마자 거칠게 휘둘렀다.
쐐애애액. 쐐액.
연무도는 슬쩍 몸을 트는 것만으로 대도를 피해 내고는 앞으로 성큼 내디뎠다.
곧이어 연무도의 검이 지면에서 허공을 향해, 거꾸로 쓰는 갈지자[之] 형태로 솟구쳤다.
제일 식 비룡승천이다.
구결은 ‘검기를 불러일으킨다’지만 연무도는 ‘그 정도로 강맹하게 하라’고 배웠다.
쉬이익.
검이 지나간 자리로 검풍이 일었다.
어찌나 강력한 검풍이던지 요범의 대검이 한차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연무도는 요범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삼 식 운룡풍호를 펼쳤다.
검 끝이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현란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멈췄다.
꿀꺽.
요범은 상대의 검첨(劍尖)이 목울대에 닿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상체를 살짝만 움직여도 검에 목이 꿰일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요범이 대도를 슬그머니 내렸다.
그제야 연무도는 검을 회수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연무도의 모습에 장한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헐! 저 정도 고수라면 이름이 알려지고도 남았을 텐데…….’
자신이 나서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가뜩이나 도끼와 검은 상성이 좋지 않은데 괜히 추한 꼴을 보일 뻔했다.
장한위는 대범한 척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연무도라 했느냐? 실로 뛰어난 검법이다. 좋은 무위를 보여 주었으니 그냥 보내 주마. 얘들아! 가자!”
장한위는 호걸의 흉내를 내며 미련 없이 돌아서 숲으로 사라졌다.
행수 왕이강이 연무도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를 추켜세웠다.
“연 대주, 정말 훌륭하십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오십 냥도 싸게 먹힌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짜로 지나가게 되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그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연무도는 우아하게 납검을 한 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청룡대 무사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그 뒤를 따랐다.
***
이틀 후 오봉산.
팔십 명쯤 되는 대규모 상단이 오봉산에 나타났다.
무한으로 가는 백세상방이다.
청룡대 무사 스물다섯이 주변을 살피는데 크게 긴장한 얼굴은 아니다. 적풍채의 일도 있었거니와 오봉산채는 유순하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다.
백세상방이 오봉산에 들어서고 한 시진쯤 지났을까?
초록색 깃발이 매달린 장창 하나가 날아와 길 한복판에 꽂혔다.
뒤이어 이십여 명의 도적들이 숲 속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임시로 산채를 맡고 있는 독심낭인 황요명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험! 오봉산을 허락도 없이 오르다니 오봉산채가 두렵지도 않으냐!”
그러자 청룡대 대주 연무도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백세상방이오. 오봉산채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상인이 스물이니 은자 스무 냥을 드리리다.”
연무도는 ‘무당파의 천지상인도 당해 내지 못했다’는 말에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남의 돈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목숨이 더 귀하기 때문이다.
황요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세 봐도 상인만 서른이 넘는 것 같은데 스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상인이 스물이면 나머지는 다 뭔가?”
“그들은 짐꾼들에 불과하오.”
황요명이 불편한 눈으로 짐꾼들을 쏘아보았다.
오랜 시간 통행세를 받다 보면 개안(開眼)을 하게 된다. 이제는 척 보면 상대가 잡부인지, 짐꾼인지, 쟁자수인지, 시종인지 알 수가 있다.
‘요놈 봐라. 상인이 못해도 서른다섯은 넘는 것 같은데 스물이라고?’
서른이라고 하면 까짓것 모른 척하고 넘어가 줄 수가 있다.
그런데 스물이라니?
울컥하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았다.
일단 상방 무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물론 이 자리에 오봉십걸들이 있었으면 뒤집어엎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전력으로는 무리다.
‘개 같은 놈. 백세상방이라 이거지. 오냐, 두고 보자. 양심 없는 사기꾼 같으니.’
황요명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손을 내밀었다.
순간 연무도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상인이 마흔이나 되는데 그 절반 값으로 통행세를 내게 됐으니 대성공인 셈이다.
연무도는 은자 스무 냥이 든 주머니를 넘기고 가볍게 읍을 해보였다.
“고맙소. 오봉산채와 우의를 다질 수 있게 되어 기쁘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리리다.”
“그러시든지.”
황요명은 다소 쌀쌀맞게 답하고 돌아섰다.
지금은 힘이 없어 참지만 오봉십걸만 돌아오면 제대로 복수를 하고야 말리라.
***
탑하.
탑하는 오봉산에서 사흘 정도 떨어진 도시다. 그래서인지 오봉십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더 이상 비룡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봉십걸들이 조금씩 차분해지는 반면 심양각은 잔뜩 들뜬 얼굴이다. 걸어가면서 자꾸 유엽도를 만지는 걸 보니 도적질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연적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문득 부양의 한 반점에서 정의맹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귤을 회수 이남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회수 이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
그도 방통이 심양각이라는 걸 알았으리라.
귤이니 탱자니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테고.
‘쯧쯧! 저 늙은이는 회수 이남이나 이북이나 항상 탱자야. 타고났다니까.’
오봉십걸들은 오봉산을 내려와서 도적이라는 걸 잊고 지냈다. 어쩌면 오봉십걸들에게는 오봉산이 회수 이북인지도 모르겠다.
오봉산에 가까울수록 씁쓸해하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저게 바로 천생 도적인 사람과, 살아 보겠다고 도적이 된 사람의 차이다.
그런데 연적하는 그런 모습까지도 부러웠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하다는 뜻이니까.
자신은 마치 하얗게 타 버린 등잔의 심지처럼, 아무것에도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쩝, 귤이는 탱자는 알 게 뭐람.